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오랫동안 종말론을 '마지막 일들에 관한 가르침'이나 '마지막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일컬어 왔다. 사람들은 언젠가 시간이 끝장 날 때에 세계와 역사, 인간에게 별안간 들이닥칠 사건들을 마지막일로 생각하였다. 우주적 영광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재림, 세계 심판과 하나님나라의 완성, 죽은 자들의 보편적인 부활과 만물의 새 창조가 바로 이런 일에 속하였다.
이런 사건들은 역사의 피안으로부터 차안으로 돌입하여, 나물이 자극을 받고 활동하던 이 역사를 끝장 내리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사건들을 '최후의 날'로 미루어 버림으로써, 이 사건들은 종말이 오기 전에, 역사 안에서 우리가 영위하였던 모든 날을 위한 그 교훈적, 고무적, 비판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종말론은 그리스도교 교의학의 끝자락에서 쓸쓸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종말론은 중요하지 않은 위경 정도로 쪼그라든, 너절한 부록과 같았다. 종말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높이 들림과 통치와는 아무런 상관어 없었으며, 이런 주제들의 논리적인 겨로가로서 생겨나지도 않았다.
죽은 자들을 위로하는 주일의 설교가 부활절의 설교와 동떨어져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종말론도 그런 주제들과 사뭇 동떨어져 있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가 종교를 계승하는 조직이 되어 그 주장들을 완강하게 대변하면 할수록, 종말론과 또 지금 우리가 살아야 할 역사를 위한 그 역동적, 혁명적, 비판적인 영향력은 점차로 열광주의적 종파들과 혁명적 집단들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이 자신을 지탱하는 미래의 희망을 자신의 생활로부터 분리하고 미래를 피안이나 영원으로 옮겨 버리자, 희망은 교회를 떠나가 버렸으며, 매우 일그러진 모습을 디고 되돌아왔다. 그리고 되돌아올 때마다 그것은 항상 교회를 대적하곤 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적 신앙이 전해준 성서의 증언들은 갈피마다 메시아적 미래의 희망으로 가득하다.
희망의 신학 서문_위르겐 몰트만
절망을 권하는 사회에서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이신론자가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사에 관여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책을 읽을 필요가 없어진다. 성경책은 단순한 하나의 역사책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 당연히 지금 먹고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온다. 따라서 지나치게 맛있는 것에 집착하거나, 크리스천인임에도 불구하고 희년정신이 없이 부동산에 열을 올리거나, 주식이나 갭투자로 희망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그 자체로 사람은 희망의 존재라는 것을 증명한다. 희망이 들어설 자리에 희망이 없어져 버리니까 외부에서 오는 희망으로 그것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대부분의 설교는 그래서 이러한 움직임을 막느라, 장려하느라, 이신론을 해석하느라, 혹은 용인하느라 바쁘다. 마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기 전 제자들이 모여서 '이제 어떻게 살지?'라는 궁리를 하는 시간과 같이.
산업혁명의 가장 큰 발명품은 '시계'였다. 동일하지 않은 시간을 동일한 시간으로 만들어 놓은 세속적인 시간개념에서는 인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부유하는 존재가 되었다. 미래를 바라볼 때 과거로부터 있었던 일들이 축적되어서 현재를 만들어 왔다고만 생각하다 보니 역사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였다. 간혹 천재들이 등장하면 '거인의 어깨에 우리도 올라타 보자'하면서 천재들에 기대여 세계의 발전과 기술의 편리함에 도취되었다. 교회는 때론 저항으로, 때론 무시로, 때론 동일화된 모습으로 대응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의 아이들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희망'의 출처가 엘리트가 만들어 놓은 기술이나 문명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희망'은 어디서 올까? 진실로 희망은 어디서 올까? 시간을 '현재'로 묶어 놓고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고민하다 보면 '하나의 직선'처럼 시간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 시간 안에서 희망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무엇을 하면 희망이 생길까? 어떤 것을 소유하면? 누구와 같이 살면? 어떤 나라에서 거주하면서 청춘을 즐기면?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현재'가 주는 희망이 조금씩 탈락하고 미래의 '죽음'이 주는 절망 때문에 절망을 권하는 자리에 앉게 된다.
신앙이라는 것은 효능감과 같아서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이다라는 신념을 '말씀'에 따라서 믿기 때문에 믿음이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미래에 어떻게 될 꺼야 라는 증거를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부와 자선, 관계'에서 찾는다면 그 희망은 '현재'가 끝나는 종말의 시점에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사라져 버린 뒷모습들을 보고 느끼는 것은 '그러니깐 더 즐겨야지,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말야~!'가 된다.
그럼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되는게 '세상은 어차피 기울어져 있고,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불공평하며, 한번 로또처럼 신체나 국가가 결정되면 바꿀 수 없고, 세상은 닫혀 있고 운명은 정해져 있다'라는 생각이다. 가장 밑바닥에 하나님이 없어지면서 결국 '희망'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외부로 부터 아무것도 새로울 것이 없는 세계에서 '절망을 권하는 사회'는 당연한 결과가 된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하나님은 말씀이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의 내면을 창조하신다.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우고,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누군가를 도울려고 하는 마음'에서 희망을 일구어 내신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성령으로 호흡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듯이, 지금도 말씀으로 우리와 호흡하면서 세상을 하나하나 바꾸어 가고 있다.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세상은 임산부와 같이 고통 속에 있지만, 세상의 빈곤과 악덕과 무지와 냉정함을 해결해 가는 우리의 손가락 마디마디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의 고통을 왜 왜면하는가?라는 질문은 사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뿐만 아니라, 부활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과 같다. 부활이라는 마지막의 완전한 회복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과정 어디쯤에서 지금 서 있는 것이리라. 믿음의 영역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믿음의 영역이다. 돈을 모으면 10년후에 부자가 된다던지, 열심히 하면 보답을 받는다던지, 태양이 뜨면 오늘 날씨가 맑겠다던지 하는 것은 모두 믿음이다. 다만 그 믿음은 인격적인 존재와 연결된 믿음보다는 자연과 연결된 믿음이거나 자신의 경험과 연결된 믿음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다는 것은 절망을 권하는 사회가 뿌려놓은 가시덩굴 사이로 비껴나서 오솔길을 걷는 것과 같다. 한발짝 한발짝 오솔길을 걸어가면서 우리는 자연스러운 희망을 우리 마음 속에서 발견한다. 지나친 욕망과 다른 사람의 욕구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순간 '절망'을 강조하는 세상에서 절망적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질투가 나고 희망이 꺾이게 된다. 이 시스템은 '욕망하지 않기로 결정'하면 멈추는 시스템이다. 이것이 켜져 있는 순간마다 '절망'은 계속 불이 들어와 았게 된다.
세상에 끝이 있고, 그 끝 이후에는 다시 부활이 있다. 우리는 부활의 어떤 모습이든 다시 태어날 것이다. 또한 오늘 아침에 눈을 뜨면서 부활했다. 새로운 호흡이 나의 폐를 거쳐 가면서 세포들과 장기들에게 부활을 허락한다. 이 세상이 끝나고도 다시 시작될 것이며, 우리의 절망 속에서도 다시 희망을 피어 오를 수 있다. '부활을 살라'라는 말은 '희망을 권하는 사회'를 말한다.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조그마한 사건에도 하나님이 일하시고 보고 계신다. 우리에게 우연이란 없다. 다만, 인간의 악과 욕망이 시스템과 관습, 문화와 관계 속에 가시덩쿨처럼 도사리고 있다.
희망을 권하는 사회를 만들자. 함께 팔을 걷어 붙이고, 문제가 일어나는 곳, 삶이 무너져 버린 곳, 누군가가 주저 앉은 곳, 강도당한 이웃에게 다가가자.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설사 끝난다 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일어나자. 함께 희망을 권하는 사회를 만들자. 부활이 오늘 내 삶에 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