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를 단순히 하나의 명제로 정의내리기는 쉽지 않은 작업이다. 실존주의로 분류할 수 있는 철학자들은 상당히 많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다 같은 생각을 하지 않으며, 정 반대의 전제와 결론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찾기도 한다. 또한 대부분의 실존주의자들은 체계적으로 구성된 논문의 진술보다 사상의 간접적인 표현을 좋아했다. 키에르케고르의 경우, 그는 자기가 죽은 뒤에 다른 교수들이 자신의 철학을 짜임새있는 글로 요약할 것이라는 생각에 분노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어려움들 때문에 실존주의를 하나의 명제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많은 현대의 저술가들은 실존주의가 생철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이러한 공통적인 견해를 좇아 본 레포트에서는 생철학에 대해서 잠시 언급한 뒤, 실존주의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실존주의는 다시 그것이 가지는 기본 전제에 따라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나뉜다. 본 레포트에서는 실존주의의 성격을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인 키에르케고르와 야스퍼스, 가브리엘 마르셀의 간략한 사상을 알아볼 것이다.
2. 생철학(Philosophy of life)
합리주의의 전통으로 이어진 19세기의 과학철학은 실증주의를 낳게 되었다. 콩트(Auguste Comte)를 위시하여 나타난 이 철학의 흐름은 칸트의 물자체와 현상의 구분 중, 경험 가능한 세계인 현상만을 인정하고 그 현상과 현상에서 인간의 경험으로 인해 확인될 수 있는 실증성의 두 개념만으로 자연의 법칙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러한 철학적 사조가 인간도 실증성에 의한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만 이해하려고 하자 이것을 대립하기 위해 일어난 철학이 바로 생철학이다. 이 생철학은 19세기부터 20세기초에 걸쳐서 일어났으며, 쇼펜하우어, 니체, 딜타이, 그리고 베르그송등이 생철학자로 분류된다. 생철학은 인간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 관심을 가진다. 이 우주 전체의 ‘삶’은 실증과학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로는 파악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은폐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생철학은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던 모든 가정들과 사상들(다윈의 생물학이나 프로이드의 심리학)을 반대한다. 이들은 ‘삶’을 그 자체로 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 방식으로 그들은 지속과 운동, 생성과 진화와 같은 새로운 사유의 틀을 만들어 냈고, ‘비합리적인 직관과 감정의 체험, 실천으로만’ 삶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철학의 목표는 신비주의적 명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들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삶’은 모든 철학적 인식, 인간의 활동들의 근원이며 이것과 연관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의 중심점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예술, 문화, 철학, 과학등과 같은 모든 학문이나 인간의 행동들을 그 자체로서는 부정하되, 인간의 ‘삶’과 연관시켜서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생철학은 ‘삶’의 개념을 명확하게 규정하기 위한 작업에는 실패한 것 같다. 인간의 개별자들은 각각 다른 형태와 경향들을 가지고 있다. 생철학은 이러한 개별자의 다름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 생철학은 전체적이고 일반적인 인간의 삶‘들’에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별적인 인간을 규정할 수 있는 절대성이나 진리와 같은 것들을 부정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생철학은 하나의 방법론적 모델을 제시한 것에 대한 업적은 있으나 결과론적으로 삶 그 자체에 대해서는 통찰하지 못했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생철학이 부정한 절대성을 다시 찾고 개별적 인간성을 파악하려는 시도로써 나오게 되었다.
3. 실존주의
생철학과 실존주의는 초점과 관심대상에서 차이를 보인다. 생철학은 삶을 전체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실존주의는 개별적인 인간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생철학은 생명의 역동성과 생명을 움직이게 하는 것에 대한 질문에서 학문을 시작하지만 실존주의는 인간의 실존 자체와 그 가능성에 주목하여 학문을 시작한다.
실존주의는 키에르케고르 이후 독일에서 하이데거와 야스퍼스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하나의 철학적 사조이다. 실존주의로 분류할 수 있는 철학자들은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가브리엘 마르셀, 사르트르등이 있다. 이 각각의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다른 관점과 다른 전제로서 바라본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실존과 실존하는 개인의 조건과 특성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실존이란 개념은 본질과 존재로 나누었던 이전의 구분에 기초한다. 본질은 칸트식으로 말하면 물자체이다. 현상을 있게끔 하는 원인이다. 반대로 존재는 본질에 의해 나타내어진 것이다. 칸트식으로 말한다면 물자체가 촉발한 현상이다. 여기서 실존은 지금 있음을 뜻하며, 현실적으로 눈 앞에 있는 것을 말한다. ‘어떠한 존재자의 실재성을 가지는 무엇’이 실존인 것이다. 이러한 실존의 개념은 실존주의의 주제에서는 인간에게 국한된다. 실존주의에서의 실존은 인간의 실존을 말하는 것이다.
4.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
a.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키에르케고르는 논리적이고 조직적인 체계를 싫어했다. 그것을 인간의 사유를 제한하는 부정적인 요소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아주 극단적인 반형식주의적인 사상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1813년에 코펜하겐에서 태어나서 1855년에 42세의 짧은 일기로 세상을 떠난 덴마크 철학자이다. 그는 코펜하겐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헤겔철학에 대한 반발에서 그의 철학을 시작했는데, 이는 베를린대학에서의 셸링의 헤겔 비판에서 영감을 얻은 듯 하다. 그는 헤겔이 실존을 간과했다고 생각했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실존한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개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헤겔의 철학에는 이러한 행위들이 전혀 내포되어 있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실존 속에서의 사유’는 인간이 개인적 선택에 직면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삶은 모든 것에 대한 선택이다. ‘10분만 더 자야지’, ‘학교 식당에 가서 밥을 먹어야지’등의 생각은 그것의 긍정 또는 부정의 결정을 낳고, 그것은 행동으로 옮겨진다. 이것은 다른 가능성에 대한 포기이기도 하다. 여기서 인간은 후회를 하게 될 수도 있으며 이것은 인간 개별자 각각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함을 의미한다. 헤겔은 인간을 개별적으로 보지 않았으며, 전체적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인간에게 인간의 실존에 대한 사유를 하는 것 보다 절대정신을 사유하는 것을 더 요구했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의 이러한 점을 비판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을 개인의 의식적인 참여라고 말한다. 마차에 타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마차에 ‘실려’가면서 잠을 자고 있고, 마부는 깨어서 방향을 조종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여기서 실존하는 것은 마부뿐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또한 관객과 배우라고 비유하면서, 관객과 배우는 존재할 수는 있지만 둘 다 실존하지는 않는다. 오직 배우만이 실존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합리적 사고방식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물론 그는 적절히 이용되는 수학이나 과학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들로 인간을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수학과 과학에 대한 앎, 그 외의 윤리학이나 형이상학에 대한 앎은 그 자체가 풀 수 있는 어떤 문제들을 풀 수는 있지만 인간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학, 과학, 윤리학등의 개별적 문제들 너머에는 인간 각자의 개별적 삶이 존재하기에, 이것과 연관지어서 생각해야만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주관적 요소를 인지하는 것이 인간에게 고유한 실존을 구성해 준다고 보았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적 사상을 그의 철학의 가장 하층에 깔아놓고 그의 입장을 밝힌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의 원죄론과, 하나님(예수)의 복음 모두를 인정한다. 그는 모든 인간은 죄를 범했기에 자연적으로 하나님과의 단절이 이루어졌으며, 하나님에게 자신을 관계시키는 행위를 가장 높은 차원의 실존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았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인지하는 단계를 세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첫 번째 단계는 미적인 단계로서, 이 단계의 인간은 그저 충동과 감정에 따라 행동한다. 두 번째 단계는 윤리적인 단계이다. 이 단계의 인간은 이성이 표현하는 행위의 규율을 인식하고 수용한다. 마지막 단계는 종교적인 단계이다. 이 단계의 인간은 신을 통한 자기실현을 이루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마지막 단계까지 이르게 되는 동기를 절망, 불안으로 본다.
b.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년에 태어난 야스퍼스는 심리학, 신학, 정치사상등을 포함하여 많은 분야에 글을 남긴 학자였다. 그는 하이델베르크대학과 스위스의 바젤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야스퍼스는 실존철학이란 말을 자신이 처음 사용했기에 실존주의의 창시자라고 주장한다(하지만 그 시기에 하이네만(Gustav Heinemann)도 실존이란 말을 사용했다). 야스퍼스는 인간의 삶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실재, 즉 실존에 대하여 탐구하고자 했다.
야스퍼스가 그의 실존철학에서 다루고자 하는 두 가지의 큰 주제는 사유자의 존재에 대한 자기인식과 사유자를 현실적으로 만드는 사유 방식의 구축이다. 야스퍼스는 인간의 상황을 다음의 세 가지 단계로 나눈다; 대상에 대한 지식만을 가지는 단계, 인간이 자신의 내부에서 실존의 기초를 발견하는 단계, 인간이 자신의 순수한 자아를 향하려는 노력을 가지게 되는 단계. 그러나 인간은 마지막 단계에서 인간 자신의 유한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을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이라 말한다. 이를테면 죽음, 고통, 죄책감과 같은 것이다. 이 때, 야스퍼스는 인간이 초월자를 직면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순수한 경험이며, 묘사나 증명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경험은 인간의 실존을 완전케 한다. 이에 대해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을 경험하는 것과 실존하는 것은 동일하다”고 말했다.
야스퍼스 또한 심리학과 사회학, 인류학등의 과학이 인간을 대상으로만 간주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자아, 객체로서의 인간, 주체로서의 인간 모두가 인간 실존이다. 야스퍼스는 이런 과학들이 인간을 인간 실존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객체로만 탐구한다고 비판하면서 과학들은 인간에 대한 지식을 축적시킬 수는 있지만, 이것들은 인간성을 위한 어떠한 결과도 보증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c.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마르셀은 1889년에 파리에서 태어났다. 사실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는 학자보다 작가, 편집가, 비평가, 강연 연사의 일을 하며 보낸 시간이 더 많다. 그는 원래 종교를 가지지 않은 채로 학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1차 대전 때 적십자에서 봉사하게 되었는데, 많은 부상자와 전사자들의 가족과 대면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이러한 만남들 속에서 그는 인간 객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학업을 계속하던 마르셀은 친구와의 우정에 의해 종교를 가지게 되고, 그의 실존철학은 기독교라는 틀 위에서 시작한다.
마르셀은 문제와 비의(mystery)를 구별한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주변 환경들이 가지고 오는 문제들은 그것을 탐구하면 이내 알 수 있다. 하나의 문제는 대상(object)이나 대상 간의 주변 관계에서 통상적으로 해결된다. 그러나 ‘나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하나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나의 존재는 주체와 객체(object)로 나눠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존재에 대한 주체성과 객체성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아까 언급한 문제는 ‘대상(object)’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주체(subject)는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이러한 실존에 관한 의문은 비의, 즉 미스터리에 속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의문을 탐구로는 풀 길이 없다. 마르셀은 인간 실존에 대한 물음의 해답을 타자(정확하게는 하나님)와의 관계성에서 찾는다. 마르셀은 니체의 ‘인간이란 약속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라는 말에 착안했다. 그는 ‘약속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따로 떨어져 있는 객체와 객체간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타자에 대한 주관의 개입인 것이다. 마르셀은 이러한 주관의 개입, 즉 친교를 하기 위해서는 성실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성실성은 우정과 사랑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타자의 객체성을 극복하는 힘을 가지며 새로운 수준의 친교를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성실성의 표현 속에서 인간은 하나의 책임 있고 확실한 연속성을 지니게 된다.
마르셀은 이러한 전제 아래에서 성실성을 신앙과 연결시킨다. 성실성 안에는 ‘무조건성’이 내포되어있다. 내가 타인에 대해 성실함을 보이는 행위는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 서약과 절대적 위임과도 같다. 하지만 이는 일반적인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얻어질 수 없다. 인간은 한계가 있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완전한 성실성이란 결국 신과의 관계에서만 얻어질 수 있다. 또한 성실성 안에는 영원성도 포함되어 있다. 성실을 약속했던 타인의 죽음은 성실성의 상실을 초래한다. 그렇기에 성실성 안의 영원성 또한 신과의 관계에서만 얻어질 수 있다. 결국, 완전한 인간 실존은 신과의 성실성 아래에서 그 비의를 해소할 수 있게 된다.
5. 나가는 말
실존주의는 인간이 인간 자신을 알고자 해서 탄생한 학문이다. 이것은 학자 자신이 자신의 인생에 던지는 물음이기도 한 것 같다. 여담이지만 야스퍼스의 기록을 보면, 그는 인간관계를 맺는 것에 상당히 취약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기에 그는 더 자신에 대해 탐구하고 싶었을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은 비단 이들 철학자만의 질문은 아닌듯 싶다. 모두가 자신에 대해 한계를 느끼며, 실망하고 고통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실존주의는(특히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이러한 고통에 해답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으로,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으로, 마르셀은 완벽하지 못한 성실성으로 인간 실존의 한계를 설정한다. 그리고 이들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의 회귀를 요구한다. 물론 이들은 모두 기독교의 그늘 아래에 있다. 하지만 체계적인 사유를 하는 철학자들이 이러한 결론으로 자신의 사유를 장식했던 것을 보면, 기독교가 다른 무신론자들이 비판하고 비난하듯이 그저 일반적인 종교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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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이녹 스텀프, 제임스 피저 공저, 이광래 역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서울: 열린책들, 2004
서배식, 『실존철학들의 같은 점과 다른 점』, 서울: 문음사, 1999
이규호, 『현대철학』,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5
강갑회, 「야스퍼스에 있어서 한계상황을 통한 실존개명」, 『철학논총』 제29집, 새한철학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