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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12. 2022

기독교인이라면
꼭 생각해야할 주제들

기독교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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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무엇을 믿는가? 기독교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믿는다. 그럼 하나님의 속성은 어디까지 공유되고 있는가? 주체적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하는데 있어서 어떤 범위까지 가능한가? 이런 고민들을 하다가 보면 환경운동, 동물권, 우주쓰레기, 지구온난화 등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인이라면 이 주제를 꼭 생각해야하지만, 한국에서는 이상하게 이런 고민들을 잘 안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무엇이 새로움을 만들어낼까? 아마도 신앙적 바운더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한계와 한나아렌트가 말하는 ‘생각하지 않음’ 혹은 ‘사유하지 않음’이 그 원인이 아닐까? 더 깊게 묵상하고 더 넓게 생각하다보면 인지 영역이 늘어나게 되고, 자신과 자신이 포함된 세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것이지만 그 반대로 길을 만들었던 것이다.


1. 기독교인은 환경주의자가 되어야 하나?


기독교는 지금까지 왜 환경에 무관심했었을까?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을 ‘교리’에서 생각해보면 ‘창조-타락-구속’의 측면에서 세상이 타락했기 때문에 보존하거나 아껴쓸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타란 이후에 구속은 이 세상은 없어지고 새로운 천국으로 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에 더욱이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는 별로 보존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러한 사고는 행동으로 이어졌고 실제로 환경을 오염시켜도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게 되는 ‘면죄부’로 작용하기도 했다. 교리가 오히려 한나아렌트의 말처럼 ‘생각없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기독교의 종파중에서 동방정교회 같은 경우에는 창조에 기반을 둔 자연과 우주에 대한 존재를 강조한다. 그러나 반대로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이 환경에 무관심한 데는 여러가지 표면적 이유가 존재한다. 정치 우파 활동과 탐욕스러운 경제 이권에 눈이 먼 것이 그런 이유 중 하나다.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현대판 황제인 소비주의와 자본주의 체에 걸러 묽은 수프만 남길 때가 많다. 또 그들은 ‘자유주의자들’이 찬성하는 명분은 무조건 반대하려 든다. 그리고 더 깊은 신학적 뿌리가 이런 환경에 대한 무관심의 새싹들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있다. 다행히 표면 아래서 다른 뿌리들이 뻗어가고 있다. 자연 사랑의 새싹들이 메말랐던 땅을 뚫고 나오고 있다.


창조세계는 그럼 어떻게 바라보아야하는가? 그에 대한 최근의 논이가 있다

일반적이고 정체된 창조 신학이 보다 활발한 지속적 창조 신학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구미 기독교계의 많은 지역에서 창조교리가 타락교리에 산 채로 잡아 먹혔다. 인간의 죄로 인해 창조세계의 추락 때문에 영광으로 빛나는 하나님의 수공예품이 본래의 빙츨 잃었다.

자포자기의 종말론이 매력적인 하나님 나라 복음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 모든 피조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소유권에 대한 인식의 전이가 일어난다.

지역과 국가에서 전 지구로 전이가 일어난다.

이웃에 대한 새로운 시간이 낡은 모난 이기적 개인주의를 몰아내고 있다.


인지거리의 차이가 세대별로 달라지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기독교인이지만 개발과 성과주체로 자라던 시대에는 환경보호라던지 지구적 생각을 해본 적이 별로 없다. 아니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는 세계관의 확장이 넓어지면서 ‘개인-사회-국가-자연-우주-무한’으로 뻗어나가는 것이다. 문화와 예술 뿐 아니라 과학기술까지도 이제는 화성 거주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교회는 ‘교리’에만 천착하다보니 결국은 변화하는 세계에서 어떤 뚜렷한 목소리도 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이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는 명령을 받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도 있다. 예수님은 다시 이 땅으로 오신다고했고 우리는 10달란트 받은 종처럼 잘 관리하고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야 하는 명령을 받았다. 애매하게 신앙과 자본주의가 결합된 신앙이 아니라 지켜며 회복하며 새롭게 만들어가는 신앙이 중요하다.


2. 신앙을 가졌다면 꼭 배타적이 되는가?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실천한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할 때 ‘항상 변하지 않는것’ 혹은 ‘근본적인 원인’ 등등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시대에는 극단적으로 보수적 기독교는 자신들 외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 배타적이다. 그리고 배타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로슬로브 볼프는 ‘배제와 포용’에서 ‘진리는 배타적이지만 진실은 포용적이다’라고 말한다. 내가 믿는 진리는 다른 것과 다르게 완전한 진리이지만 그것을 믿고 있다는 것 자체는 진실이다. 그러나 누구나 무엇인가를 믿고 있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 진실은 인정해야하고 또 포용해야하고 또 당연히 그의 자유이다. 그러나 내가 믿고 있는 진리는 그 자체로 배타적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배타적인 진리의 핵심이 무엇인지 다시 고민해봐야겠지만 말이다.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기독교를 생각하다 17장 ‘나는 왜 성육신적 전도자인가’에서 성육신적 태도에 대해서 말한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신사적이고 정중한 대화를 해야한다.

하나님이 대화의 보이지 않는 참여자이시며 우리를 포함한 모든 대화 참여자에게 뭔가를 가르치기 원하신다고 가정해야 한다.

서로 존중하는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서 겸손을 배워야 한다.

각 종교가 다르므로 각 종교에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앞의 조건을 갖춘 후에야 비로소 대화에 전도의 요소를 포함할 수 있다.

전통이 틀렸을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패러독스 가운데 살아야 한다.

다른 종교 신자들이 위험에 빠졌을 때 그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기독교가 회복해야하는 것은 어쩌면 겸손, 사랑, 인내, 오래참음보다는 오히려 ‘태도’일지도 모른다. 태도가 기분을 만들고, 기분은 흥분을 넘어서 서서히 감정이 된다. 감정이 되고나면 잘 바꾸지 않는다. 기독교에 대한 감정은 어쩌면 잘 안바뀔 것이다. 바뀔려면 필요한 것은 ‘태도’일 것이다. 그 태도는 물론 내면의 감정과 인식 그리고 영성에서 나오지만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황에서 기독교는 겸손하게 진리를 품고 진실로 믿음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며 실천으로 드러내는 것이 맞을 것이다.


3. 이머전스 신앙이란 무엇인가


스티브 존슨의 베스트셀러 ‘이머전스’가 출간되었다. 이것은 개매나 점균포자, 도시 거주자들의 군락이 그 구성원들보다 똑똑하다는 점을 탐구한 책이다. 이 책에 따르면, 낮은 지능들의 상호작용 가운데 새로운 차원이 지능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머전스는 전체가 부분들의 합보다 똑똑해지는 현상이다. 상대적으로 지능이 낮은 부분이 상대적으로 단순하게 상호작용할 때 이 현상이 나타난다. 대개 전체 과정을 통해서 계획자 없이도 이 상호작용에서 더 높은 구조 혹은 지능이 나타난다. 이런 종류의 시스템은 기저에서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이 밖에 여러 배경에서 사용되는 ‘이머전스’의 의미는 관대한 정통신앙이라는 생태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간단한 그림으로 나와 ‘이미전스 사고’ 개념을 살펴보자. 나무 횡단면을 생각해보자. 각 나이테는 이전 나이테를 대체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더 큰 범위에서 그것을 포용하고 포함한다. 나무의 이전 성장은 계속적인 성장과 건강으로 통합된다. 아니, 이전 성장은 새로운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매년 밑에서 올라온 영양분과 위에서 내려오는 에너지는 하나로 통합되어 튼튼한 새 나이테를 만들어 낸다. 가장 튼튼하고 가시적인 부분의 생산은 가장 수명이 짧은 부분과 가장 눈에 띄지 않은 부분에 달려 있다. 성장 자체는 나무껍질 속에 감추어져 있다. 다시 말해, 새로운 나이테는 땅과 비, 햇빛, 구조, 과정의 복합작용을 통해 조용하고도 점진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나무가 자라는 토양은 그 조상들의 썩은 찌꺼기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무심코 넘어가지만 나무의 성장과정은 이토록 복잡하고 놀랍다.  


이머전스 신앙이란 흔히 평신도와 목회자를 나누는 방식에서 '우월성'을 목회자가 가지고 가지 않는 교회를 말한다. 평신도라고 부르는 전체 사람들이 오히려 목회자보다 더 똑똑해지는 것이다. 이머전스 신앙은 어쩌면 이미 예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목사들은 점점 더 현실에서 멀어지고, 현실은 점점 더 세분화되어서 지성적인 영역이 늘어나고, 정신의 힘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생각해보아야 한다. 고대 그리스철학에서 플라톤에서부터 시작되는 이분법과 상층부에 있는 우월성이 무너지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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