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그 개념의 역사_ 데이비드 노글
세계관에 관심을 가지고, 철학을 공부한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세계관의 입장에서 생각의 흐름을 보면,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해석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딜타이가 이야기하는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듣고 있으면, 오만 생각이 다 든다. 자연과 인간을 구분하는 것에서부터 역사에 대한 해석까지, 가끔은 정말 그렇게 생각해?라고 물어보게 되기도 한다. 이번시간에는 야스퍼스를 지나서 딜타이의 세계관에 대해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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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Jose Ortega y Gasset가 "19세기 후반의 가장 주요한 철학자"라고 불렀던 빌헬름 딜타이(1833~1911)는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nften이론과 역사학의 방법론 문제에 대한 공헌, 해석학 분야의 창조적인 연구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세계관에 대한 그의 선구적이며 체계적인 논의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다른 많은 이들처럼 마이클 어마스는 세계관에 대한 딜타이의 성찰이 독특한 기여를 했으며 그의 철학에서 이 개념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세계관 문제를 종합적, 이론저긍로 진술한 사람은 딜타이였다. 이 분야에서 그는 후대에 다른 많은 분야의 학자가 연구할 지적 지형을 개척하고 지도로 그렸다. 그의 저작들은 세계관의 기원과 연결, 비교, 발전을 전면적으로 다룬다. 그의 세계관은 혹은 '학'은 이 사상의 변두리 영역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근본 요소 중 하나이며 그 자체로 주의 깊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임마누엘 칸트가 자연과학을 위한 객관적 인식론을 제시하려고 한 것처럼, 세계관에 대한 딜타이의 성찰은 인문학을 위한 객관적 인식론을 공식화하려는 그의 전반적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는 학문적 진리와 객관적인 역사적, 문화적 지식의 가능성에 가장 관심이 많았지만, 그의 사유는 그가 '생생한 체험'이라고 불렀던 실제 삶의 문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모든 참된 세계관은 삶 가운데 서 있음으로부터 생겨나는 직관이다'라고 딜타이는 주장했다. 삶 자체가 해명이 필요한 수수께기다. 한 사람의 얼굴을 얼핏 보고 나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추측해 보려는 것처럼 수수께끼 같은 삶의 겉모습은 더 깊이 연구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삶의 비밀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려 깊은 사람들은 언제나 우주적이며 개인적인 문제에 몰두할 것이다.
모든 시대의 인류는 똑같이 신비로운 모습을 한 경험이라는 수수께끼를 마주한다. 우리는 그 특징을 흘끗 보기도 하지만, 그 이면의 영혼에 대해서는 짐작만 할 뿐이다. 이 수수께끼는 언제나 세계 자체와 이 세계 안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안에서 내 삶은 어떻게 끝날 것인가? 하는 물음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모든 물음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물음이며 나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물음이다. 천재 시인과 예언자, 상상가는 모두 이 물음엠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인간은 대체로 의문문 형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기원과 행동, 목적, 죽음, 특히 세계 안에서 인간의 운명에 관한 물음은 시인과 철학자, 예언자 모두의 관심사다. 따라서 딜타이는 키에르 케고르 전통에 속한 실존주의자처럼 '인간이 사는 그대로의 삶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 인간의 목표다'라고 주장했다.
딜타이에 따르면 삶을 이해한다는 목적은 사실 영속적이며, 절대주의적인 용어로 삶의 윤곽을 밝혀내려는 보편적인 형이상학적 충동을 통해 표출되었다. 역사의식의 대두는 이 보편적인 형이상학적 체계가 대단히 제한적이고 상대적이며,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역사적 특수성과 기질에 따른 기능일 뿐임을 논증한다. 최종 분석에서 형이상학적 체계는 아무리 권위 있고 장엄해 보여도 거짓이었다. 형이상학의 역사는 사실 철학적 실패의 역사다. 앞으로도 형이상학의 모든 시다고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딜타이는 철학적 체계와 인류의 역샂거 조건에 대한 점증하는 인식 사이에 모순이 존재함을 알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실재의 본질을 정의하는 절대적, 과학적, 형이상학적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회의적 결론을 내린다. 형이상학은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용 가능한 것은 세계관(인간과 역사의 경험이라는 우연적 요소에 근거하며 삶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노력하는 세계관)이다.
세계관은 지성적, 정서적, 의지적 측면에서 인간 영혼의 구조를 반영할 뿐 아니라 그 형성에 잇어서 세계관을 주창하는 사람의 낙관적 혹은 비관적 기분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세계관은 인류의 종교적, 시적, 형이상학적 충동을 표현하는 수단이며, 자연주의와 자유의 관념론, 객관적 관념론이란 세 가지 기본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각각은 실재의 특정한 양상을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전체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딜타이에 따르면 한 사람이 자리잡고 있는 귀퉁이를 세계 전체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일부 비판자들은 딜타이가 자신의 문화를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상대주의의 손아귀에서 구해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사물의 본질에 관해 말하자면 신이 보는 괌점도, 그 용어의 본래 의미에 따른 순수한 테오레인도, 역사적 백내장에 걸리지 않은 맑은 시각도, 순수 보편적 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알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인식하는 주체와 그의 역사적 지평이 맺는 관계에 의해 제약을 받는데, 이 제약은 특정한 지평에 따라 그 범위가 제한된 사실들의 특정한 그룹에 해당된다.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에서 그 대상은 특정한 관점에서만 존재한다.그러므로 그것은 대상을 보고 아는, 특수하게 상대적인 방식이다."
그러므로 세계관 개념은 진리와 사물의 궁극적 본질에 관해 불가피한 회의론을 만들어 낸다. "이 상대성의 소용돌이 안에서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상은 이 딜레마에 대해서 급진적인 반응이었다. 관점주의라는 그의 개념은 딜타이의 세계관론이 지닌 상대주의적 함의를 논리적 결론으로 이끌어 간 것처럼 보인다.
1) 외재적 주관
외재적 주관은 자아 외의 존재하는 지향성이 닿아서 인식된 자연, 사물, 공기, 건물, 우주와 같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우리의 주관에 의해서 그것들을 계속해서 인식된다.
2) 내재적 주관
내재적 주관은 외재적 주관이 인식될 때 내 안에서 느껴지는, 이해되는 것들이다. 몸이 아프다거나, 마음이 좋다던가, 머리가 아프던가, 시원하다라는 등의 여러가지 인식들이 내재적 주관을 만든다.
3) 수리적 주관
수리적 주관은 수학적 주관과 같다. 외재적 주관과 내재적 주관도 마찬가지로 몇개가 있는지, 어떤 배열로 구조화되어 있는지, 어느정도라고 말할 수 있을려면 수리적 주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4) 타자적 주관
타자적 주관은 다른 사람을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외재적 주관과 다른 부분은 다른 사람을 사물로 인식하지 않고 타자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 것들을 인식하는 것처럼 타자도 나처럼 다른 것들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같은 의식적인 능력이 있으나 그것도 역시 내 안에서는 '그와 그녀에 대한 주관'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주관은 의식과 시선의 주관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초월론적 주관이라고 부르는 메타인지에 의해서 매번 종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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