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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r 28. 2022

포스트 프로테스탄트를 생각한다

기독교를 생각한다_브라이언 맥클라렌

기독교를 생각한다라는 책을 읽고 있다. 처음에는 7가지 교파를 알아보았고 그 후에는 계속해서 복음주의, 자유주의, 보수주의의 관점과 오순절 그리고 교회론을 알아본다. 읽으면서 새로운 관점들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 그리고 아는 것과 믿는 것들의 차이와 연결을 생각하는 시간이다. 모든 것을 관용할 수 없지만 내가 믿는 것들을 바르게 말할 수 있는 신앙이 중요한 것 같다. 아직도 갈길이 멀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행동하고 돌아보고 함께 걸어가는 것. 새로운 신앙을 고민한다.



https://brunch.co.kr/@minnation/2913


포스트 프로테스탄트란 무엇인가?


중세 면죄부 사건 이후에 프로테스탄트들은 기존의 카톨릭에서 나오면서 자신들의 신학과 철학을 구축해야 했다. 면죄부는 '구원의 방식'이 문제가 된 것이었고, 프로테스탄트들은 면죄부라는 방식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라고 말한다. 종교개혁의 역사에서 초기 프로테스탄트들은 정치적, 경제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마르틴 루터는 '나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오직 믿음,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다. 천주교에서는 그럼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하지만 그것이 효과를 받을려면 선행을 해야한다는 부분이 있다.


천주교 안에서도 종교개혁이 일어났음으로 다양한 변주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어떤 경로로 천국에 이르는가? 주로 카톨릭교회는 예수님이 구제주이지만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얻으려면 그만한 자격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 자격은 무엇인가? 선행과 희생, 참회, 율법준수를 통해서이다. 물론 변질의 가능성이 있지만, 구원의 방식에서 예수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일반적으로 다음의 3가지의 문제점이 들어났다.

프로테스탄트들은 가톨릭의 폐해에 한 저항이 끝나자 서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프로테스탄트 내부의 치열한 싸움은 종교라는 상품을 거래하는 일종의 시작경제를 탄생시켰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성경에 그 누구보다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성경을 공부한 주된 목적은 자신이 옳고 남은 틀렸다는(그래서 저항이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프로테스탄트가 가진 이러한 모습을 해결하기 위해서 포스트 프로테스탄트들이 늘어난다. 포스트라는 말은 '후기'라는 것도 있지만, '탈'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니 기존의 '저항하는 프로스테스탄트'라는 패러다임에서 '지지하는 프로테스탄트'로 넘어가는 것이 포스트프로테스탄트의 핵심일 것이다. 그렇게 하면 기존의 '남은자'로서 세상에 저항하는 태도에서 충성스럽게 이웃들에게 다가가는 '충성스러운 남은자'가 된다. 이것은 모두 '회북주의' restorationism의 일종으로 이 세상이 회복될 것이고 그 회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방법과 원리들을 찾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더욱 논의해보아야 한다.


http://www.gospel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75



기독교 자유주의와 기독교 보수주의 사이


원래 자유주의의 특징은 인간의 자유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모든 것들을 해방시키는 '고전적 자유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 오면서 모든 것들에 자유를 극대화하다가는 아나키스트가 되기 때문에 경제적 영역에서 더 자유를 확대하는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도 자유를 중심으로 인간과 사회, 미래와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주의자가 나타났다.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하나님의 영감으로보기보다는 신학천재들의 생각에 의한 잘쓰여진 글이라고 믿기도 한다. 또한 합리적인 의심을 통해서 과연 이것이 맞는가?라는 질문이 결국은 성경의 존재론까지 건드리게 된다. 그러면 성경이, 하나님이, 이 세상이 과연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고 볼 수 있는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어떻게 보면 성경무오설에 기반하여 보수적인 기독교가 발전하기도 한다. 성경은 절대적으로 참되며 성경의 모든 말씀에는 오류가 없다라는 주장에서 보수주의는 자유로운 질문을 억누르고 성경이 궁극적인 권위이며 개인은 표적인 원칙을 사용하면 안된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해석의 과정에서 내적인 합리성을 중시할 것인가? 혹은 하나님의 영감을 성경이 기록된 방식으로 똑같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해석해야하는가? 이런 고민들 가운데 양극단으로 치닫는 신앙의 흐름들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데 성경의 권위가 사라지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에도 기반을 잃게 된 자유주의자와 성경이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오만 혹은 오판으로 창조과학회처럼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20세기 초반 미국에서는 자유주의 기독교가 미국의 시민종교 역할을 했고 보수주의는 약세였다. 그런데 1960년대와 70년대에 여러가지 이유로 힘의 중심이 서서 이동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자유주의자들은 뒷자로 물러나고 곧 보수주의자들이 미국의 새로운 시민종교로 두각을 나타냈다. 1960년대부터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은 쇠락하고 많은 보수주의 집단이 성장하기 시자갷ㅆ다. 이런 힘의 이동으로 보수주의자들은 격려와 자부심을 얻은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애써 현실을 부인하며 괴로워하고 불안해졌다.


실용주의와 실존주의 사이에서 기독교의 존재론


최근들어 시대적으로 실용주의와 실존주의적 경향이 강해지면서 자신이 중요해지고 그러한 사회에서 '관용'은 자연스러워졌다. 누군가에게 전도를 한다는 것은 무례한 기독교를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무례하게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보수주의자들에 대해서 적대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내분은 기독교 자체가 갖고 있는 '사랑'의 기본적인 정신이 전혀 외부로 드러나지 않게 된다. 사실, 이러한 고민은 자유주의에서 '타당성'을 잃어버린 자신들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방식이기도 하다. 자유롭게 열려 있기는 하지만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합리적이고 시대에 타당해야한다'라는 명제를 지키기 위해서 '관용'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https://brunch.co.kr/@minnation/1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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