알빌플랜팅가는 우리 머리 속에서 '완전한 탁월성'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현실에서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을 증명하려면 반대로 해 보아 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데 완전한 탁월성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완전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다시 말하면 현실에 없는 '완전한 탁월성'이라는 개념을 내 머리속에 있다고 '완전한 탁월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증명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앨빈 플랜팅가
따라서 '완전한 탁월성'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이 세계에서 존잰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존재 증명으로 오면 상상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비판받는 신의 존재가 부정되려면 우리 머리속에 아예 그런 개념이 없어야 한다. 그럴려면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우리 머리속에 완변한 신의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머리속에 존재하는 것들은 현실에도 존재한다고 말한다. 안셀무스(11세기 신학자)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든 알빈 플랜팅가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설명과 약간 다르게 리차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의 개념에 의하면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에 개념을 현실로 구현해 낼 수 있는, 한 마디로 창조해 낼 수 있는 방법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쉬운 예로 마블의 아이언맨은 기술력만 조금 높아지면 현실에서 창조해 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상상속에 존재는 곧 현실적인 존재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상상이 현실이 된 존재가 다시 사람들의 머리속에 인식되면서 새로운 상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원인론적 증명은 제1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어떤 현상의 원인에 원인으로 가다 보면 필연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가 신이라고 하는 것이 보통 신학자들의 논증이고, 그 원인이 신이 아니라 어떤 우주의 힘이나 다른 생명체라고 보는 것이 보통 '이성적인 신존재 증명'의 한 가지 흐름이다.
안셀무스나 플랜팅가 그리고 칸트의 경우는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신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 '살이 있는 신'을 내가 만났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비판하면서 '논리적으로 신'을 증명했다.
인간이 원래 통합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성과 감성 그리고 영혼과 육체가 하나가 되어서 '하나'의 어떤 이해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아직까지 완전하고 통합적인 이해를 가지지 못했다. 분할하고 나누고 선택한 결과 '통합'적인 이해보다는 편파적인 이해로 우주와 세계, 사람과 동물을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속적인 실체를 비연속적인 실체로 인식하여 분리하고 추출해서 증명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직까지 완전하고 통합적인 이해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런 작업을 그만두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겸손한 학문적 엄밀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학문의 목적에 대해서도, 학문이 가지고 오는 영향과 지식인의 책무에 대해서도, 지적인 윤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인간이 '생명'을 이해하기까지 다양한 해석들이 갈등을 한다. 그 해석의 갈등에 자칫하면 애매한 사람이 돌에 맞아 죽는다. 우리시대 실존주의가 그렇고 허무주의가 그렇다. '지식의 저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더욱 공부해야 한다.
'지식의 저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더욱 공부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적는 순간에도 다양한 생각과 함께 육체의 다양한 감각들이 서로 교통한다. 부교감과 교감 신경 뿐 아니라 아드레날린과 도파민뿐 아니라고 소장에서, 대장에서 분비되는 효소들과 머리속에 뉴런들이 신경전달물질을 주고 받는 것이 느껴진다. 이것과 함께 나의 영혼을 계속 호흡을 하고 있고,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만나서 새로운 기억과 자아에 대한 이해를 깊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