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조지 진보와 빈곤_제 3권 분배의 법칙
헨리조지는 자유주의자이다. 경제적 자유주의자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자유주의자이기도 하다. 자유가 실제로 진보와 연결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문제는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나오는 '불로소득'이 문제다. 이 불로소득을 '지대'라고 한다면 불로소득을 줄이게 되면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생산력의 향상과 부의 창출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려면 헨리조지가 말하는 '이윤'과 '이자'의 차이, '자본'과 '이자'의 연결고리와 '지대'와 임금 그리고 이자의 관계를 규정해야 한다. 오늘은 그것부터 시작해보자.
"어떤 특정한 움직임을 수행하기 위해 최초로 발명된 기계들은 언제나 가장 복잡하다. 그리고 후배 기술자들은 당초 투입된 것보다 더 적은 바퀴, 더 적은 움직임의 원리를 가지고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음을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최초의 철학적 체계는 언제나 가장 복잡하고, 어떤 특정한 연결원리가 두 개의 서로 동떨어진 듯한 특정 원리를 매번 서로 연결시켜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널리 생각된다. 그러나 종종 벌어지는 일이지만, 나중에 하나의 커다란 원리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 대원리는 사물들의 전체 종속에서 무수희 불일치하는 현상들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것이다"_에덤스미스
지금까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생산력의 증대에 비해서 대부분의 생산자가 얻는 임금은 최저 생계비 수준으로 전락하는 이유는 자본의 제약, 노동에 대한 자연력의 제약 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분배의 문제이다. 흔히 부가 생산될 때 3요소인 '토지, 노동, 자본'에 대해서 '지대, 임금'은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자와 이윤이라는 단어는 정의가 필요하다. 이윤은 용어는 기업관리에 대한 임금, 위험부담에 대한 보상, 자본사용의 대가인 이자'란 세가지 요소가 들어 있다. 그러나 헨리조지는 이러한 이윤은 자본과 연결될 수 없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이윤이 나오게 만드는 요인은 '자본'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기존 주류 정치경제학이나 경제학과 달라진다.
부의 분배에 관한 정치경제학자들의 설명에 반대해서 다시 정리해보면 노동의 생산물이 임금, 지대, 이자로 분배되는 것에서 자본은 시초가 아니라 최후의 생산요소이다. 자본이 노동을 고용한다거나 임금은 자본의 상대적 풍부성에 의존한다고 보려는 기존의 이론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그럼 무엇인가? 바로 생산 우선의 원칙이다. 노동이 우선한다고 하면 그 노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토지가 존재해야 된다. 노동의 자연스러운 3요소는 논리적으로 토지-노동-자본이다. 자본은 생산의 필수 요소가 아니다. 노동은 자본의 도움 없이도 토지를 통해서 부를 생산할 수 있고 자본은 응축된 노동으로서 노동의 한 하부 형태이다. 노동은 자본의 도움 없이도 토지에 작용하여 부를 생산할 수 있었고 자본은 응축된 노동으로서 노동의 하부형태이다.
경제학적 의미에서 지대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좁은 의미에서 지대는 오로지 토지 사용의 대가만을 말한다. '인간의 노력에 의한 생산물'을 상정하고, 여기에는 주택, 공장, 농장을 포함하며 이는 좁은 의미에서 지대에 포함하지 않는다. 광의의 지대의 개념은 '자연능력의 배타적 사용권으로 인해 그 소유자에게 들어가는 몫'이다. 다시 말하면 토지소유자가 가지고 있는 권리로 인해서 얻게 되는 이익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배타적 사용권'이다. 사유재산에 있어서 토지에서 나오는 몫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배타적 사용권이 인정되면서 여기서 나오는 몫이 계속해서 부를 창출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광의의 지대 개념이다.
가치를 갖는 토지는 언제나 '실현지대'rent actual와 '잠재지대'rent potential를 가지고 있다.
지대는 독점 가격이고 인적 노력에 의해서 생산할 수도 증가시킬 수도 없는 자연요소를 개별소유권의 대상으로 삼는데서 생기는 것이다.
여러 토지소유자들은 토지의 '시장가격', '시장지대'의 상대성에 주목한다.
자유경쟁의 조건 하에서 토지소유자가 얻을 수 있는 가격을 결정하는 법칙을 '지대 법칙'이라고 한다.
지대법칙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어느 토지의 지대는, 동일한 투입으로 사용 토지 중에서 생산성이 가장 낮은 토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도를 초과하는 생산물에 의해서 결정된다."이것은 데이비드 리카르도의 논리이다.
결국 지대는 동일한 양의 노동과 자본이 가장 수익성이 낮은 업종에서 얻을 수 있는 생산을 초과하는 부분이다.
생산량 = 지대 + 임금 + 이자
생산량 - 지대 = 임금 + 이자
_헨리조지
생산량 법칙
생산량 = 지대 + 임금 + 이자
생산량 - 지대 = 임금 + 이자
이와 같이 임금과 이자는 노동과 자본의 생산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대를 공제하고 난 이후의 잔여에 의해, 무지대 토지에서의 생산물 또는 사용토지 중 가장 열등한 토지에서의 생산물에 의해 정해진다.
그러므로 생산력이 아무리 높아지더라도 지대가 같은 정도로 높아지게 되면, 임금과 이자는 상승할 수 없게 된다.
지대 상승이 진보하는 지역에서 생산력이 증대됨에도 불구하고 임금과 이자가 상승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어떤 사회에서든 부는 경작의 한계, 노동과 자본이 지대를 지불하지 않고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연의 기회로 부터 얻을 수 있는 대가인 지대선rent line에 의해 둘로 나누어진다.
토지 가치가 생산력보다 더 높은 비율로 상승하면 지대가 그 증가분 이상을 흡수해버린다.
노동과 자본의 생산물이 더 많아지더라도 임금과 이자는 하락한다.
토지가치의 상승이 생산력 향상을 따르지 못할 경우에 한해서 임금과 이자가 생산력 향상과 더불어 상승할 수 있다.
부의 분배에서 이자는 자본의 사용에 대한 모든 대가이다. 차용자가 대여자에게 지불한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다만 기업관리에 대한 임금, 리스크는 빼고 자본사용에 대한 대가만을 따진다. 그렇게 된다면 일반 이자율을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바스티아의 '대패의 예'를 살펴보가 이자의 자연스러움과 형평성에 한해서 의문점을 지적하는 논의과정을 살펴보자.
포도주나 꿀벌과 같이 자연의 능동적인 힘인 성장과 재상산의 원리는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신비한 형태의 존재 내지 상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헨리조지는 이것은 바로 이자의 원인이고 투입된 노동에 비해 자본의 부에서 자본으로의 축적과정과 더불어 더 증가하게 되는 또 다른 원인이라고 본다. 자연과 인간의 힘의 다양성을 교환을 통해서 활용하면, 자연의 생명력에 의해 생산되는 것과 비슷한 증가분이 나온다. 모든 곳의 물질의 품질과 능력이 어디에서나 균일하고 인간의 생산력도 균일하다면 이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이자는 자본의 사용에 대한 지불액이 아니라 자본의 증가로부터 생기는 대가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3가지 생산방식
적응시키기 adapting : 자연물의 형태나 위치를 인간의 욕구 충족에 적합하게 바꾼다.
키우기 growing : 동식물을 기르는 경우처럼 자연의 생명력을 활용한다.
교환하기 exchanging : 자연의 힘은 위치에 따라 다르고 인간은 힘은 항상, 직업과 성격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부의 총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더 큰 힘을 활용한다.
이자는 자연의 재생산력과 그의 준하는 효과를 가진 교환능력에 의해 자본이 갖게 되는 증가력에서 나온다. 자본의 사용과 자본의 증가를 구분해야 한다. 헨리조지는 이자는 보편적이며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이자를 철폐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자에 대한 관념은 자본의 사용자가 소유자에게 지불하는 것만을 생각하는데, 이것은 이자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포함한다. 누구든 자본을 사용하고 그로 인한 증가분을 취하는 사람은 이자를 받는 셈이다.
진정한 이자는 자본의 사용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자본의 자체의 증가를 가져온 것에 대한 대가이다
그리하여 자본을 기계류처럼 생산을 돕는데 직접 사용하거나 교환에서처럼 간접적으로 사용하면, 자본의 재생산적 특성에 의해 특별하고 독자적인 유리함을 얻게 된다. 이것은 자본을 남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을 경우처럼 명백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3636
이자가 산업의 강탈이라는 믿음은 대체로 진짜 자본과 가짜 자본을 구분하지 못해서이다. 실제로 이자인 이윤과 자본을 사용하지 않는 곳에서 나오는 이윤을 서로 구분해야 한다. 소위자본이라고 말하는 증권과 채권도 전혀 자본이 아니다. 채권문사는 자본과 아주 유사하고 자본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이자가 아니다. 부가 아닌 것은 자본이 될 수 없으며, 모든 자본은 구체적인 유형물로 자연이 저절로 제공하는 것은 제외된다. 대리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 내의 인간의 욕구를 직접, 간접으로 충족시키는 힘을 가진 유형물이다.
채권은 없어진 자본을 대리하지 못한다. 정부가 앞으로 주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서 채권의 소유자에게 상환하겠다는 엄숙한 선언일 뿐이다. 채권의 소유자가 채권을 사들이지 않고 자본을 그대로 소유하고 있을 경우에 오릴 수 있는 자본의 증가분도, 세금으로 재원을 조달하여 상황한다는 선언일 뿐이다. 공공 부채의 이자를 지불하기 위하여 현대 국가의 생산물에서 떼어져 나가는 막대한 금액은 자본의 소득이나 증가가 아니다. 또한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이자도 아니다. 그 돈은 노동과 자본의 생산물 중 임금과 실질 이자를 제외한 부분에 대하여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돈이다.
일반적으로 이자로 오해되는 이윤은 실제로는 자본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집중된 자본의 힘, 잘못된 사회제도에 기생한 집중된 자본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기업관리의 임금이 종종 자본의 소득으로 오해되는 것도 앞으로 밝혀질 것이다.
이자의 두가지 법칙을 살펴보자. 첫째, 노동을 공용하는 것은 자본이 아니며 오히려 노동아 자본을 고용한다. 자본은 고정된 수량이 아니라 다음 주 가지 사항에 의하여 증가되거나 감소할 수 있다. 노동을 자본의 생산에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투입하는 경우이다. 두번째는 부를 자본으로 전환하거나, 자본을 부로 전환하는 것, 자보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투입된 부이고, 부는 자산보다 더 크고 포괄적인 개념이다.
자유로운 조건 아래서, 자본의 사용에 주어질 수 있는 최대치는 자본의 사용이 가져오는 증가분이고, 최소치로 소모된 자본의 단순 대체이다. 그리하여 최대치 이상으로 자본을 빌려 오는 것은 손실이 되고, 대가가 최소치 이하일 때 자본은 유입되지 않는다.
이자에는 특정 시간과 장소의 공통률이 있지만, 임금에는 공통률이란 것이 없다. 하지만 임금의 상승과 하락에 어떤 공통된 법칙이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면, 이 법칙은 무엇인가? 헨리 조지에 따르면, 임금은 인간 행동의 기본원리인 “최소의 노력으로 욕구를 충족하려는 법칙”에 따라 자가노동과 자연의 생산력에 따른 평준화(균등화) 과정에 주목한다.
반론> 과연 임금은 고용주가 아무리 적게 주려고 해도 또 노동자가 아무리 많이 받으려고 해도 ‘자가 노동의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임금간의 차등’을 야기하는 다양한 이유들
“임금은 생산의 한계, 즉 지대를 지불할 필요 없이 개방된 자연의 최고생산점에서 노동이 얻을 수 있는 생산물에 의존한다.”
Q> 아담스미스와 리카르도의 ‘자연임금’은 과연 보장되고 있는가?
지대선은 필연적으로 임금선의 측정수당이 된다.
하지만, 본 장에서 사용된 임금이란 용어는 임금의 절대량이 아니라 총생산에서 지대와의 ‘비율로서의 임금’을 의미한다. 따라서 임금의 상대적 하락은 노동자의 생필품이나 편리품의 감소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토지가치의 증대와 토지소유자 계층의 소득 및 사치성 지출의 증가로 나타난다.
지금까지 고찰에서 “인간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욕구를 충족시키려 한다.”는 일반법칙의 원리는 지대법칙을 기준으로 추론할 수 있는 이자법칙과 임금법칙의 인정에도 적용된다.
현 정치경제학의 법칙 : 지대는 경작의 한계에 의존하며 한계가 등락하면 반대 방향으로 등락한다. 임금은 노동자의 수와 그 고용에 쓰일 자본의 양 사이의 비율에 의존한다. 이자는 자본의 수요와 공급 간의 균형에 의존한다. 또는 이윤에서처럼 임금에 의존하며 임금이 등락하면 반대방향으로 등락한다.
진정한 법칙 : 지대는 경작의 한계에 의존하며 한계가 등락하면 반대 방향으로 등락한다. 임금은 경작의 한계에 의존하며 한계가 등락하면 같은 방향으로 등락한다. 이자(그 임금과의 비율은 자본이 가지는 순증가력에 의해 정해진다.)는 경작의 한계에 의존하며 한계가 등락하면 같은 방향으로 등락한다.
우리가 제시한 법칙들은 하나의 요소에서 나오며 서로 지원·보완해 주고 완전한 전체 중에서 연관성을 가지는 각 부분을 형성한다.
이제 수립된 부의 분배에 관한 일관성 있는 이론에 따르면, “토지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은 곳에서는 임금과 이자가 상대적으로 높고, 토지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서는 임금과 이자가 상대적으로 낮다.”
“생산력이 증가한다고 해서 임금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토지가치가 증가한다는 사실에 있다. 지대는 모든 이득을 흡수하며, 빈곤이 진보에 동반한다.”
요약하자면, 임금이 생산력의 증가에 맞추어 상승되지 않는 이유는 지대의 증가 때문이다.
결국 무엇인가를 바꾸려면 '정의'를 다시 해야한다. 새롭게 정의내려야 한다. 기존의 언어들에는 이미 상징체계 안에 실재경험과 상상력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전환으로 부터 상상의 전환과 실재의 전환이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헨리조지의 이론은 간단하다 '생산력=지대+임금+이자'라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생각해보면 생산력에서 지대를 빼면 이것이 임금과 이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지대가 낮아질수록 생산력이 높아질수록 임금과 이자는 높아진다. 반대로 생산력이 높아지는대도 임금과 이자가 떨어지는 것은 지대가 덩달아서 높아지기 때문이다.
헨리조지는 이것을 해결하기 우해서 토지에서 나오는 지대에 세금을 매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헨리조지는 토지소유는 인정했고, 토지에서 나오는 지대에만 세금을 매기자고 했다.
또한 임금과 이자에 대해서도 세금을 매기지 말자고 했다.
사회주의자도 아니고 자본주의자도 아닌 새로운 법칙으로 사회를 구성하겠다는 것이 헨리조지의 전략이다.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발생하는 지대는 철저하게 통제관리하고 자연을 통해서 얻게 되는 이자, 생산, 교환, 재생산은 완전히 자유하게 놓아 두면 생산력이 높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대와 상관없이 노동을 하는 곳은 열심히 할 수록 더욱 번성하게 된다. 지적생산물이 그 만큼 다양한 부를 창출하는 것은 '지대'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화를 잘 그리는 사람이 만화를 팔아서 수익을 올리다고 하면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책을 만드는 공장에서 지대가 높아지면 만화책값이 비싸지면서 사람들이 책을 안하게 된다. 그러면 일정 한계까지 만화책을 사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정도만 가격을 유지하면 그 만큼 지대에서 얻는 이익도 최대가 된다. 만화책을 파는 곳을 온라인으로 할 경우 온라인 회사는 일정 서버를 운영하여 만화책을 팔텐데 서버를 만드는 공장이나 서버를 놓는 건물이라던가 어디든지 지대를 올리면 그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익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지대'로 대표되는 '땅값'은 불로소득으로 소유만해도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