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맥클라렌_기독교를 생각하다 1장
보수주의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위해서 태어났다.
교리에 중심을 두기 때문에 도그마라고 부르면서도 '객관성'이 매우 높다. 주관적인 체험보다는 객관적인 신앙을 가지기 위한 보편화되고 공통화된 교리를 갖게 된다. 이부분이 카톡릭 신앙과 연결된다.
하나님의 무한한 연민과 용서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인간 불의가 사라지는 놀라운 역사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악을 덮고도 남았다. 십자가에서 인간악의 강력한 공포가 그보다 더 강력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비를 만난다.
보수주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예수님을 4가지의 비유로 말한다. 법적,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이 설명된다.
법적 비유 : 하나님은 법관이시고 인류는 유죄 판결을 받아 사형을 언도 받았다. 그런데 인류의 완벽한 대표이신 예수님이 온 인류가 받아야할 사형을 받으셨고 정의가 이루어졌다.
경제적 비유 : 하나님은 선한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종이다. 예수님의 몸값으로 자신을 지불하셨다. 매매행위, 가격, 지불 같은 비지니스 용어가 연결된다.
정치적 비유 : 인류는 왕을 반역했다. 인류가 용서를 받고 시민 자격을 회복하려면 회개하고 하나님의 듯에 다시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인류의 회개와 화해가 이루어지게 하셨다.
군사적 비유 : 인류은 외국열강(죄, 마귀, 죽음이 가장 흔한 적)에게 정복당했다. 이에 예수님은 외국 열강과 싸우다가 죽음으로 패하신 듯하다. 하지만 그 분의 죽음은 결국 적의 파멸로 이어졌다. 이 비유에서는 전투, 패배, 정복 같은 군사 용어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폭군인가? 아들을 죽이는 신의 폭력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세상에서 만들어 놓고 바꿀수는 없게 되는가? 전지하지 않거나 전능하지 않게 되는 것인가?
하나님과 공중의 권세잡은자들에게서 어떤 권위의 위계가 있는가?
코로나로 인해서 죽어가는 사람들과 건강한 사람들은 어떤 차이가 있어서 그렇게 되는가? 하나님은 편애하시는가?
로마 카톨릭은 의식을 가장 중요시 하면서도 교회를 강조한다.
보수주의 프로테스탄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개인을 구원하신 역사에 초점을 맞춘다면, 은사주의 교회는 예수님이 성령을 주심으로 계속해서 개인을 구원하신다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신다.
그에 비해 로마 카톡릭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일어나심으로 교회를 구원하신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기셨고 이로 말미암아 교회가 사회의 정의와 불의에 집중해야 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회적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교황과 사제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 교황의 권위는 그자체로 신성함을 가지게 된다.
특히 로마 카톨릭은 부활과 실천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을 전개할 경우 개인의 은혜와 하나님과의 만남은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교회가 타락할 경우 개인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못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사제나 교황은 과연 신성한가? 인간의 욕망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는가?
순복음교회라고 보통 이야기하는 오순절 주의는 육체성, 물질성, 현세성이 강조한다고 본다.
강력하게 임재하시는 성령님을 중심으로 기적적인 부분을 중요하게 여긴다. 따라서 당연히 체험을 중시한다.
보수주의 프로테스탄튼 예수님이 과거의 죽음으로 미래의 지옥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면, 오순절파 예수님은 강력한 현재의 임재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라서 성령충만한 사람이라면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오순절이라는 절기에 경험했던 것처럼 방언 혹은 미지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순절파에서는 구원받은 기독교인과 성령충만한 사람을 하나의 편으로 보고 구원을 경험하지 못하거나 성령충만한 사람을 다른 한편으로 보는 이분법이 존재한다.
현재성과 물질성 때문에 오순절주의는 번영주의에 빠질 우려가 많지 않은가?
개인과 집단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사회의 변화나 문제, 국가의 부도덕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문외하지 않은가?
경험을 어떻게 외재화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고백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구분하며 진짜라는 것의 강도는 어떻게 정하는가?
경험을 주시는 않아서 못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개인의 신앙이 부족해서인가?
동방정교회는 '예전'ritual을 강조한다. 활동적인 신앙보다는 정적인 신앙을 강조한다.
아들예수, 아버지 하나님, 도우시는 성령님의 방점에서 동방정교회는 아들 예수보다는 아버지 하나님을 강조한다. 그래서 창조를 더 강조하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을 신화로 보는 경향이 있다. 구원의 반대말은 우리의 육체가 썩어지는 것을 말한다면 사멸적인 존재로 남는 것을 말한다. 부활은 예수님을 본받아서 우리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게 된다고 믿는다.
십자가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부활은 창조의 기쁨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영원한 신성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의 본질이기 때문에 창조가 중요하게 된다.
예전을 강조하다보면 내면적인 변화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다.
상징을 사용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상징에 묶여 버릴 수 있는 한계도 존재한다.
구원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룰 수 없다는 문제는 어떠한가?
성경이나 기독교 교리를 이성적으로 받아들인다. 이성적으로 합리적이지 않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합리적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 성경에서 등장하는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이성의 눈으로 볼 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럼 남아 있는 것은 '도덕과 윤리'가 남았고 그것을 이성적으로 따를 것인지가 중요하다.
해방신학과 다른 부분은 인격적인 도덕이라는 부분이고 구조적인 악에 대해서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트의 특징이다.
인간은 선한존재이고 얼마든지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사회는 무한히 진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 칼바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근대의 기획'이라고 보고 한계를 말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과 치유, 정의, 연민의 행위는 온 세상에 복도니 삶의 방식을 제시해준다. 우리 임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본보기로 온 세상, 그러니까 우리의 개인적 관계 뿐 아니라 우리 세상의 정치 구조와 문화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실제로 발생한다. 성경에서도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셨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는 비 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인데 정말로 이것은 신화인가?
이해되지 않는 이유가 나의 이성의 한계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나의 잘못인가?
신앙과 이성의 연결은 불가능한 것인가?
재세례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이다. 예수님은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
재세례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 사건'이 아니라 십자가의 삶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용서받게 하신 것보다는 오히려 삶의 모범으로서 보여진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을 주시는 예수님의 삶이라는 부분에서는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연결되면서도 십자가 사건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부분에서는 보수주의와 연결된다.
역사적인 예수라는 관점에서 실제로 가르쳐주고, 실제로 삶 속에서 인격적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재세례파는 구속이론, 성경에 대한 문자적 비유와 해석, 성찬식 같은 의식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에서 이웃과의 삶 가운데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느 것을 소명으로 본다.
인간을 보는 관점에서 오직 삶 자체만 있는가? 다시 말하면 일상의 삶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구조와 방향, 정치와 문제들에 대해서 실제로 바꿔야 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가?
예수님이 실제적으로 구원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해방신학에서 강조하는 것은 '사회정의'와 '구조주의'이다.
배제당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정치적인 활동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당파성을 가지고 있다.
모든 신앙은 보편적이지 않는다.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일 수 없고 항상 편을 들 수 밖에 없다.
그럼 성경에서는 당연히 가난한 자를 위해서 편을 들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끄시되 억압 체제에 맞선 제자들의 행동에 특히 관심을 두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일하신다. 예수님의 죽음은 비폭력 저항으로 당시의 부패한 종교 체제와 폭력적이고 불의한 정치 및 경제 권력층에 맞섰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비단 해방을 위한 것인가?
정치적이고 억압적인 구조가 그렇게 심하지 않은 나라들에서 신앙은 방향성이 뚜렷해지지 않게 되는건 아닌가?
보편적인 신앙은 정말로 불가능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