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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ug 24. 2020

칼야스퍼스의 세계관

세계관 그 개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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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퍼스, 소개


1883년 독일 올덴부르크의 부유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18살에 그는 폐결핵을 진단받는데, 매일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던 그의 상황은 후술할 나치독일에 의한 고난과 더불어 '한계상황'의 정의와 자각에 큰 영향을 끼친다.

젊을 시절 법학과 의학을 공부하고, 이후 심리학과 정신병리학[2]을 연구했으며, 철학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해 인간 정신의 실존성을 탐구했다[3]. 그는 이런 사색과 분석의 과정을 암호 해독에 비유했다.

1913년부터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로서 지낸다. 1938년 나치에게 아내 게르트루트 마이어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이혼을 강요당하지만 이혼을 거절하고, 교수직을 박탈당한다. 이후 그는 독일에서 아내와 함께 나치의 탄압을 피해다니며 끝까지 아내를 지킨다. 

철학》 3편,《이성과 실존》, 《현대의 정신적 상황》, 《역사의 기원과 목표》를 비롯한 수많은 책과 논문들을 집필했으며, 그의 사상은 칸트, 니체,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한 것이다.

하이데거와 실제로 만나 교류했었다. 한나 아렌트를 지도했던 적이있다.

야스퍼스는 탄생, 죽음처럼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한계상황[4]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했다. 그는 한계상황에서 인간은 자신을 자각하고 철학적 사고를 통해 진정한 실존에 다가설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다가 온 냉전 역시도 사람들이 실존에 다가서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냉전이 가치를 지닌다 보았다. 단, 여기서 냉전 자체가 가치있는 일이라는 뜻은 아니며, 냉전을 통해 사람들이 실존을 자각하고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점을 가치있게 보았다고 해야 정확하다.

종전(1945년) 후 교수직에 복직해 말년인 1948년부터는 스위스바젤 대학에서 교수로 지냈지며, 1961년의 은퇴 이후에도 바젤에서 머물다가 1969년에 생을 마쳤다.



야스퍼스, 세계관

칼 야스퍼스는 그의 중요한 초기 저작인 세게관의 심리학(1919)을 토해 세계관 역사에 기여했다. 야스퍼스는 개인의 정시적 삶을 형성하며 그의 정신적 표현의 형식적 특징을 결정하는 다양한 준거틀을 세계관Weltranshauung이라고 정의했다.

야스퍼스에게 세계관은 '주관적으로는 경험과 능력, 확신으로서, 객관적으로는 대상으로 나타난 세계로서, 인간 안에 궁극적이며 완전한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한다.

야스퍼스에게 세계관은 주관으로서 태도Einstellungen, 객관으로 세계상Weltbilder으로 나누어진다.

태도는 세계를 능동적, 관조적, 합리적, 심미적, 감각적, 금욕적으로 혹은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는 정신적 실존의 형식적 경향과 구조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자신이 경험한 세상을 나름대로 인식하여 세상에 대해서 갖는 행동의 방향이다. 태도는 주관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심리학적인 분석의 대상이 된다.

세계상은 '개인이 소유한 객관적인 정신적 내용의 총체'이다.

기본적 태도를 통해서 개인은 객관적 세계와 만나고, 그것에 대해서 정신적 그림을 만든다.

태도와 세계상의 결합이 세계관을 이룬다. 주관과 객관이 만나서 '세계에 대한 이해'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본원적 세계관들Weltanschauungen에 관한 질문이 제기될 때, 때로는 심리학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로 이런 종류의 심리학을 발전시킨 사상가들의 위대한 전통이 드러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 또한 무엇보다도 1914년 이후 내가 공부해 온 키에르케고어, 그 다음으로는 니체가 나에게는 계시와도 같았다. 이들은 인간 영혼의 구석구석과 그것의 가장 깊은 원천에 대해 보편적인 동시에 대단히 구체적인 통찰을 표현해 냈다

인간에 관한 관심, 사상가가 가진 자신에 관한 관심, 철저하게 정직하고자 하는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나중에 명료한 의식과 광범위한 포괄성으로 나타난 거의 모든 근본적인 질문이 제시되었다. 세계에 대해서는, 인간에게 세계란 무엇이냐는 물음, 인간의 상황과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해서는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죽음, 고통, 기회, 죄책, 갈등)에 관한 물음, 기간에 대해서는 그것의 의미의 다층적 성격에 관한 물음, 자아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자유의 움직임에 관한 물음, 실존(Existenz)에 관한 물음, 허무주의와 껍데기에 관한 물음, 사랑에 관한 물음, 허무주의와 껍데기에 관한 물음, 사랑에 관한 물음, 실재와 진리의 드러남에 관한 물음, 신비주의의 길과 관련므이 길에 관한 물음 등이다.

하지만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은 인상적으로 파악되었고 체계적으로 제시되지 못했다. 이 전체의 분위기는 내가 성공적으로 서술하기에는 너무 포괄적이었다. 이 분위기는 이후 나의 사유의 토대가 되었다

_야스퍼스 '세계관의 심리학'(1919)  





정신의 삶, 정신의 유형

'세계관의 심리학'에서는 세 개의 요소가 나온다. 태도와 세계상, 그리고 이것들을 한번에 포괄할 수 있는 '정신의 삶'Das Lebens des Geisters이다.

정신적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신의 유형'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정신의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한', '경계', '한계상황'Grenzsituationen이라고 부르는 것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한계상황이란 인간이 언제나 일정한 상황 속에 있으며 갈등과 고통, 죄책, 죽음에서 벗어난 채 살아갈 수 없다는 상식적 생각을 담고 있다. 한계상황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이 정신의 유형을 구성한다.

정신의 유형에 대한 본질을 묻는 것은 인간이 어디에 피난처를 찾는지를 묻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회의주의와 허무주의를 피난처로 삼는다. 다른 이들은 제한된 것이나 유한한 것, 합리주의, 권위주의, 절대적 가치관, 혹은 '껍데기'에서 피난처를 구한다.

그리고 야스퍼스와 같이 '무한한 것'이나 '무제한한 것'을 향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신의 유형에 대한 본질을 묻는 것은
인간이 어디에 피난처를 찾는지를 묻는 것이다.


껍데기, 한계상황

야스퍼스가 사용한 껍데기라는 개념은 인간이 어떤 한계 상황을 만나면 깨지거나 벗겨지게 되어 있다는 것. 말그대로 실존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서 한계를 경험하고, 한계 앞에서 자신이 생각하던 피난처가 깨지고 마는 것이다.

"전에는 객관적으로 자명한 삶의 형식과 세계관, 신념, 사상이란 딱딱한 껍데기로 덮여 있던 상황인 한계상황에 대한 의식적 경험과 제한 없는 성찰이란 변증법적 움직임이 이전에는 자명해 보였던 껍데기의 해체로 귀결되는 과정을 촉발한다"

하지만 야스퍼스는 계속되는 논의를 통해서 조개가 껍데기가 없이 살 수 없듯이 인간도 껍데기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삶의 과정에서 한계상황에 직면하면 하나의 껍데기가 제거되고 다른 껍데기로 대체될 뿐이다.

야스퍼스는 "따라서 삶의 과정은 껍데기의 해체와 형성을 모두 포함한다. 해체되지 않으면 딱딱함이 자리잡는다. 하지만 껍데기가 없다면 파괴되고 말 것이다"라고 말한다.

한계 상황에 직면할 때 정신의 유형은 언제나 형식과 혼돈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에 휘말린다. 다양한 정신의 유형은 모든 것을 일종의 통일성이나 총체성으로 묶어내려 노력하지만, 그런 노력은 쓸모 없다. 야스퍼스는 이것을 불가능한 '대립의 종합'antinormal synthesis라고 부른다. 

형식과 혼돈, 대립의 종합 관게에서 야스퍼스는 정신유형이 3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1. 혼돈의 인간은 충동과 기회, 자기 이익에 기초해 살아간다. 
2. 실용적 인간은 기능과 효율에 초점을 맞춘다. 
3. 악마적 인간은 분열된 삶의 창조적 긴장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정신적인 삶의 마지막 특징은 그가 '신비적인' 것의 길과 '관념'의 길이라고 부른 것이다. 신비적인 것의 길에서는 통일성과 총체성을 찾기 위해 주체-객채의 이분법을 돌파한다. 관념의 길에서는 이 총체성을 해체하고 논리적 규제원리와 심리적 힘이라는 관념에 근거해 세계와 영혼, 삶 자체를 바라본다.


인과관계

어떤 경우든 정신의 삶과 다양한 정신유형, 세계상 사이에는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 

세계상은 정신의 삶의 능력을 객관화 한 것이다. 삶의 한계 상황에 대한 다양한 정신 유형의 반응은 객관적 세계 관념으로 구체화된다.

삶과 세계상 사이에 일종의 공생관계가 존재한다. 이 둘은 함께 자란다. 실재에 대한 이미지는 철저하게 흡수되어 다른 모든 특성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일부가 된다. 

자아가 그것의 영향력이나 그것이 어떻게 형서오디는지를 언제나 자각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은 자아를 이루는 구성요소다. 그것은 꼭 선택된 것은 아니지만 삶 체의 기능이다. 

"소크라테스가 영혼 불멸이 존재하는 것처럼 살았듯이, 내가 어떤 관념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내가 그것을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선택한 것은 바로 이 삶이다" 세계상과 경험에는 부침이 있다. 언제나 변하며 언제나 깊어지고 발전하지만, 최종적 총체성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세계상

야스퍼스는 세 종류의 세계상이 있다고 말한다. 

1. 감각적-공간적 세계상
2. 심리적-문화적 세계상
3. 형이상학적 세계상(신화적-악마적 + 철학적)  

형이상학의 세계는 신화적-악마적 세계상과 철학적 세계상이 있다. 신화적-악마적 세게상은 전설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성격을 지닌다. 철학적 세계상은 권위나 계시에서 파생되지 않았고, 주체성이나 객체성의 경험의 절대화에 기원을 둔다. 

주체성의 절대화는 일종의 유심론spiritualism이나 관념론을 만들어내며, 객관성의 절대화는 일종의 유물론이나 자연주의를 만들어 낸다. 

따라서 궁극적 삶의 상황과의 조우는 다른 정신 유형이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게 하고, 다른 정신 유형의 다양한 반응은 다채로운 세계 관념을 만들어 낸다. 이것을 세계관의 객관적 양상이다.

세계관의 주관적 양상은 정신적인 삶의 능력을 주관화한 '태도'나 정신적 구조 안에서 발견된다. 이런 태도는 인간 행동을 위한 강력한 원천과 동기 부여가 된다. 





민네이션, 생각

야스퍼스에 따르면 세계관은 태도와 세계상에 결합이다. 태도는 심리학적인 분석의 대상이 된다. 어떤 사람이 말하는 방식이나 무엇인가를 대하는 태도는 그 사람의 세계관의 일부를 드러내고 있다. 적극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태도는 그 사람이 주관적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방식을 보여준다.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세계관에는 세상이 나의 의해서 바뀔 수 있다는 경험이 포함되어 있다.

세계상도 세계관의 객관적인 부분인데, 이것은 인식의 영역이다. 태도가 output이라면, 세계상은 input이다. 이렇게 바라보는 야스퍼스의 세계관이 있다. 실존주의적인 입장에서 현재 존재하는 것만으로 자아를 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주관과 객관은 초월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내제적인 부분에서만 정리된다.

야스퍼스나 후설, 칸트와 같이 심리를 분류하는 방식을 현상학으로 가지고 오는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세계 안에서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그들의 분류가 보편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들이 말하는 보편이라는 것은 지구라는 한계 상황에서 유럽이라는 장소 안에 독일이라는 작은 세계에서의 '보편'이 아닌가? 오히려 세계상의 데이터는 빅데이터시대가 더 많은 것이라면, 이들의 철학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특히 현상학은 더더욱 그렇다. 





허무주의를 넘어서 : 실존주의


실존주의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허무주의를 초월하라는 것이다. 사실 20세기 초 이후 등장한 주요 세계관들은 모두 이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왜냐하면 문화적 침투력이 강한 세계관의 직접적 결과로 탄생한 허무주의는 우리 시대의 문제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는 세계관은 현대의 사고하는 지성인들에게 적절한 세계관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 실존주의, 특히 세속적 형태의 실존주의는 허무주의를 진지하게 취급할 뿐 아니라 그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실존주의는 완숙한 세계관이 아니기 때문에 이전 세계관의 관계에 따라 두가지 기본 형태를 띠고 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자연주의의 기생물이고 유신론적 실존주위는 유신론의 기생물이다.

제 1차 세계대전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흔들어 놓았다. 좌절과 문화적 불만의 토양속에서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문화적 뿌리를 내렸고,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주요 세계관으로 꽃을 피웠다. 무신론적 실존주위는 다음과 같은 자연주의의 모든 명제를 받아들이며 출발한다.

물질만이 영원히 존재한다, 따라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는 폐쇄 체계 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제로 존재한다. 역사는 인과율에 의해 연결된 사건의 직선적 연속이지만 전체적 계획은 없다. 윤리는 단지 인간에게만 관계된 것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인간의 본질, 인간과 우주의 관계에 대한 명제를 제외하고는 자연주의의 모든 명제를 긍정한다. 실존주의의 주요 관심사는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이 의미가 없다면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의미 있게 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1) 우주는 단지 물질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실재가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2) 단지 인간만이 그 존재가 본질을 선행하게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현재 상태로 빚어낼 수 있다.

3) 인간은 자신의 본성과 운명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롭다.

4) 매우 정교하고 빈틈없이 조직된 객관 세계는 인간과 대립 관계에 놓여있으며 인간에게는 부조리하게 보인다.

5) 객관세계의 부조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그에 대해 반대하는 진정한 인간이 반란을 일으키고 가치를 창출한다.

  

무신론적 실존주위는 허무주위를 넘어 단지 유아론, 즉 87년동안 존재하다가 사라져 버릴 고독한 자아에 도달했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결코 허무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가치라 불리는 탈, 죽으면 깨끗하게 벗겨져 버릴 탈을 걸친 것에 불과하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신학적, 철학적 뿌리에서 발생했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다음과 같은 유신론의 명제들을 받아들이면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삼위의 인격이시고 초월하시고 내재하시고 전지하시며 주권자이시며 선이시다. 하나님은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개방 체계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체로 운행케 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하나님과 우주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고 의미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과 교통하실 수 있으며 또 교통하신다.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현재는 타락의 상태에 있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하실 필요가 있다. 인간에게 죽음이란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백성과의 생활에 이르는 문이거나, 혹은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된 생활에 이르는 문이다. 윤리는 초월적이고 하나님의 속성에 기초를 둔다.


유신론적 실존주의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우주와 하나님의 본질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및 우주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관련된 것이다.


1) 인간은 인격적 존재이며 완전한 의식을 갖게 되었을 때 소외된 우주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존재 여부는 이성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해결되는 난제다.

2) 인격적인 것은 가치 있다.

3) 지식은 주관적이다. 완전한 진리는 종종 역설적이다.

4) 사건의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불확실하고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현재화되고 생활화될 모델, 유형, 신화 등으로서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을 믿고자 하면서도 초자연적인 것이나 성경의 정확성에 대한 믿음을 그리 많이 요구하지 않는 신앙을 갈망하는 자에게는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바로 그 대안이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자연주의자가 인생에 대한 의미를 찾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면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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