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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추억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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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Feb 07. 2021

땅끝마을에서 불어오는 바람

전라남도 해남, 할머니의 고향에서 축하파티를 그리고 1004대교

기행문이라고 쓰고 '추억일기'라고 부른다. 최근들어서 기행문을 쓰는 것을 좀처럼 재미있게 여기지 못했는데, 어머니께 글을 보여드리니 여간 재미있다고 계속 써보라고 하신다. 그래서 추억이 될만한 것들은 모두 써야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기억을 더듬는다. 코로나로 힘들 것 같아서 할머니 생신과 설을 미리 맞이하려 조금 일찍 전라도 해남을 다녀왔다.


전라도 해남 우리집 앞 풍경, 나는 여기서 태어났다


1. 땅끝마을에서 90년을 보내며, 할머니 생신


할머니께서 90세 생신을 맞이하셨다. 거리두기 수칙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친척들은 부르지 않은체로, 우리는 아침 6시에 방화동을 떠나서 땅끝마을로 향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설과 추석을 그냥 지나쳐오면서 시골에 계신 할머니는 서운함과 그리움이 가득하신 것 같았다. 할머니의 90세 생신을 축하드리기 위해서 어머니는 일주일전부터 할머니께서 좋아하시는 반찬을 준비하시느라 여념이 없었다. 1년간 투명생활을 하시느라 해남에 내려올 수 없어서 미안해하신 어머니는 할 수 있는한 최선을 다해서 준비를 하셨다.


한 가득 두손에 짐을 싣고, 서해안 고속도로를 슝슝달리면서 부모님과 오랜만에 다양한 대화를 시도했다. 물론 두분은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피곤하신 나머지 잠이 드셨지만, 나는 그래도 오랜만에 아들노릇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내려가는 내내 미스터트롯 경연곡과 미스트롯2의 트렌드를 모두 익힐 수 있었다. 트로트 왕국이 되어 버린 부모님들의 세계를 다시 한번 조우하면서 평택항을 지나 군산으로, 군산을 지나 목포로, 목포를 지나 해남에 다다랐다.


이름하여 '관자놀이' 를 시현중이다. 할머니 생신을 위해서 손자가 부침개를 만드는 중.


도착하자 마자 할머니를 모시고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오리고기 맛집으로 향했다. 두륜상 케이블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대흥사에 도착하기 바로 전에 있는 '태양정'은 코로나로 줄어든 손님들에 걱정이 폭포 같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음식을 준비해주셨다. 사실 해남에는 한 5년전부터 닭코스 요리가 유행이다보니 닭갈비, 닭 육회 닭한마리, 닭발, 내장무침 등등 풍성하게 나오는데, 오리고기는 조금은 비싼 관계로 딱 메인코스 3개인가 나왔다. 오리훈제, 오리주물럭, 오리약찐밤이 그것이다. 아래 사진들과 같이 남도의 의식은 밑반찬부터 역시 달랐다. 그것도 최남단의 맛집에서 내 놓는 오리고기란 기름이 적당히 베어 있어서 식감을 돋았다.


전라도 해남 두륜산을 찾아가는 길에 '태양정'이라고 쳐보면 오리코스 요리가 있답니다.


할머니는 이제 90세를 넘으셔서 그런지 마음에 수심이 가득하셨다. 이빨도 안 좋으셔서 씹기도 힘드시다고 했다. 금방 분위기는 좋았다가 우울했다가, 가족의 역사 중에서 안 좋았던 기억들을 꺼내 놓는가 하면, 그것을 만회하려는 철 없는 손자의 재치있는 농담이 통하지 않아도 멋적게 웃어 넘기는 그런 상황이었다.


땅끝마을에서 거의 100년을 보내신 할머니는 어떤 감정이실까? 누군가는 등산으로 유명한 두륜산자락에서 화질좋은 카메라로 강진들녘을 찍기 바쁘겠지만, 하루하루 매일 똑같은 일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하시는 할머니는 어떤 생각이실까? 죽음과 생명의 사이에서 인간의 일생은 4계절처럼 피었다가 지었다가 한다. 그 사이에 화가 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론 소멸의 아픔을 경험하기도 한다. 왜 부적 인생의 깊이와 무게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걸까? 할머니는 이 땅끝마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이젠 무섭다고 하셨다. 생명이 완연한 나이에 바람은 차가워도 시원한 것 같고, 뜨거워서 훈훈한 것 같지만, 점점 생명이 빠져나간 육체의 여러곳에서는 시리운 바람이 이제는 그만 멈추어주었으면 좋겠다고 느끼시나보다.


아무리 맛난 음식도 의미를 잃고, 아무리 좋은 경치도 재미를 잃어 버리는 사이에 나는 40년전 꼬마였던 손자가 아니라 이제는 장성해서 무엇인가를 거뜬하게 해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바람이 덜 들어 오게, 따뜻한 바람이든, 시리운 바람이든 방안으로는 덜 들어오게 보살펴 드려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정성스레 차림 밥상으로 할머니의 생신을 축하했고, 나는 되지도 않는 MC병이 도져서 할머니의 생신을 버라이어티 쇼처럼 소개하면서 억지웃음이라도 자아냈다. 그래도 이렇게 가식이 아니라 행복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하시는 나이들이시라서 나를 벗어나서 때론 이렇게 광대같은 모습도 내 안에 나온다.






2. 아버지의 손하트가 멋적었다


어머니는 이미 장만을 마치고 조금 쉬고 계셨고, 아버지와 할머니가 드실 약수를 떠놓고 오다가 너무 코로나로 집에만 있었기에 등산을 하자고 했다. 물론, 등산이라고 할 것도 없는게 산정상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가면 되니깐 너무 쉬운일이여서 애매하기는 하다. 코로나로 운행을 안할 것 같았는데, 다행히 시간을 단축해서 케이블카를 운행하고 있었다. 현재 충주호에 만들어진 케이블카가 국내 최고 긴 케이블카이지만 그전에는 해남 두륜산의 케이블카가 1.6킬로미터로 가장 최장이었다. 타는 시간도 장장 8분이다. 할머니댁에서는 이 케이블카가 보여서 마당으로 나오면 '아 저기 한번 가봐야지~'이렇게 해서 1년이 2번정도는 꼭 오는 코스가 되었다.



케이블카 올라가는 길에 보이는 풍경


산정상에 오르면 항상 무엇가 형용할 수 없는 경외감과 황홀감이 든다. 해남 저쪽으로 땅끝이 보이고, 더 넘어서는 제주도가 보인다. 반대쪽에는 영암과 강진의 경계에서 염전과 너른 들판이 보인다. 옆으로는 해남시내가 보이고 그 반대쪽으로는 완도바닷가가 어스름하게 보인다. 남도의 산들을 참 다양한 경관으로 한껏 자신들의 멋을 뽐내 보이는 것 같다.


최근 인생의 우여곡절을 넘으신 아버지가 늙어가는 뒷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멀고 먼 땅끝에서 변변한 학력이나 경력, 인맥이나 재산없이 자란 아버지가 차디찬 서울바닥에서 살아남기에는 너무 힘들었을 거란 생각을 한다. 고등학교만 나왔어도 달라졌을 것 같지만,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 나는 20년은 더 나이가 먹었어야 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국제개발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발달은 그 사람이 영향력을 미칠 모든 곳과 연결되어 있으니깐 말이다.


아버지의 손하트가 요즘은 다르게 보인다. 마친 '나를 사랑해주세요'라고 하는 것만 같다. 인생의 한철이 저물어가는 시기에 저녁놀과 같이 쇠락을 받아들여야 하는 나이에. 아무도 사랑해줄 이 없는 이들이 생각난다. 사랑하는 마음은 사람이 늙어간다고 줄어드는게 아닐테니깐 다행이란 생각도 해 본다. 아버지를 조금 더 이해하고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누구나 그렇듯 잘 되지 않는다. 살아오면서 여러가지 신뢰의 바닥이 깨지고 믿었던 부분이 어긋나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부분이 많으니깐. 그럼에도 무엇인가를 함께 한다는 것은 또 새로운 지점을 만들어내는 것 같긴 하다.


오래전에 장만해드린 점퍼를 애지중지 하시더니, 최근에 모자를 하나 운동할때 쓰라고 드렸는데 애지중지 하신다. 이런.
두륜산 케이블카를 내리면 보이는 두륜상 힐링로드' 멋지다
아버지 뒤로 보이는 땅끝마을과 제주도까지 다을 듯한 풍경, 오른쪽으로는 케이블카가 멈춰선 정상이다.
두륜산 정상 고계봉 꼭대기. 비행기는 북쪽을 가리키고 있다.
두륜산의 또다른 정상 고계봉, 원래는 '두륜봉'이 정상이다.
멀리 보이는 강진



3. 천사대교가 천사대교 했다


어머니가 평소 가보고 싶으신 곳, 1004대교를 향했다. 천사대교는 전라남도 신안의 1004개의 섬을 상징으로 해서 압해도와 아매도를 연결하는 약 7.22 km의 대교이다.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길다고 하니 과연 지나가는데 끝이 안보이는 느끼도 들었다.




사실 어머니가 가보고 싶어하시는 제일 큰 이유는 광주 작은외숙모가 천사대교 앞에서 찍은 사진 때문이다. "너네 외숙모가 찍은 사진 보니깐 좋아 보이더라~"라고 하신 것을 기억해내서 이번에는 천사대교에 들렀다. 가는 내내 여러 섬들을 거쳐야 했는데, 꼭 자주 가는 강화도 같은 느낌이었다. 섬의 거의 비슷비슷한 생활양식을 가질 수 밖에 없나보다. 어머니는 천사대교 자체를 보는 것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사진을 찍거나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그리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아들의 역할 중에 하나는 부모님의 기억을 추억으로 남겨드리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다양한 사진들을 찍으면서 부모님께 포즈를 요구했다.



멀리 보이는 천사대교, 끝이 안 보일 정도다
이곳이 바로 천사대교의 상징물인 날개로 지나가는 길, 동백꽃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어머니는 기분파다. 몸이 아프시기 전까지는 술만 드시면 구성진 노랫가락에 흥을 돋구시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러시지는 않는다. 다만 무엇인가를 맛난 거 드시고 싶다고 자주 하신다. 아무래도 입맛이 없으신가보다. 찾아보니 천사대교 근교에 낙지전문점들이 아주 즐비했다. 그런데 문제는 '경치'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 그래서 이럴 때 써먹으로가 배웠나보다 할 정도로 빠른 검색력으로 좋은 경치와 맛집을 살펴본 결과 천사대교 건너기 전에 천사대교가 다 보이는 아주 멋진 횟집을 찾았다. 물론 코로나로 방역지침을 지켜야 했기에 우리 3명만 앉을 수 있는 곳에서 한상차림을 시켰다. 역시나 전라도라서 그런지 반찬도 아주 걸고, 회도 아주 싱싱했다. 아버지는 여러곳을 다녀왔지만 천사대교를 보면서 먹는 이 느낌은 여기가 최고라고 했다.


갓 잡은 싱싱한 굴 무침~캬~
시작에 불과했다~ 나오고나오고 계속 나왔다
아 너무 싱싱하고 쫄깃했다. 역시 산지에서 먹어야 하나보다

        



3일은 밥을 안 먹어도 괜찮을 정도도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천사대교를 건넜다. 2개의 다른 공법으로 지어진 천사대교는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도착하는데까지 10km정도는 걸리는 거리였다. 섬도 1004개였는데 다양한 의미로 1004의 의미가 활용되었다.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막히지 않아서 5시간만에 서울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부모님은 물론 노환으로 몸살이 나셨지만 그래도 할머니를 챙겨드릴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셨다. 




남도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이 누군가에게는 낭만적인 바람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서럽고 시린 바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내가 느끼는 모든 것들이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환경과 조건, 상황과 감각에서는 그렇지만 다른 곳에 서 있는 다른 조건의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즐거운 손자 페르소나를 이제 다시 접고 점잖은 학자스타일이나 진지한 국제개발을 하는 모드로 들어가야 겠다. 


앞으로 몇 번을 더 해남에 가야할 지 모르겟지만, 갈 때마다 추억을 쌓고 와야겠다.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페르소나를 끌어내서 가족들도 즐겁고 나도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야 겠다. 이런 꼭, 그러니깐 가족과 관계된 것은 꼭 '감정'이 아니라 '의지'여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행복하자고 의지적 결단을 내리는 순간 내가 부모님과 할머니 그리고 친척들에게 하는 태도가 달라지니 말이다. 나 자체로, 따뜻한 바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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