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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r 20. 2022

새로운 하나님, 새로운 복음주의

브라이언 맥클라렌_기독교를 생각한다 4장-6장

0. 들어가기


정통적이지 않은 관대함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관대하지 않은 정통은 더더욱 아니다. 정통적이기 때문에 관대함은 더욱 넓은 범주를 질 수 있다.  저자는 관대한 신앙을 주장하면서 자신이 이야기하는 관대함이란 배타주의라는 확실한 '그리스도신앙' 위에서 다른 종교를 포용하고, 다원적인 신론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관대함이 결국은 정통으로 귀결될 것이므로 오히려 넓은 마음을 가지고 담대하고 겸손하게 실천하자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말이 되고, 어떻게 보면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과연 기독교는 그런가? 이런 고민들을 해볼 수 있다.

https://brunch.co.kr/@minnation/2906



1. 예수를 통해 경험되는 새로운 하나님


성경의 남성적인 아버지와 아들 이미지도 가부장주의 혹은 쇼비니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기독교는 그런 모습을 자주 보여왔다. 남성 이미지 이면에는 두 가지 문제가 숨어 있다. 첫짼느 언어문제 자체이고 둘째로 성경 자체의 문제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자주 연관 짓는 남성우월주의와 가부장주의를 많이 해소할 수 있다. 예수님은 목소리가 크고 거친 사나이가 아니라 연약한 아기로 오셨다. 그분은 교권이나 정권이 없는 가난한 유대인으로 사셨다. 지배자의 교만이 아닌 자식의 복종, 반향적인 독립이 아닌 용감한 순정, 고통을 가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오히려 고난당하시는 사랑의 본을 보이셨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이미지는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거칠고 남성적이고 모진 남성 판사나 군주의 이미지와 사뭇다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의 의도는 하나님을 격하하거나 남성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낟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무심. 같은 초대 교회 성도들의 표현에 담긴 의미를 응축한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남성 여성의 문제를 떠나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할 때 감동은 실로 엄청나다.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을 '하나님A'로 홀로 군림하는 능력이나 정신 혹은 의지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교회는 하나님을 '하나님B'로 연합되고 영원하고 신비롭고 관계적인 사랑의 공동체이자 가족이며 사회이자 통일체로 본다.


하나님 A가 창조하셨을 법한 우주를 상상해보라. 지배와 통제, 제한, 복종, 획일성, 강압의 우주가 떠오른다. 하나님B가 창조하신 우주를 상상해보면 상호의존적 관계, 책임감, 성장, 새로움, 상호성, 자유의 우주가 상상될 것이다. 눈에보이는 우주와 우리가 믿는 우주 중 무엇이 먼저인지 알기는 힘들다. 하나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우리는 우주 B에 있으면 하나님B를 알아가고 있다.





2. 예수는 무엇을 구원했을까?


기존의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은 '구원'이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우리를 용서해준다는 것을 뜻했다. 또한 내가 이것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면 내가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론은 매우 일반적이고 한국에서는 보편적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을 반대한다. 기존의 구원론은 개인구원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데 철저한 소비주의적이고 자기중심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중심적이고 지옥 중심의 구원관에서는 예수님이 이기적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예수님을 통하면 구원을 영원히, 또 싸고 편리하고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개인구원에 집착하면 서로 구명보트를 뺏으려고 아웅대던 이기적인 타이타닉호 승객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배 전체의 구원에는 별 관심이 없다. 종교의 탈을 쓴 자기 중심적으로, 진짜 예수님께 호통을 들을 만하다. 개인구원이 유혹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깐 선보다는 천국을 더 원하게 된다. 하나님이나 이웃과 진정으로 화해하는 것보다는 지옥에서 탈출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게 된다. 많은 기독교인이 예수님을 자기 맘대로 늘리거나 줄이거나 뒤집었다. 이제 예수님은 이런 기독교인에게 구원을 받으셔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만든 혼란으로부터 스스로 구원하시고, 그 과정에서 기독교를 구원하실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관대한 정통신앙은 없다.



3. 선교적 기독교인인가?


선교적이라는 용어는 1990년대에 복음과 우리 문화 네트워크 때문에 생겨났다. 이후 이 네트워크에서 '선교적 교회'란느 책을 펴내면서 이 용어가 널리 알려졌다. 보수주의 진영은 '개인적인 구주' 복음에 집착한 반면, 자유주의 진영은 세상에 깊이 관여하면서 중요한 뭔가를 잃어 버렸다. 선교적 기독교라는 것은 교인을 한명 더 늘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곳이 선교적으로 예수님을 전하는 곳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환영하면 된다. 기독교인이 되지 않으려는 사람은 사랑하고 섬겨주면 된다. 하나님과 함께 그 사람의 선과 복과 평안을 추구하면 된다.


이러한 접근법에 따르면 목회와 선교의 구문이 사라진다. 목회와 선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인격을 기르려는 것은 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해보다는 선을 끼치기 위해서다.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것은 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다. 선교사와 선교현장 같은 단어도 불필요해진다. 모든 기독교인이 선교사며 몯느 것이 선교현장이 된다.



4. 왜 복음주의자인가?


복음주의자라는 단어는 매우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복음주의는 정초주의적으로 보면 이미 데이비드베빙턴의 논의를 기반으로 '복음주의'란 이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히려 복음주의는 오히려 복음이 그 속에 살아 숨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보통 복음주의는 종교우파와 동일시되고 있따.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복음주의자는 정치적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를 모두 포용하며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도 받아 준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복음주의자는 그 사이를 관대하고, 겸손하게 횡단할 수 있다.


보통 복음주의는 성경을 중시하고, 개인의 회심을 강조하며, 치밀함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믿게 되며, 자신의 믿음을 남들에게도 전해주는 것이다.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복음주의자는 하나님과 이웃, 우리의 설명을 향한 열정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진정으로 노래하고 기도하고 설교한다. 그래서 어쩌면 처음부터 반정초주의를 말하는 것이겠다. 복음주의자를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해보면 복음을 정체성으로 소중히 여기는 믿음체계나 교리, 행동을 넘어서 태도를 말한다.




참고_반정초주의 feat. 로티

정초주의란, 인간의 행위나 속성을 최종적으로 근거 지을 수 있는 어떤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정초(토대)가 존재한다는 입장을 가리킨다. 2장에서는 로티가 이러한 정초의 개념을 거부하게 되는 과정을 크게 세 단계로 구성하여 살펴볼 것이다.

로티의 반정초주의는 우선 (1) 인간이 자신의 시공간적이고 역사적인 한계를 완벽하게 초월할 수는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는 역사적인 조건이 어떤 사람의 생각을 전적으로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생각이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음을 의미한다.

(2) 이 같은 한계를 인정한다면, 우리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정초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역사적 조건으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정초의 개념이 정말로 초역사적인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며, 그것은 다만 역사적으로 유한한 인간에 의해 보편적 정초로서 규정되고 이름 붙여진 것이라 볼 수 있다. (3) 그렇다면 정초주의는 누가 정초를 규정하는가의 문제, 누가 정초를 규정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는가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이러한 권력이 모두에게 골고루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인식은 반정초주의의 기반이 된다. 남성, 백인, 서구인, 이성애자 등 현대사회에서 특권을 지니는 집단은 여전히 사회적으로 주변화되어 있는 여성, 유색인종, 비서구인, 성소수자 등에 비하여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정초라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훨씬 많이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보편적이며 중립적인 관점으로 실체화되는 것은 대부분 남성을 비롯한 특권적 집단의 입장, 즉 그들이 보기에 중립적인 것처럼 생각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여성을 비롯한 타자의 관점은 정초의 개념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배제되고 있으며, 이러한 배제의 상황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반정초주의적인 접근이 필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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