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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Dec 19. 2020

힐링 혹은 킬링

심리정치*한병철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점점 세련된 자기 착취형식을 고안해낸다. 수많은 자기 관리 워크숍, 모티베이션 주말워크숍, 인성세미나, 멘탈트레이닝은 자아 최적화와 효율성 향상을 약속한다. 이러한 행사들은 우리의 노동 시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격 전체, 우리의 모든 관심, 우리의 삶 자체를 착취하려고 노리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에 조종된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은 인간을 발견하고 그 자체를 착취대상으로 삼는다.


자아를 최적화하라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은 시스템 내에서 완벽하게 기능하라는 명령이 지난지 않는다. 효율성과 성과의 제골를 위해 심리적 억압, 약점, 실수 같은 것은 치료를 통해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비교 간으하고 측정가능한 것으로 환원되고 시장의 논리에 종속된다. 자아의 최적화를 추동하는 것은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이 아니다. 자아 최적화의 필요성은 시스템의 강제, 즉 양화 가능한 성공을 요구한느 시장 논리에 유래한다.


군주의 시대는 재화와 노역을 빼앗고 가로채는 착복의 시대다. 군주의 권력은 무엇보다도 처분권과 압류권으로 나타난다. 반면 규율사회는 생산에 중점이 놓여 있다. 규율사회의 시대는 적극적인 산업적 가치 창출의 시대다. 이러한 실물 가치창출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오늘날의 금융자본주의에서는 심지어 가치의 극단적인 파괴가 진행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와 함께 소진의 시대가 개막된다. 이제는 심리가 착취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는 우울증이나 소진 증후군 같은 심리적 질병을 함께 가져온다.


미국의 자기개발서에서 통용되는 마법의 주문은 힐리이다. 힐링이란 효율성과 성과의 이름으로 모든 기능적 약점, 모든 정신적 억압을 치료를 통해 깨끗이 제거함으로써 자아의 최적화를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스템의 최적화와 완전히 부합하는 부단한 자아 최적화는 파괴적이다. 그것은 결국 정신의 붕괴로 끝나고 만다. 자아 최적화는 완벽한 자아의 착취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난다.


신자유주의의 자아 최적화 이데올로기는 종교적, 광신적 특징을 나타낸다. 그것은 새로운 형식의 예속화다. 자아를 대상으로 하는 끝없는 노력은 종교적 지배와 예속화의 기술인 프로테스탄트적 자기 성찰과 자기 검열을 닮아 간다. 이제는 수색 대상이 죄가 아니라 부정적인 사라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자아는 또다시 자기 자신이라는 적과 씨름한다. 오늘날 개신교 목사는 마치 매니저나 모티베이션 트레이너처럼 활동하면서 무한한 성과와 자아 최적화의 복음으르 설교한다.


사람의 인격을 긍정성의 강제 속에 완전히 묶어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정성이 없다면 삶은 '죽은존재'로 쭈그러들 것이다. 부정성은 삶을 생동하게 한다. 고통은 경험의 본질적 부분을 이룬다. 삶이 순전히 긍정적 감정과 플로우 경험(몰입경험) 만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인간적 삶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영혼에 깊은 긴장을 선사하는 것은 바로 부정성이다. "저 불행에 빠진 영혼의 긴장, 그 긴장이 영혼에 시미어주는 강인한 불행을 견디고, 버티고, 해석하고, 이용하는 영혼의 창의성과 용기, 그리고 예로부터 비밀, 가면, 정신, 계략 위대함으로부터 영혼에 선사되는 것-그것을 영혼은 괴로움 속에서, 엄청난 괴로움의 훈육 속에서 선사받지 않았던가?"


끝없는 최적화의 명령은 고통마저 착취한다. 미국의 유명한 모티베이션 트레이너인 앤서니 로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CANI원칙을 꼭 지켜라! Constant Never Ending Improvement. 부단히, 끝없이 개선할 것! 부단히 끝없이 더 나아지고 싶다는 소망, 모든 인간이 느끼는 소망을 솔직히 인정하라. 불만족, 긴장을ㄹ로 인한 일시적인 컨디션 난조에서 생겨나는 스트레스가 다시 힘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당신의 삶 속에서 필요로 하는 종류의 고통이다." 그러니까 오직 최적화라는 목적의 관점에서 이용가능한 고통만이 용인된 것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부정성의 폭력만큼이나 파괴적이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의식 산업을 활성화하며 이로써 결코 긍정 기계일 수 없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자아 최적화의 명령, 즉 더 큰 성과를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강제 속에서 몰락해간다. 힐링은 킬링으로 귀결된다.


_'심리정치' 한병철





1인 감시체제 판옵티콘


제레미벤담이 죄인들을 감시하기 설계한 1인감시체제인 판옵티콘은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속에서 부활했다. 이제는 판옵티콘이 우리내면에서 우리를 감시한다. 어느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편집증적으로 성과에 집착하고 옆에 있는 타자와 경쟁의 구조를 당연시 여긴다. 누가 규율을 부여하고 감시하지 않아도, 나 스스로 나를 감시하고 죄책감과 열등감 속에서 살아간다. 비교의식이 인간 본연의 것이며, 경쟁은 문명의 조건으로 읽힌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경쟁해서 결과를 얻는 것이 '공정하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지만 그것이 착각인지 모른다.


정치는 가치의 권위적인 배분이다. 심리정치는 우리내면에서 가치를 배분하는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성과에 목말라 피로에 지친 영혼에게 에로스는 종말했고 타자는 추방당했다. 오늘날 나 하나도 지키기 힘든 이들에게 고통받는 이들을 지켜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너무한 일이 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은 당위와 욕망 사이, 초자아와 리비도 사이에서 계속해서 비교를 당하면 자연스럽게 죄책감을 갖는다고 한다. 죄책감이 축적될수록 열등감은 심해지고, 자아가 부실한 이들은 항상 권력에 굴종하게 되어 있다.


'할수있다!'라는 구호는 할 수 없으니깐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정말로 할 수 있으면 '할 수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고싶다'와 '할 수 있다' 모두 심리정치의 영역이다. 한번도 자신의 가치 바깥, 욕망 바깥으로 나가보지 않은 이들에게 이 두단어는 자유의 느낌을 주기는 한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을 아무리 해도, 할 없는 것들을 아무리 할 수 있게 만들어도 평화가 찾아오지 않고 마음이 상쾌해지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구원해줘'라고 말하는 이들이 생긴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들을 원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은 여전히 요구와 욕구 사에서 방황하며 그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다.


나에게 명령하는 명령은 어디로 부터 온 것인가를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계속해서 피로사회의 주인공이 된다. 보이지 않는 판온티콘에 갖힌 인간의 특징은 자도자도 피곤하고 쉬어도쉬어도 더 쉬고 싶다는 것이다. '죽고싶지만 떡볶이는 먹고싶다'라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놓은 새로운 '자유의 착취구조'이다. 죽는 것보다 욕망이 더 중요한 사회, 야만적인 경쟁이 오힐려 문명의 운영원리가 되는 사회에서 자유는 없다.


인도-아랍어의 기원에서 '자유'는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에서 시작된다. 타자는 이질적이고 부정적이만, 오히려 타자로 인해서 내 안에 판옵티콘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이 없이 스스로 주체성을 구성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자유가 비로소 시작되는 지점이다. 나와 다른 친구는 부정적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자체가 혼자서 존재할 수 없고, 원래 인간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타자가 구원이다. 에로스는 재발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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