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크게 7가지 교파로 나누어진다. 이 범주에는 당연히 로마카톨릭을 포함하여 성공회와 오순절, 재세례파도 포함이 된다. 맥클라렌은 자신이 경험한 종교적 특성 특히 프로테스탄트와 어깨를 걸치고 있는 종교적 특성을 자신이 경험한 만큼 이야기한다. 점점 이 책을 읽을 수록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를 알게 된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이다. 이 책을 끝내면 이제 한나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으로 넘어간다. 책을 읽으며 드리는 주일예배에서 조금씩 성장해가는 나를 느낀다. 이렇게 성장해서 무엇을 할까? 나는 무엇을 믿는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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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와 근본주의
오늘날의 칼뱅주의는 스위스의 위대한 개혁자 장 칼뱅과 별로 상관없다. 오히려 수백 년 후에 활동한 그의 몇몇 후계자들과 더 관련이 있다. 현재 칼뱅주의의 중심엔느 예정론이 있다. 학문적 예정론은 약간 다르긴 하지만 예정론은 대체로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에 더 많은 힘을 싣는다. 그러니깐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들이 예정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 혹은 섭리의 영역을 줄여 버리기도 한다. 맥클라렌의 이야기에서 고민해야할 부분은 근본주의를 칼빙주의와 동치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16세기를 넘어서 3개의 흐름으로 나누어진다. 교리, 경건, 문화의 관점에서 각각 학자들과 신학교에서 자신들의 역사와 관점에 따라서 세분화를 일으켰다.
1) 교리를 강조하는 칼빈주의자 : 예정론, 제한속죄론, 전적타락 등등 교리적인 부분에서 칼빈주의를 사용하는 경우를 말한다.
2) 경건을 강조하는 칼빈주의 : 칼빈주의를 강조하지만 예배에만 적용해서 경건의 형태를 사용하기 위해서 칼빈을 이야기한다.
3) 문화적 칼빈주의자 : 네덜란드에서 형성된 네오칼비니즘을 말한다. 헤르만 바빙크, 리처드 마우,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코넬리우스 플랜팅가, 아브라함 카이퍼가 여기에 속한다. 카이퍼의 칼빈주의 강연이라는 책에서 보면 문화변혁적 칼빈주의를 대표하는 내용을 많이 써 놓았다. 그래서 칼빈주의 안에서도 카이퍼의 관점을 더욱 중시해서 카이퍼리안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흐름은 캘빈칼리지나 캘빈신학고 도르트 칼리지, 캐나다의 몇몇 학교들로 이어진다. 한국에서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창조타락구속의 기본으로 해서 세계관적 접근을 한다.
맥클라렌의 칼빈주의 이해
오늘날 칼뱅주의는 대부분 우리의 자유가 환상이며 우리는 꼭두각시에 부로가하다는 소위 결정론으로 흘렀다.
우리를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인지 유전자나 물리법칙, 사회경제 법칙, 성심리적 공격성인지는 중요하지 않는다,
결정론에 대한 칼뱅의 관심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그거 결정론을 만든 게 아니라 최소한 아우구스티누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만연한 믿음에 관해 고찰했을 뿐이다.
칼뱅이 세상을 떠난 후 거대한 융합이 이루어졌다. 신적 결정론과 기계론적 결정론이 철학과 만나서 ‘이신론’을 만들어 냈다. 이신론은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 있고 나머지 우주는 마음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개혁교회의 칼뱅을 이어가는 2가지 방법
첫째,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 지도자들의 탈중세 교리를 언제까지고 충실히 옹호하고 발전시킨다. 이에 대해 개혁교회 신학자 존 프랑케 박사는 이런 표현을 썼다. “보수적 왜곡, 즉 개혁 신학을 16세기 17세기의 사건, 신경, 고백들과 동일시함으로써 이론상으로는 아니라도 관행적으로 자기 전통의 개혁 원칙을 사실상 파괴하여 그 공식적인 특성에 대한 중심적인 약속을 배반하는 행위”
둘째,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 지도자들이 탈중세에 맞는 교리를 세운 것처럼 포스트모던 시대에 맞는 교리를 개척한다. 바로 이 두번째 길이 차세대 개혁 또는 개혁하는 교회가 취해야할 길이다.
존 프랑케 박사 : 개혁 신학은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늘 변하는 세상에서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늘 개혁되고 있다. 즉 개혁신학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따라서 개혁된 시각에서 보 ㄹ때, 개혁 과정은 단 한 차례로 완성되어 ‘진정으로 개혁된’ 입장으로 고정되어어서는 안 된다. 위르겐 몰트만의 말을 빌리자면, 개혁은 “고백파가 기대고 전통주의자들이 안착할 수 있는 한 차례의 행동”이 아니다.
TULIP 교리 리뉴얼
Triune love 삼위일체 사랑
Unselfish election 이타적 선택
Limitless reconciliation 무제한적 화해
Inspiring grace 마음을 움직이는 은혜
Passionate, persistent saints 열정적이고 끈기 있는 성도
칼빈과 칼빈주의는 다르다. 칼빈이 원래 이야기했던 이야기와 칼빈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사상을 펼쳐 나간 사람들은 구분되어야 한다. 오히려 칼빈은 근본주의자라기 보다는 자유주의자이면서도 현실정치와 연결되는 부분이 많다. 제네바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이후에 일어나는 일종의 세르벤투스 처형과 관련된 상징은 오히려 칼빈에거 덧씌워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국가교회적 성격이 강했던 시대적 상황을 볼 때 칼빈이 했다고 보는 것보다 그 당시 상황에서 이단에 대한 처형과 독단이 자연스러웠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는 어떤가? 아마도 한국교회는 칼빈주의에서 근본주의적인 요소만 더 강조된 것일수도 있다. 이 부분은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재세례파와 성공회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성인이 되었을 때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콘스탄티누스가 말한 삼위일체론과 연결해서 그 자신은 믿음이 없었더라도 믿음의 역사에 포함시켰다는 것이 기독교에서는 칭송을 받는다. 그러나 재세례파는 ‘기독교 공인’이 세계적 기독교를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기독교의 세속화’를 가속시킨 것으로 본다. 따라서 신앙고백에 있어서 매번 진정성을 가지고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재세례파의 특징을 보면 아래와 같은 부분들에서 칼빈주의나 근본주의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종교개혁 이후에 크게 3가지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루터파와 칼빈으로 대표되는 개혁주의, 그리고 종교개혁 좌파진영이다. 루터파와 칼빈주의를 합쳐서 관주도형 종교개혁이라고 부르고 관이나 국가와 연결되지 않는 운동을 좌파진형의 종교개혁이라고 부른다.
재세례파의 특징
재세례파는 개인의 결단을 강조한다.
재세례파는 기독교 신앙을 삶의 방식으로 본다.
재세례파는 현대 문화에 급진적인 자세를 취했다.
재세례파는 변방에서 살고 일했다.
재세례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셨다.
재세례파는 평화를 실천하려고 애쓴다.
재세례파는 ‘창조 공동체’를 실천했다.
재세례파는 비타협주의, 비순응주의를 취한다.
재세례파의 구분
메노나이트 : 하워드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
후터나이트 : 공유경제를 실현하는 가장 진보적인 그룹
그리스도 형제단 : 로날드 사이더 ‘부유한 시대를 사는 가난한 그리스도인’
아미쉬파 : 미국 중부의 아미쉬마을
재세례파는 기독교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재세례파는 기독교를 삶의 방식으로 본다. 여기서 믿음은 faith가 아니라 following이 된다. 그래서 제자도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급진 제자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재세례파는 사실 교리공부를 잘 안한다. 전하는 책도 많지 않다. 그러나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잘 전해지기도 한다. 기독교 현실주의와 성경적 현실주의로 나누어지는 흐름이 있다. 라인홀트니부어의 기독교 현실주의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필요하지만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힘이 필요하다고 본다. 70년대에는 니부어의 입장이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요더와 같은 학자들은 예수님이 말한 성경의 말씀을 현실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성경적 현실주의가 된 것이다. 누군가 폭력을 당하면 우리는 고난을 당하고 그것을 받아들인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극단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아무튼 재세례파는 평화가 우선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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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의 특징
역동적 긴장의 관계 :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중 한 쪽만 선택하지 않으려면 역동적 긴장 가운데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언제나 한가지만 선택하는 환원주의의 유혹을 거부해야 한다.
타협의 관행 : 많은 기독교인에게 타협은 지저분한 단어이다. 그러나 성공회는 타협을 선택한다. 타협은 모든 사람이 모든 문제에서 똑같은 속도로 똑같은 결론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아름다움의 관행 : 성공회는 아름다움으로 시작해서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추며 아름다움 속에 머물렀다. 아름다움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성공회의 경우 우리나라는 ‘성공회대’가 매우 진보적이다. 그런데 성공회 자체가 타협과 역동적 긴장을 강조하기 때문에 각국의 상황에 맞게 학교를 운영하도록 허락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로완윌리엄스의 저자들처럼 매우 평화롭고 긴장을 완화하는 방식으로 제안하는 글들도 있다. 성공회는 카톨릭전통을 중시하는 고교회와 프로테스탄트를 중시하는 저교회가 있다. 한국에는 저교회주의자들의 저작 중에서도 존스토트나 톰라이트의 저작이 많이 들어와 있다.
그외의 교파들
감리교는 자유를 더 강조하는 흐름이 하나 있고, 웨슬리의 방법을 강조하는 흐름도 있다. 어떻게 보면 진보와 보수의 긴장이 섞여 있다고 볼 수 있다. 감리교는 알미니우스의 신학에서 웨슬리가 영국 국교도에 대항에서 개인의 결단을 강조하는 신앙으로 굳혀갔다. 국교도에 속하면 구원받은게 아니라 각자의 신앙으로 변화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개혁적인 문화운동으로 발전하게 되기도 한다.
교리를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재림, 신유, 성결을 강조하는 성결교단도 있고 나사렛 교단도 있다. 웨슬리안이라고 하기에는 존 웨슬레의 방식이 책으로 남겨져 있지 않고 설교만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교리적으로 체계적이지는 않다.
카톨릭 교회는 하나인교회, 거룩한교회, 사도적인, 보편적 교회를 믿는다는 고백을 니케아 신조에서 가지고 온다. 이것이 카톨릭 교회의 특징이다. 개신교는 영적으로 하나라고 믿지만, 카톨릭은 실제적으로 조직적으로 경제적으로 하나라고 믿는다. 천주교의 경우 성당이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만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카톨릭은 universal이라는 보편적인 교회를 말한다.
민네이션 생각
종교를 중심으로 삶을 재편하는 것은 매우 오래 걸린다. 종교를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정리해버리면 오히려 선택의 문제로 전락해 버린다. 종교를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인간은 누구나 나는 누구인가’ 혹은 ‘나는 무엇을 믿는가’라는 혹은 ‘진리란 존재하는가’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정체성이 형성되는 시기에 이런 고민을 시작한 것 같다. 그 때 나에게는 종교가 아니라 삶의 이유가 되었다. 물론 그 이후에 개신교의 문제들을 경험하고나서 핵심적으로 성경을 혼자 읽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형식에 얽메이게 되거나 사건에 묶여 있는 때가 많았다.
지금은 프로테스탄트부터 시작해서 성공회, 재세례파, 감리교, 가톨릭 등등 다양한 고민들을 하고 있다. 오늘도 배웠던 다양한 전통들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물을 수 밖에 없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은 무엇을 믿는가? 인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그런 하나님이 되었는가?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지만 꼭 해야하는 질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