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조지 '진보와 빈곤'_7권_토지사유제의 정의롭지 못함
파스칼은 말한다. '힘이 동반되지 않은 정의는 권력이 없는 것이고, 정의가 동반되지 않은 힘은 전제적인 것이다.'라고 말이다. 더불에서 '힘이 없는 정의는 하나의 모순인데 언제나 사악한 이들이 있기 때문이며, 반면 정의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라고 말한다. 헨리조지는 노예제도와 토지소유제도의 동일점을 비판한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가 '정의'의 잣대로 판단되지 않는 것은 부정의하다. 만약 ktx를 탔는데 모든 석이 자유석이라고 해보자. 자유석인데 먼저 앉은 사람은 자신의 물건은 모든 자석에 하나씩 놓고 자신의 자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에 타는 사람들은 모두 서서 가야 한다. 이것은 정의로운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누구나 화를 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토지소유를 이렇게 놓고 보지 못한다. 오늘은 정의의 관점에서 토지사유제를 생각해보자.
토지사유제의 철폐에 관한 주장은 정의의 문제와 관련된다. 본능적으로 '정의감'이라는 것은 인간의 내면적인심리법칙에 근본을 이루며 '정의로운 것만이 현명을 대신하여 옳은 것으로 지속될 수 있다'란 진리관을 신뢰하도록 믿게 만든다. 정치경제학의 용어를 윤리학적 용어로 바꾸는 것은 이상이 없나? 헨리조지는 정치경제학적 용어를 윤리학적 용어로 바꾸더라도 물질적 진보와 더불어 증가하는 악의 원천으로 '빈곤'이란 하나의 악이 있음을 보여준다.
개인의 소유를 정당화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무차별적이고 공정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힘의 사용에 대한, 그리고 자기 노력의 결실을 향유할 수 있는 배타적인 권력의 원천은 '노동가치설'에 의존한다. 이 펜이 내것이라는 이유는 1. 다른 사람의 정당한 권원을 도출할 수 있는 자연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2.만일 다른 권원이 존재한다면 두 권원이 상호 모순되어 여하한 근거로 붕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해 모든 사람은 동등한 처지에 있으며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생산자가 생산으로 인해 배타적 보유와 향유의 권리를 갖는다면 노동의 생산물이 아닌 것의 배타적 보유와 향유는 정당하지 않으면 따라서 토지의 사적 소유는 옳지 못하다. 토지사유제가 정의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는 관습적인 재산 분류방식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소유물을 법률적으로 재산이라는 범주하에 동산personal property와 부동산real estate으로 구분하려는 것은 철학적으로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진정 자연스러운 물건의 구분은 노동의 생산물과 자연의 부존물인 토지로 구분하는 것이어야 한다.
부의 사유화는 인정할 수 있지만, 토지의 사유화는 인전할 수 없다
부동산으로 분류되는 주택과 대지의 차이점에 주목해보자. 이러한 구분이 이해되면 자연적 정의는 부의 사유를 인정하고 토지의 사유를 부인한다. 인간은 자연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연자체를 소유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유된 토지이다. 정의의 관점에서 누군가 어떤 시대에 토지를 소유하고 그것을 되물림하면, 세대가의 정의도 실현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음세대에 우리는 '토지의사유화가 정상이다'라는 전통을 물려줄 것이다. 다음 세대들에게 제로섬 싸움을 시키고 영영 돌이키기 힘든 땅따먹기를 시킨다.
물질적 진보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고도 문명 속에서 결핍으로 인해 인간이 쓰러지고 죽어가는 것은 '자연의 인색함'이 아닌 '인간의 부정의'에 기인한 것이다. 죄악과 비참, 빈곤과 궁핍은 인구 증가와 산업 발전의 당연한 결과가 아니다. 이런 결과가 인구 증가와 산업 발전에 뒤따르는 이유는 토지가 사유재산으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이러한 부정의를 당하면서도 이를 쓸어버리지 않고 잠시라도 멈칫거리는가? 지구를 배타적으로 보유할 수 있는 권리의 근원은 정복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권원이 힘에 근거를 둘 때, 힘으로 이 권원을 무효로 하더라도 불만이 있을 수 없어야 한다. 사람이 생산한 것인 토지개량물과 물질적인 우주인 토지 그 차이에 따라서 권원이 달라진다.
헨리조지에 따르면 개인의 권리는 사회의 권리 속으로 사라진다. 대는 소를 취하지만, 소가 대를 취하지는 못하는 것이 원칙이다.에 대한 의문이 있다. 토지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이 '토지의 선점'에서 생기는 것이 정의로운가? 아울러 소수가 엄청난 토지 면적을 소유하는 이 현실에 어떤 제한이 정의로운 권리로 등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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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사유제'가 정의로운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토지 사유제'도 정의롭지 못하다. 100명이 사는 섬의 가정처럼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관계가 복잡하더라도 같은 원인이 같은 방식을 통해 같은 결과를 내며 그 궁극적인 결과는 노동자의 노예화다. 금세기에서 보듯이 인간이 생존하고 생활해야 하는 토지의 소유는 사실상 인간 자체를 소유하는 것이고, 일부 토지를 배타적으로 사용하고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면 다른 사람을 자기 사유재산으로 만드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토지사유화로 인해 발생한 노예사유제와 사례들은 농노제도이다. 역사의 여명기에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하여 그리스 반도의 원주민을 농도helots를 만들어 공물tribute을 납부토록 하였는데 이것도 일종의 노예제이다. 로마의 라티푼티움latifundium을 생각해보자. 일단 토지의 주인이 되면,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주인이 된다. 토지 소유는 귀족제의 근거가 된다.
토지소유제와 노예제와는 같은 것이다
노예와 달리 현대의 노동자를 혹사하는 자는 '불가피한 수요 공급의 법칙'이며 노동자는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노예제도의 철폐 요구에 대해 남부의 노예요소가 위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노예제도가 철폐된 지금 남부의 농장주들은 아무 손실도 입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인구가 증가하고 토지가 귀해지면 농장주는 노동자가 벌어들이는 것 중에서 노예사유제 하에서보다 더 많은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이고 노동자의 몫은 더 적어질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자유 경쟁적인 생산과정에서 빈곤의 예속관계와 노예화 과정은 공급과 수요 법칙의 지배하에 더욱 거세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의 진정한 원인은 토지의 독점에서 기인한다. 토지사유제는 '맷돌의 아랫돌'이며, 물질적 진보는 '맷돌의 윗돌'이다. 노동 계층은 증가하는 압력을 받으면서 맷돌 가운데서 갈리고 있다.
토지를 공동재산이라고 분명히 인식하는 쪽에서조차 토지소유제의 철폐를 주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효용, 또한 오래 존속해 온 이 제도를 신뢰한 사람들에게 지불에 대한 손실을 주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다. 즉 현재의 토지소유자에게 완전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때문이다.
허버트스펜서도 '토지의 배타적 보유의 부당함에 대한 지적'이나 존 스튜어트 밀은 '미래에 추가로 발생하는 이익만의 환수제 방안'을 말한다. 토지가 국민의 것이라면, 무슨 이유로 토지 소유자가 지대를 취득하도록 계속 허용하거나 지대의 손실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보상이 필요한가? 지대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지대는 사회 전체에 의해 창출된 가치를 대표한다." 사회전체가 창출한 지대는 반드시 사회 전체의 것이 되어야 한다.
지금 당장 토지사유제를 철폐하라
토지의 국유화나 지대의 소유권을 획득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보통법의 원리에 따라서 토지 소유의 정당성에 관한 소송을 가정하면, 일반 국민이 지대에 대한 소유권을 되찾는 것으로 만족하고 토지개량물과 동산은 토지소유자가 안전하게 소유하도록 해주자는 주장의 의미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과연 오래된 것은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일까? 보수주의적 사고방식은 과연 자연스러운 것인가? 드 라불레이의 저서 '원시 재산권'Primitive Property를 생각해보자. 평등한 인간적 권리가 부인되고 특권층이 형성된 원인은 다음과 같다.
소수 권력자 내지 군부로의 권력 집중
정복의 결과 피정복민의 농노 상태로 전략
성직자와 전문 법률가 계층의 분화와 영향력
토지의 사적소유는 문명의 기초인가 아니면 야만적 강탈의 역사인가? 봉건토지, 군대토지, 상속방식인 장자상속제와 한사상속제등을 찾아보자. 문명의 초기 단계에서 토지는 공동소유였지만 점차로 토지사유화로 이행된다.
토지소유제는 노예제와 군주제처럼 과거의 산물이다.
인간은 교육과 관습의 영향이 약한 경우에는 자연의 사사물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본능적으로 인식한다. 교육은 역설적이다. 토지소유와 같은 불평등은 자연적이지 않은 것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이것을 반대로 교육하기 시작한다. 미국의 서부시대를 생각해보라.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땅에 선을 그으면 그 자체로 새로운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노천금광'의 중요성이 부각되던 시기에 '토지공유'라는 원시적 관념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바로 골드러시이다.
북아리메카에 처음 이주했던 영국인이 처했던 상황이 처음부터 토지소유문제에 관심을 가질만한 상황이었다면 토지문제에서도 분명히 귀족정치나 군주정치를 거부했듯이 사적토지소유도 거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대륙에는 광활한 토지가 존재하여 사람의 이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토지사유제란 제도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사적인 토지소유가 계속되는 경우에는 그 필연적인 결과로 노예제도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감지하지 못했다. 로마 공화국을 망처놓은 제도로서 '토지소유제'를 생각해보자.
미국의 1세대 토지귀족은 광대한 공공토지가 저 너머에 존재한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미국의 관대함, 독립심, 유연성, 낙관성 등과 같은 특성을 형성했다. 하지만 미국이 가지고 있던 강한 매력은 사라지고 토지를 일부 국민의 배타적 재산으로 삼는 제도의 악영향이 증대되는 추세이다. 한 때는 음식을 구걸하는 사람을 박대하는 것을 노상강도에 준하는 범죄라고 보았으나 이제는 떠돌이를 처벌하는 법률까지 제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스스로 지구상 가장 진보한 국민으로 자부하는데, 그러나 이와 같은 부산물이 생긴다면 우리 진보가 추구하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가 각종 권력의 탄압 속에서 양도할 수 없는 인권에 관한 선언을 발표했을 때 공화국을 세운 것이 아니다. 우리 중 가장 가난한 어린이에게도 토양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그 선언을 실질적으로 시행할 때까지는 공화국을 세웠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제일 원리인 토지에 대한 만인의 평등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의 자유로운 체제는 헛것이 되고, 의무교육도 소용없으며, 우리의 발견과 발명은 한갓 대중을 짓누르는 힘을 더해줄 뿐이게 된다.
http://www.economyinsight.co.kr/news/articleView.html?idxno=934
민네이션, 생각
인간의 욕구는 한계가 있다. 어느정도 지나면 욕구는 한계가 생긴다.
인간은 '생존'의 욕구가 있다. 생존이 어느정도 유지된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그 다음의 욕구로 옮겨가게 되어 있다. 인간의 마지막 욕구는 아브라함 매슬로에 의하면 '자기실현'이다. 자기를 실현하는 욕구가 실현되었을 때 오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토지소유와 토지사유제는 하나의 욕구의 실현이다. 그 욕구는 주거에 대한 불안함이다. 주거가 안정되면 그 다음에 토지를 투기에 이용하지 않는 이상 매일 토지값만 보면서, 집값만 보면서 살지 않을 것이다.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다음에는 사람들은 무엇을 추구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행복'한 삶을 위한 자신만의 방식일 것이다. 취미와 모임, 도전과 재미를 추구하는 삶이겠지 않을까?
그렇다고 기본적인 일이 없는 상태에서 매일 예술가처럼 창작만할 수 없으니 '유토피아'를 만들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유토피아는 잠정적인 유토피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정말 생각해보면 '노예제'는 나쁜데 '토지사유제'는 왜 맞는지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된다.
토지소유는 훔쳐온 것이라고 말한다. 토지소유제는 노예제와 군주제처럼 과거의 산물이다.
https://kr.theanarchistlibrary.org/library/benedigteu-aendeoseun-se-gisbal-araee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