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처음 다닌지도 벌써 25년이 지났다. 그 때 당시에는 장로교 합동측이 총신대, 통합측이 장신대인지도 몰랐고, 친구들과 구원론에 대한 싸움들을 하고 나서도 그 친구가 감리교도인지 몰랐다. 천국과 하나님나라의 애매한 관계에서 건축헌금을 드리면 천국에서 내가 살 집이 당시 타워펠리스보다 좋아지게 된다는 부흥사의 말을 듣고 쌈짓돈 꺼내서 헌금을 냈던 기억이 있다. 불교도였던 부모님께 들었던 윤회사상이 깨어지는데는 '보수적인 기독교'가 좋았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데 있어서 나의 자유와 한국 보수 교회의 전통들은 어딘가 모르게 어긋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담임 목사님이 교회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말 그대로 TV프로그램처럼 드라마가 펼쳐졌다. 장로님들이 목사님을 끌어내리고, 장로님의 아들과 딸들은 자신의 부모님을 옹호하고 결국은 담임목사님이 가족들을 데리고 반경 10km이상 떨어져 나가야 했다. 듣고 보니 결국 교단의 문제도 있고 노회의 문제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성경과는 맞지 않았다. 노회에서 나온 어떤 분은 청년들에게 쌍욕을 하면서 정신차리라고 했지만, 도무지 '이게 그럴 일인가?'했을 정도로 불쾌감이 들었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이단성'이 있다는 나의 신학?을 빙자하여 성경공부도 못하게 했고, 다른 친구들과 만나지도 못하게 했다. 그 이단성이라는 것이 '방언'을 한다거나 혹은 너무 열정이 많다는 것이었다.
성경! 성경에 있는 내용대로 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성경에서 지켜야할 것과 지키지 않아도 될 것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종'의 관계로만, '구원자'로만 정해놓아서 자유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태도를 계속해서 가르치고 있었다. 그것을 더 가르치려고 수련회를 가고 말이다. 목회자의 권위가 높아질 수록 상대적으로 성경의 권위는 낮아졌으며, 전통이 깊어질 수록 새로움은 신천지와 함께 이단성을 평가받아야 했다.
뚜렷하게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다양하게 깊고 많다. 그런데 결국은 자신의 신앙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비판을 딛고 믿음을 신앙으로, 신앙을 신학으로 확장해나가는 것이 삶이 아닌가 한다. 천국의 개념, 구원의 의미, 역사의 방향과 목적, 하나님의 특징과 그것을 넘어서는 정의할 수 없는 자유로움 등등. 참으로 고민해야 할게 많고 물어봐야 할 것들이 많다. 그 중에 몇가지만 오늘은 생각해보자.
1. 두려움이 없는 조직 : 그 어떤 이야기를 제시해도 보복당하거나 벌을 받거나 왕따 당하지 않는 조직
두려움이 없는 조직이 요즘에 화두다. 사람들이 머물고 싶어하는 조직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면서도 비난당하지 않는 조직이라고 한다. 하버드의 연구팀은 25년간 두려움이 없는 조직에 대해서 조사했다. 그리고 몇가지를 알아 냈는데 그것은 바로 실패에 대한 문화이다. 처음에는 어느정도 두려움이 있고 긴장감이 있는 조직이 실수가 적고, 두려움이 없는 편안한 분위기의 조직은 실수가 많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두려움이 없는 조직은 자신들이 자연스럽게 행하는 실수에 대한 피드백으로 그 실수를 고치고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지만, 두려움이 가득한 조직은 점점 실수를 축적하고 감춤으로써 한 순간에 무너지게 된다.
교회는 정죄의 문화이다. 항상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게 만든다. 강대상에 올라가는 것,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 대학입시에 실패한 것, 취업에 실패한 것, 이혼하게 된 것, 결혼을 못하게 되는 것 등등 수 많은 실패와 좌절, 실수들이 두려움으로 작용한다. 하나님의 축복은 '성공과 번영'인데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축복을 선택적으로 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두려움이 가득한 조직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율법을, 말씀을, 전통을 통제의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 때문에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숨기고, 의인인척 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게 된다.
두려움 없는 조직에서 연구한 내용
그렇다면 두려움이 없는 공동체란 어떤 '심리적 안정감'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교회는 우리에게 어떤 안정감을 주는 것일까?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
예수님이 그 자체로 '화평'이셨다. 그가 오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하며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자기 자신, 인간과 다른 사람, 인간과 피조물을 화해케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세사람이 모인 중에는 '내가 그 가운데 있다'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있는 공동체, 그가 피로 사신 공동체서는 두려움이 아니라 화평이며, 절망이 아니라 사랑이 있어야 했다. 사랑으로 지어진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내려 놓고, 서로를 위로하고 감싸며 구불구불하지만 함께 직선의 길을 걸어가게 되어있었다.
2. 월터스토프의 '사랑과 정의' : 사랑과 정의는 원래 하나였다
사랑이 흘러넘치는 곳은 당연히 용서가 흘러넘치는 곳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고민을 해봐야 한다. 특히 자유가 증대되어서 서로 경합하는 이 시대에서 두려움이 없는 곳이라고 해서 자연스럽게 사랑이 흘러넘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때까지'를 쓴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최근 '사랑과 정의'라는 책에서 사랑과 용서, 정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 놓았다.
보통 진부하게 이야기하는 '모든 것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표현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죄를 덮는 과정에서 죄를 '덮는다'라는 행위에 대한 우월성을 가지게 된 사람은 '사랑' 그 자체로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면죄부를 스스로 갖게 된다는 것이다. '너희가 용서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라는 말을 중간과정 없이 건너 뛰어 버린 결과였다. 내가 사랑을 베푸는 주체가 되고, 죄를 덮음 받은 사람은 영원히 죄인으로 남고, '용서'라는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이 종교적인 종속관계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다시 병이 재발되는 것처럼 사랑으로 덮어던 이불을 걷어 치우고 다시 주인과 종의 관계를 확인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사랑으로 죄를 덮자'라는 것은 하나의 '주의'라고 말한다. 그것은 고전적 아가페주의인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덮어 버리고 더이상은 생각하지 말자라는 주의이다. 네델란드의 니그렌과 같은 학자들이 주장한 것인데 어쨌든 성경해석의 하나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러한 주장의 핵심은 '정의가 사랑과 양립할 수 없다'이다. 사랑을 선택하면 정의롭게 심판할 수 없고, 정의를 선택하면 사랑을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정의를 밀어두는 수 밖에 없었다. 수 많은 한국교회에서 그렇게 많은 범죄가 일어나지만 교인들이 쉬쉬하는 것은 아마도 이것 때문일 것이다.
'사랑과 정의'에서는 간단한 논리로 사랑과 정의를 연결한다. 생각해보면 누군가를 용서한다고 할 때, 용서의 이유가 있고 잘못한 것에 대한 판단이 먼저 서게 된다. 용서하는 자신의 마음의 문제 이전에 용서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원인 말이다. 그러니 무엇인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사과를 하고 용서를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한 행동이 '잘못되었다'라는 기준이 있어야 하고, 그 기준을 어긋낫기 때문에 용서의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잘못이 아니라면 굳이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으니까 말이다.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의가 필요하다. 심판의 기준인 정의가 있어야만 용서를 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용서를 하는 과정이 사랑이 실행되는 길이다. 그렇다면 사랑이전에 이미 용서가, 용서 이전에 먼저 정의가 실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구약에서의 정의가 확실해 질 때 비로소 신약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완전해지는 것이다. 진정 예수님의 방법을 실현하려고 하면 우리는 정의로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나 자신과 교회, 세상과 다른 이웃들을 들춰보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결국은 '용서'라는 것이 누구에게도 속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것이 된다. 사랑은 정의가 선행되었을 때에만 완전해진다.
그렇지만 또한 문제가 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그게 바로 되나? 내가 바로 용서할 수 있나? 용서한다고 달라지나?
3. 미로슬라브 볼프 '배제와 포용'
미로슬라브볼프는 어려운 책을 쓰기로 유명하다. 유명한 책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배제와 포용'은 가장 유명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6개월정도 읽으면 볼프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수도 있다. 배제와 포용에서 볼프는 '진리와 사실'에 대해서 구분한다. 진리는 배제하지만 사실은 포용할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문제가 많고, 삶이 힘들다는 사실은 포용할수 있지만 하나님이 온전히 하나님이라는 사실 자체는 이미 배타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배탄적일 수 밖에 없지만, 그 배타적인 말씀이 우리의 삶을 포용한다는 것이 볼프의 논리이다. 다시 말하면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은 배타적이라서 다른 것과 양립할 수 없지만, 이 말씀이 우리 삶 전체를 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존재들을 포용하고, 다른 이웃들을 끌어 안으며 하나님이 결국 우리를 이해하시고 용서하시는 것은 그분의 말씀의 완전함을 드러낸다.
볼프는 삼각형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도달했다가 현실로 오라는 것이다. 삼각형에서 에서는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사귐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배타적인 정의와 사랑을 이해하고 경험하며 그 관계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이것을 볼프는 '거리두기'라고 말했다. 바로 세상으로 달려가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세상과 거리를 두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다음에 세상으로 가는 '거리두기' 말이다.
한국교회는 거리두기를 잊어 먹었다. 하나님과 만나서 서로 사랑해야할 가까운 거리에 오히려 거리를 두고 중간에 목회자나 다른 것들이 더 가까운 위치에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사람을 통해서 대신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것은 일종의 우상숭배와 비슷하다. 어떤 목회자를 존경한다고 할 때, 지나치게 너무 존경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그 목회자에 대해서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고 그 목회자를 만나야한다. 이것을 놓치는 순간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태도, 삶의 원리, 실수와 허물도 모두 '용서'나 '사랑'으로 덮는 것이 되어 버린다.
우리 안에 진정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4. 나만 배제되는 현상
하나님은 나의 인생, 나의 인식, 나의 주관, 나의 교회, 나의 신앙을 넘어서 존재하시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에 따라서 역사가 확연한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어떤 정확한 시점에서는 그럴 때도 있지만 하나님이 완전하시다면 당연히 그 완전함 안에서 컨틴전시 플랜이 있으시겠지? 문제는 내가 만약 하나님의 큰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면 '나만 배제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위대한 일들 가운데 자신이 느끼는 큰 은혜와 떨림과 변화를 거부하고 하는 척만하다가 몇세대가 지나도 엄청난 일을 직접 겪은 자신은 그 은혜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동성애문제도, 교인수의 문제도, 신천지의 문제도, 차별금지법의 문제도 이제는 '진검승부'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아직 정의라는 잣대로만 판단하는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이다. 그러나 이것을 거리두기 없이 그냥 진행하면 일어나는 일은 당연히 '차별'하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꼴 밖에 안된다. 진정한 관계는 사랑안에서 완전해 진다면 '사랑'을 실행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름다운 가정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정의'롭다. 모든 이들에게 사랑으로 대하는 관계는 '차별'이라는 프레임을 가지고오지 않는다. '성경안에서 다른 이와 적절한 거리두기'는 신천지가 끼어들 틈이 없다. 교인들이 떠나가는 이유는 교회가 정의와 사랑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회복하기 위한 것은 매우 단순하다. 하나님과 만나는 거리를 좁히고 다른 것들과 거리를 두는 것, 그 다음에 사랑과 정의를 가득 품고 다시 나아가는 것.
최근들어 맛집탐방, 부동산 갭투자, 비트코인, 명품자랑하는 기독교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 행위 자체를 판단하는 것보다는 예수님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면 그들을 비판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과 거리를 가까이에 하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거대한 두 갈래 길이 앞에 있다. 좋은 조건과 로또처럼 타고난 집안 내력에 감사하느라 눈물흘리는 기쁨이 아니라, 환경과 조건이 어떻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는 곳에 있겠다고 하면서 실제로 달려나가는 것. 두 가지의 길에서 나의 선택지는 하나 밖에 없다. 가진 것이 없으니 그럴 수 밖에라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신념이 신앙이 되어 버렸으니 이제는 조금 안심이 되기도 한다.
요즘들어 여기저기서 예수님의 뒷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도 자주 만나는 것 같다
하나님이 하시는 거대한 구원사역과 그의 나라를 열어가시는 역사 속에서 나만 배제되는 일이 없도록 부지런히 그리스도의 뒷모습을 찾으러 다녀야 한다. 나의 만족감이 언제나 배가 부르고 적정한 온도와 부정적인 것이 하나도 없는 환경이라면 고민해 봐야 한다. 40이 넘어서도 깨닫지 못한다면 확실히 나만 배제된 것 맞다. 하나님의 이 거대한 흐름에서.
0. 내가 있어야 할 자리
지금은 작은 교회를 다니고 있다. 개척했고 예배당이 없어서 작은 카페를 빌려서 예배를 드린다. 그런데 예배당을 살 이유도, 원함도 없어서 좋다. 그렇게 작은 헌금에서 노량진 상인들을 위해서, 철거민들을 위해서 헌금을 내고 크리스마스에는 찾아다니면서 새벽송도 한다. 내가 거기서 하는 것은 설거지와 방송봉사 정도이다. 하지만 함께 예배드리면서 하나님과 거리가 가까워지고 목회자는 그 거리를 지킬 수 있게 거리를 둔다. 그래서 하나님과 더 깊이 만나는 시간이 된다. 언제부터 주류가 되어 버린 기독교의 오만이 무너저 내리는가 기다리는 것을 멈추었다. 그보다는 진짜 내가 해야하고 만나야 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