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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an 09. 2021

경쟁은 야만이야!

여기는 운동장이 아니라 공원이라고

50미터쯤 달리고 나면, 평발로 태어난 나의 인생을 원망하듯이
앞서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숨을 헐떡였다.


더 빨리 달려야 하는데, 더 멀리 달려야 하는데. 나의 폐는 거기까지가 한계라고 말해주었다. 100미터를 골인하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겨우 4등을 했다. 3등에 들지 못해서 서럽고 아쉬워서 집에 가는 내내 고개숙이면서 내 인생을 한탄했던 초등학교 시절. 나는 경쟁이 야만적이라고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그 경쟁에서 도태되는 내가 미워지고 우리 아버지가 미워지고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온 운동신경이 저주스러웠다. 그러고 나서 한참동안도 나는 달리기를 잘 못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신체적인 능력보다는 오히려 심리적인 요인이 더 컸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앞서서 갈려고만 치면 나는 그 다음부터 포기하기 일쑤였으니깐.



중학교때는 선생님이 시험과목마다 1등부터 꼴뜽까지 불러 주었다. 그 당시 반에서 맨 뒤에서 놀다보니깐 그 시간만 오면 나는 '엄마 나 학원 언제보내주나?'이런 볼멘소리만 하고 책상 바닥을 한 없이 긁고 있었다. 40등까지 불리고 나서야 겨우 내 차례가 오면 나는 온 세상이 지구의 핵으로 빨려 들어 간듯이 땅을 보면서 성적표를 받아 들고 왔다. 어느순간 이런식으로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잠도 줄여가면서, 가족들에게 온갖 인상을 찌푸리면서. 그렇게 1년을 했을까? 이제는 교회가서 자랑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부모님의 자랑이 되어가는 시기. 학교에서 집에 오는 내내 떨어지는 낙엽들이 그렇게 구슬플수가 없었다. 달도 차면 기운다는데, 성적이 올라갈 수록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감에 쉽게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수능때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 친구들은 내신형 인간이라면서 나를 조롱했고, 반에서 겨우 유지하던 실력이라는 것도 다 바닥까지 드러날 때까지 나는 나의 우울증을 먹고 자랐다. 그렇게 버틴 6개월 만에 수능을 그래도 괜찮은 실력으로 붙고 어느 지방대를 기독교 대학이라고 해서 들어갔다. 사실 그 당시에는 어느지방대는 아니었으나 지금은 어느지방대가 되어 버린 학교이다. 지방대 출신이라고 하니 교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곳에서는 인정받지 못하였다. 초등학교 때 달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이제 50미터 정도도 안달린 것 같은데 서울 명문대를 나온 친구들, 혹은 해외 유학을 다녀온 친구들은 이미 1000미터 달리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50미터도 겨우 왔는데 앞으로 몇 백 미터를 더 뛰라는 거야? 포기하고 싶었다.



1000미터 트랙을 열실히 달릴려고 해도, 태어난 게 이모양이고, 정신력도 악착같지 않은데 머리도 그렇게 좋지 않으니. 나는 자신이 없었고 점점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 보았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20년이 흘러갔다. 어느덧 나는 지니계수에서 빈곤의 자락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아니 사실 처음부터 그러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곡선을 만들고 그 곡선에 간신히 턱걸이를 하듯이 넘어갔다가 다시 내려왔다가 빈곤계층이었다가 88만원 세대였다가, 차상위 계층이었다가 임대아파트 입주민이었다가 어느 지방대 시간강사입니다라는 책을 들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여기까지 읽으며 아주 망나니는 아니여도 가엾고, 불쌍한 삶을 산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은 나의 가족사와 힘들게 지내온 나날들을 간증으로 들으면서 아이고 우리 경인이를 위해서 기도합시다~이러고 있었으니깐. 나는 경쟁이라는 시대의 발명품의 피해자가 되어서 몇십년을 살았다. 피해자 코스프레도 해보고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 꼼수도 부려봤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어느날 나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지구의 90%를 넘는 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 대부분은 나보다 더 달리기를 못했다. 물론 세상의 10%정도는 더 잘했다. 나는 더 잘하는 선수가 되고 싶어서 그렇게 달렸나보다 했다. 90%의 사람들은 오히려 달리기에 매달리기보다는 달리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조금 더 내려가니깐 어떤 사람들은 아예 달릴 생각이 없었다. 왜 달릴 생각이 없냐고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아주 많은 사람들로 부터, 그들의 표정에서, 미소에서, 뒷모습에서, 삶의 행태에서 그 답을 들 수 있었다.


여기는 운동장이 아니라 공원이란다!!



그러고서야 깨달았다. 여기는 달리기 하는 곳이 아니라 쉬면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누리기 위한 공원이었던 것이다. 달리기 하는 사람들이 하나하나 뛰니깐 나도 따라서 뛰었는데, 나는 그렇게 트랙에서 열심히 달리고 싶었는데, 그래서 나는 뒤쳐서서 힘들었는데. 여기가 공원이었다니. 그것도 삶을 누리기 위한 곳이었다니. 눈을 씻고 찾아보니 공원들은 다 개발되어서 달리기 트랙이 되었다. 운동장도 나무들을 다 뽑아버리고 건물을 심어 놓고서는 계속해서 감시하고 더 높이 쌓아 올리려고만 했다. 1층에 사는 사람이 하층민이고 팬트하우스에 사는 사람이 귀족이었다. 예전에는 달리기하면 승자가 우승컵을 가지고 갔는데, 이제는 모든 것들 다 가지고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공원에서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히려 그 공원을 더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재개발은 우리의 내면에서, 인식에서, 경험에서, 실제로 이루어졌고 달릴 준비하는 아이들을 계속해서 키워내고 있었다.


경쟁은 야만이다


그 어느것 하나 인간다운 것이 없다. 경쟁하는 인간은 거의 동물에 가깝다. 대화하고 상대방의 눈을 보고 이해하며 마음을 열어 놓고 모임을 해도 모자를 판에 상대방의 눈을 피하면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빨리 달릴까라고 하는 것은 가만 보면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동물들을 설명할 때 쓰는 용어였다. 하물며 동물들도 경쟁은 안한다. 먹고 살아야 하는 때만 잠깐 그럴 테지. 어떻게 인간이 매번 그렇게 경쟁을 일 삼으면서 다른 사람을 누루고 내가 먼저야~라고 하는 삶이 옳고 혹은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나 더더욱 그런 '경쟁을 문명'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문화가 넘쳐난다.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을 받아줄 곳은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낙인처럼 차상위계층, 빈곤층, '누구 이름을 붙여서 누구네 가족의 겨울 이야기'이런 식으로 대상화하면서 자신의 방식을 정당화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세상.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표현도 마찬가가 아닌가? 운동장 아니라고! 여기는 공원이라고! 앉아서 좀 쉬고 고민하고 수다도 떨고 누워서 하늘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 보기도 하고, 미술작품도 보고, 음악도 듣고. 모르면 알려주고 더 알고 있으면 공유도 해주고. 그런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바보 같아진 세상이 정말로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사회라고? 서열화와 자기착취로 점철된 교육이 세계 올림피아드에서 1등 받아 오면 한국교육 우수하다고? 웃으면서 공부하는 다른 나라 아이들과 비교해서 성적만 좋으면된다는 논리는 자신들의 욕망을 투영한 결과가 아니고? 돈 많으면 인간성이 나빠도 우러러 볼만하고 대기업 사장이면 무슨 못된 짓을 해도 눈감아 줘야 한다고?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시대에서 달리기를 포기하는 무모한 사람들이 나올 수 있을까? 공원을 만들어 갈려고 부지런이 밭을 갈고 돌뿌리를 걷어내는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 달리기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맞게 제도를 만들어 버리고 권력 앞에서는 굴종하면서 만들어 놓은 시대의 산물들을 그냥 받아 먹으라는 건가.


나무를 심는 사람이 되자


나도 안다. 세상물정 모르는 아저씨의 고백처럼 들린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나무를 심는 사람이 되고 싶다. 부지런히 부지런히 나무를 심어서 내가 죽고 언제가 함께 심었던 나무가 운동장을 공원으로 만들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운운하면서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드는 일도 없이, 경쟁에서 이겨야만 인생에서 승리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일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꿈꾸고 실천하고 싶다.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마음, 낭만적인 생각과 사람들 사이에서 여유를 좀 부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즐거운 미소와 훈훈한 마음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가득차면 불합리한 현실을 더욱 단단하게 바꿀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 오늘도 찾아가고 만나고 잘못된 것들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바꾸면 좋겠다는 나름의 대안도 만들어보고 싶다. 나무를 심는 사람이 되자. 우리의 마음에도, 미래에도,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생각에도, 우리 나라에도, 우리 동네에도.


 



장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 https://www.youtube.com/watch?v=X2aYTYmKg0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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