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예술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Feb 07. 2021

사철나무 아래 쉴 때는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뭇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을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 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선 되게 낮잠을 자 버린 사람들이 나지막이 노래 불려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_장정일 / 시인, 소설가




휴일저녁 세월아 내월아 흐르던 시간을 잠시 부여잡고 한주동안의 의미들을 되새기는 사이, "배달의 민족 주문!"이 울리지 않나, 로켓배송으로 바쁜 택배기사님의 발걸음이 분주하게 들린다. 나는 항상 이게 문제다. 쉴려고만 하면 쉬지 못하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리고 아픈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피부로 빠르게 다가온다. 어릴때는 너무 정이 많다는 투로 사람들에게 핀잔을 받았는가 하면, 시간이 지나서는 '연민'이 많고 '생각이 많아서'라는 오명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시간의 의미를 자신이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시간이 자신을 만들어 가도록 놓아 두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처한 환경에 시간이 만들어 놓은 의미들이 다른 사람도 그런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은 그냥 놓아두면 우리 머리의 새치가 희끗하든이 빠르게 지나가고 조금 손을 잡고 넉넉히 대화를 해보면 아주 천천히 흐르다가 결국 멈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을 멈출 수 없는 사람들, 그럴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체 시간은 초속으로 움직이고, 가속도를 높이는 사이에 나와 우리, 공동체와 사회에 대한 의미도 퇴색되어 간다.


문학이 할 수 있는 일과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은 한마디로 충동하게 하기, 시작하게 하기, 다시 마음먹게 하기이다. 그리고 사람은 무엇인가 언어로, 감정으로,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들에 의해서 시작하려는 의지를 불태운다. 물론 세계를 의지의 표상으로 바라보기 전까지 세계 안에서 삼라만상처럼 춤추는 감정과 정서의 틈바구니에서 슬픔을 느끼거나 생명을 느끼거나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거기까지다.


결국은 사철나무 아래에서 같이 쉴려면 함께 그리는 세상을 실현할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하다. 생각해보니 나에게 핀잔을 주었던 많은 사람들은 그 과정을 만들 수 없는 위치이거나 만들어보지 못했거나, 만들 생각이 없었던 사람들 같다. 머라고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에서는 '자신도 안하고 남도 못하게 하는' 수 많은 핀잔들이, 불만들이, 비판들이 넘쳐나는 것 같다. 일단은 무엇이라도 해보고 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걸 할려면 준비를 할테니 그것들이 모여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지 않을까?


불현듯, 변해가는 사회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운동과 정책과 비지니스가 진행될 때 만들어지는 시대착오적인 흐름에 대해서 누가 책임질까 생각이 든다. 바뀌어가는 현실과 호흡하면서 새로운 방식과 질서, 과정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한숨만 짓고, 안된다고 하기에는 너무 변명 같으니깐 말이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해보자. 이런 생각으로 바뀐 것은 나는 너무 진보적인가? 아닐 것이다. 아니 이게 당연할 것이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서 함께 모여서 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적으로 실현되도록 하기 위한 정책과 정치적 단계들을 생각해본다. 이렇게 있다가는 양화가 악화를 구축하게 생겼다. 허물은 집을 집고 아무도 이 허물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하고 파헤치고 대안을 제시하고 해보고, 안되면 또 대안을 찾고 수정하고 수확해야 한다. 이웃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정도에서만 그치면 안된다. 어쨌든 이 부조리를, 진부한 감정을 끝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준비해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팬텀싱어 올스타전_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