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스러운 열정이 둘을 맺어주었다고 두 남녀는 확신한다. 그런 확신은 분명 아름답지만, 불신은 더욱더 아름다운 법이다.
예전에 서로를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래전에 스쳐 지날 수도 있었던 그때 그 거리나 계단, 복도는 어쩌란 말인가?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으냐고- 언젠가 회전문에서 마주쳤던 순간을? 인파 속에서 주고받던 "죄송합니다"란 인사를?
수화기 속에서 들려오던 "잘못 거셨어요"란 목소리를? -그러나 난 이미 그들의 대답을 알고 있다. 아니오, 기억나지 않아요.
이미 오래전부터 '우연'이 그들과 유희를 벌렸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분명 깜짝 놀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운명이 될 만큼 완벽하게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그렇기에 운명은 다가왔다가 멀어지곤 했다. 길에서 예고 없이 맞닥뜨리기도 하면서, 낄낄거리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누르며, 옆으로 슬며시 그들을 비껴갔다.
신호도 있었고, 표지판도 있었지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제대로 읽지 못해음에야. 어쩌면 삼 년 전, 아니면 지난 화요일, 누군가의 어깨에서 다른 누군가의 어꺠로 나뭇잎 하나가 펄럭이며 날아와 앉았다. 누군가의 잃어버린 것을 다른 누군가가 주웠다. 어린 시절 덤불 속으로 사라졌던 바로 그 공인지 누가 알겠는가.
누군가가 손대기 전에 이미 누군가가 만졌던 문고리와 손잡이가 있었다. 수화물 보관소엔 여행 가방들이 서로 나란히 놓여 있다. 어느 날 밤, 깨자마자 희미해져버리는 똑같은 꿈을 꾸다가 눈을 뜬 적도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시작은 단지 '계속'의 연장일뿐, 사건에 기록된 책은 언제나 중간부터 펼쳐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