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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Sep 06. 2020

데이비드베빙턴의 4대 기둥 재해석

텍스트를 넘어 컨텍스트로_최종원 교수

0. 들어가기


한국기독교 참 욕 많이 먹는다. 내가 봐도 한심할 때가 많다. 그런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항상 그 자체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일 때가 많다. 그리고 어떤 것이 유지되는데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든든하게 받혀주고 있는 것들이 힘을 가지고 있을 때이다. 한국교회는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은 부분에서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가지는 여전히 교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남모르게 돕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신학적으로도 교회가 쌓아온 역사와 전통은 그리 쉽지 않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나 하이델베르크 신조와 같이 신학적으로도 깊이와 의미를 더하는 부분이 매우 많이 있다. 좋은 것들이 도매급으로 모두 이단시 되는 것이 가끔 짜증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기독교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개독교가 된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와 어떻게 하면 그것을 극복하고 교회의 진정한 순기능을 이 사회속에서, 이 컨텍스트 속에서 구현할 것인가이다.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과 최종원 교수님의 '텍스트를 넘어 콘텐스트로'라는 책을 읽고 있다. 생각해볼 만한 주제들이 참 많은데, 그중에서 특히 데이비드 베빙턴의 '복음주의 4대 구조'에 대한 해석은 매우 좋은 텍스트였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전에 이재근 교수님께 배웠던 데이비드 배빙턴의 논의도 넣어 놓았다. 아마도 이 책의 내용에 따라서 텍스트에서 컨텍스트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베빙턴의 논의도 컨텍스트에서 다시 해석되어야 하겠다.


1.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복음주의라는 이름으로 폴 스티븐슨의 일터 신학이 이랜드와 만나고 진보적 사상가 짐월리스가 명성교회와 만나고, 창조과학이 한동대에서 꽃피는 현실에서 복음주의란 어떤 의미를 지닐까?

복음주의는 1930년데 있었던 '성경은 오류가 없는가?'라는 고등비평에서 시작된 성경오류에 대한 접근에서 3가지의 흐름 중에 하나이다. 한가지는 성경은 축자영감설에 의한 하나님이 직접계시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근본주의'적 흐름이다. 다른 반대쪽은 성경은 오류투성이긴하지만 그것도 인간이 기록한 역사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자유주의'적 흐름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복음주의가 있다. (이 부분은 내가 이전에 공부했던 부분이라서 '역자주'처럼 사족을 붙였다.)

한국에서 복음주의른 정의할 때 가장 대표적으로 인용하고 있느 것은 '복음주의 4대 강령'일 것이다. (나는 여기서는 베빙턴의 4대 기둥'이라고 부를 것이다.)

'베빙턴 테제'라고도 불리는 이 강령은, 영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베밍턴이 '영국의 복음주의 Evangelicalism in Modern Britain'에서 복음주의의 핵심을 성경주의, 회심주의, 십자가 중심주의, 행동주의라고 표현한 데서 왔다.


2. 베빙턴 테제


베빙턴의 이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빙턴의 테제는 그의 책을 통해 듣기보다 그의 테제를 인용한 다른 책을 통해서 더 많이 접하게 된다. 그러니 베빙턴 테제가 출현한 맥락context에 대한 고민없이 특정한 정의를 수용하는 것을 복음주의라고 보는 오해를 낳았다. 이러한 오해의 시작에는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의 복음주의 관련 책들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에게 베빙턴은 같은 문화적 콘텍스트에 있던 사람이다. 그러니 굳이 부연설명을 하지 않았도 맥그래스 자신이나 영미권 독자들은 베빙턴 테제가 태동한 문화적 맥락을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맥락은 사라지고 텍스트만 남은 것이 아닌가?

베팅턴은 자신의 책에서 '복음주의'라는 말은 보다 최근에 생겨난 운동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1730년대 이후 영국에서 생겨난 대중적인 프로테스탄트 운동'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 이전의 프로테스탄트 전통과는 아주 다른 새로운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복음주의의 태동하는 context


1730년대라면 유럽의 어떤 시기를 말하는 걸까? 영국에서 존 웨슬리가 탄생한 것이 1703년이다. 그러나 1730년대에는 웨슬리의 메소디스트 운동이 한창 일어날 때이다.

영국의 남동쪽 도버해협 건너 프랑스는 어떠한 시기였을까? 계몽주의의 영향력이 확대된 시기이다. 그로부터 반세기 후 유럽은 프랑스 혁명이라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이 때문에 베빙턴은 복음주의를 계몽주의의 프로테스탄트 버전이라고 말한다.


프랑스 혁명으로 대중들의 시민의식은 급격히 성장한다.


영국의 메소디스트 운동이나 프랑스 계몽주의가 공유하고 있는 한가지 공통점은 대중운동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물론 프랑스혁명에서 그 대중의 범주가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도 논쟁거리지만, 영국과 프랑스 귀족과 성직 중심의 절대군주 시대에 그 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대중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일어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지점이 한국 기독교에서 놓친 부분일 수 있다. 맥그래스는 복음주의운동이 미국의 맥락으로 옮겨지면서 반지성적 근본주의에 대응하는 지성운동으로 진화된 것으로 보았으며, 한국 사회에서도 복음주의운동은 지성운동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됬다.

하지만 명확하게 구분해야 할 점이 있다. 베빙턴의 테제에 등장하는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사회 엘리트 계층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복음주의 운동을 지성운동이라고 부른다면 큰 오산이다. 영국 복음주의자들이 가진 자의 위치에서 가부장적이거나 온정적인 자세로 대중에게 접근했다는 비판을 받을지언정 그들의 운동이 지성운동이었던 적은 없다. 웨슬리의 메소디스트 운동이 지나치게 열광적이며 세련되지 못한다고 비판받은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맥락을 오해한 것이다. 흔히 규범적으로 제시되는 4대 강령에 대해 베빙턴이 어떤 식으로 언급했는지 보아도 맥락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는 기독교가 이미 가지고 있던 여러가지 신념으로 복음주의라는 틀을 만든 시기이다. 그 이전에 존재했던 특징은 회심주의, 성경주의 십자가중심주의이다.

베빙턴은 4대 강령의 다른 특징인 행동주의는 1730년대의 각성운동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저 복음주의 4대 강령을 나열하는 것과 베빙턴이 '행동주의'의 등장을 이전의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의 흐름과 다른 흐름이라고 표현하는 것 사이에는 매우 큰 간극이 생긴다.


맥그래스와 복음주의


지금 우리는 복음주의 이해에서 행동주의는 어느 지점에 서 있을까? 맥그래스의 논의를 따라가 보자.

그는 '기독교의 미래'에서 행동주의를 '복음전도와 다른 형태의 기독교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전도와 제자도 프로그램에 열심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계몽주의의 프로테스탄트 버전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빈약한 설명이 아닐까? 그렇다. 이 규정은 충분하지 않을 뿐더러 오해를 줄 수 있다. 행동주의라는 것도 복음전도나 제자도 프로그램으로 읽힐 여지가 많다.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복음주의는 이러한 프로그램이 잘 구축되어 잇는 한국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소개되고 소비되어 온 것이다.

이 지점이 바로 한국 복음주의가 길을 잃은 것은 지점이 아닐까? 복음주의를 기독교 교리체계를 열심히 연구하고 학습하고 그것을 열심히 전도하는 것으로 제한해 버린 것이다.  

또한 한국 복음주의가 과도하게 회심주의와 성경중심주의에 초점을 두다 보니, 복음주의를 칼뱅주의나 알미니안주의 등 다른 신학체계중 하나로 인식하는 면이 없지 않다.

이것이 곧 한국 복음주의가 무의식중에 연결시켰던 지성 운동의 한계이기도 하다.

콘텍스트에 대한 부족한 이해가 초래한 공백을 지적 정합성을 추구하는 텍스트로 끊임없이 채워가고 있는 있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과학마저 복음주의운동 내에서 자신들의 이념체계로 종속시키고자 하는, 너무나 진지하지만 서글픈 시도인 창조과학이 여전히 활개를 치는 것이다.

더군다나 베빙턴은 영국 복음주의에서 행동주의 이외의 세 가지 규범 역시, 이전에 존재하기는 했지만 통일된 흐름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영국 복음주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웨슬리의 사상도 청교도 전통과는 무관한 고교회 전통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적어도 베빙턴의 맥락에서 복음주의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규범은 '행동주의'라고 할수 있다. 이 맥락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영국의 복음주의는 복음을 '사회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고자 하는 시도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복음이 가지는 공공재로서의 성격을 의미한다.

따라서 베빙턴이 주장하는 의미에서 볼 때 복음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행동주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3. 복음주의 재정의


context에서 시작하기


이제 복음주의가 그 이전과는 다른 정체성으로 등장하게 된 '행동주의'를 고민해야 한다. 복음주의자는 인간을 차별하고 불평등을 조장하는 사회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제시하는 인간관에 반하는 배제, 차별, 혐오에 맞서야 한다.

사회개혁에 힘을 보태야 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복음주의자라면 마땅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익나의 존엄을 지키는 일을 지지해야 한다. 여성과 외국인, 다른 종교, 소수자 등에게 가해지는 모든 종류의 차별을 복음의 이름으로 거부해야 한다.

복음주의자라면 토지 소유 유무를 통해 확대되는 불공정한 부의 편중에 반대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로 부터 '세상물정 모르는 성인군자 같은 소리만 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는 사회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아노미와 문화지체 현상을 겪고 있다. 인권이나 평등, 복지 등 사회개혁을 위해 제시되는 아젠다마다 혼란스러워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다.

적어도 인간을 평등하게 대우하는 차별없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에 대해 종교적 이념을 들어 반대하는 이들이라면 복음주의자라는 명칭을 떼어내는 것이 좋겠다.

그들은 칼뱅주의자, 웨슬리주의자 등으로 불릴 수는 있겠으나 역사적 복음주의자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맥락없이 사용하는 '복음주의', '복음주의자'라는 말을 이제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한다.

복음주의를 신학적 경계로 범주화하는 것은 역사적 복음주의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아닐 수 있다. 적어도 18세기 영국이라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출발한 '베빙턴 테제'에 대한 해석을 신학자들이 독점한다면 시대착오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주의에 대한 베빙턴의 정의를 21세기 한국의 콘텍스트에서 재해석해야 한다.


1) 성경주의

성경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것이 성경주의를 따르는 지표일까?

성경의 문자적 완결성을 믿는다는 고백하는 것보다 성경의 가르침, 성경을 바라보는 인간관, 세계관이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실천적인 고백이 복음주의에서 말하는 성경주의여야 한다.


2) 십자가중심주의

십자가 중심주의는 어떤가?

우리가 십자가 대속을 받아들이느냐, 부활의 역사성을 믿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신학적 논제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역사적 복음주의 맥락에서 볼 때 이 논쟁에 머무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시밪가를 삶의 중심에 놓고, 십자가를 따르는 삶을 결단하는 것이 복음주의여야 한다.


3) 회심주의

회심주의에 대한 해석 역시 복음을 수용하는 개인적 회심을 넘어 사회적 회심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사회적 회심이란 복음이 가지는 공공재의 가치를 발견하고 우리의 삶이 지향하는 바가 그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변화됨을 의미한다.

즉, '예수 믿고 부자 되었다'는 극적인 간증을 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변화를 넘어서 복음으로 사회의 어두운 곳을 바꾸어 가야겠다는 실천적인 고백이 동반되어야 한다.


4) 행동주의

행동주의 역시 재고가 필요하다.

오늘 우리에게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교회 내의 제자도와 복음전도라는 어휘로 표현한 20세기 영미의 행동주의를 적용하는 것은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18세기 상황에서 윌버포스와 클래팜 섹트가 주장한 사회참여가 우리에게 더 절실한 상황이다.


https://unibranding.tistory.com/380


0. 복음주의의 미래


복음주의마저 교리적 체계 혹은 지성의 관점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복음주의를 사회 바깥으로 더욱 몰아갈 뿐이다.

복음주의가 고민해야 할 것은 교리보다 공적 영역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이다.

그러므로 복음주의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아가느냐로 규정되어야 한다.

복음주의의 존재감은 복음의 공공성을 이 사회 속에서 실현하는 것에서 드러나야 한다. 의인 명이 없어 소돔과 고모라라는 멸망했다. 조금 과정해서표현하자면, 프랑스가 혁명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것을 영국 사회는 스무명 남짓한 클래팜 성자들의 공로로 성취했다.

우리의 목적은 복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 활력이 사라지면 이데올리기만 남는다. 미국 복음주의가 보여주는 것처럼 보수 기독교와 자연스레 등치되는 구조로 굳어지고 만다.

맥락은 사라지고 글자만 남는 화석화이다. 이제 복음주의자의 고민은 '어떤 이념을 지킬까'가 아니라 '복음의 가치를 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실현할까'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관점, 회심에 대한 관점,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논쟁하기보다는 이 사회 속 공공재로서 복음의 성격, 복음이 지향하는 인간애를 실현하는 것을 방해아흔 시도를 경계해야한다. 그것이 실현될 때 우리는 다시 자랑스럽게 복음주의자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민네이션, 생각


역사 속에서 복음주의 출현을 지켜보는 것은 사뭇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지식의 부족은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들에 대한 맹신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역사적인 맥락에서 복음주의를 다시 본다는 것은 내가 이전에 알고 있는 '복음'과 '복음주의'사이의 간극을 해결하는 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보수적인 한국교회를 20년 다니면서 지성적으로도 부족하고, 교리적으로도 불일치하는 모습을 많이 보면서 교회개혁을 위해서 공부하기도 했고, 기도도 했고, 청년들과 함께 밤을 새우며 금요철야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 읽은 이 텍스트처럼 문제의 원인을 그 당시의 사회상과 그 당시의 컨텍스트 속에서 불러오지 않는 이상 대안을 찾는 활동은 시작부터 문제가 있을 것 같다. 분명하다. 문제의 대안은 문제를 제대로 정의해야만 실효성이 생기는 것이다.

막연하게 데이비드 베빙턴의 4대 기둥을 공부했던 시간을 지나서 다시 한번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복음주의는 결국은 행동주의라는 결과로 나타나는데 그 원천은 십자가와 회심과 성경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회의 부조리들을 어떻게 바꾸고,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부터 사회적인 차원까지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간다.


https://www.youtube.com/watch?v=4OFCCFgVU6E







https://brunch.co.kr/@minnation/593





책소개


“텍스트에 갇힌 교회여, 광장으로 걸어 나오라!”
-성경 텍스트와 ‘지금’ 한국 사회라는 콘텍스트 사이의 다리 놓기

“오직 성경”, “오직 예수”를 부르짖는 한국 교회가 지금은 배제와 혐오의 중심에 서고 사회적 질타의 대상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저자는 한국 교회가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갇혀 그 텍스트가 구현되어야 할 우리 사회를 제대로 읽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렇다면 텍스트에 갇힌 교회를 회복시킬 진정한 힘은 어디서 오는가? 이 책은 모든 것을 성경으로 환원하는 신학적 사유를 넘어 인문학적 상상력과 시선으로 교회와 사회를 바라볼 때 교회 개혁과 변화가 가능하며, 그 가능성은 사람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쌓아 가는 데서 키워진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그 힘을 키우는 독법을 제시하는 한편, 인문주의의 시선으로 한국 기독교에 성찰점을 줄 만한 여러 역사의 사례를 검토하여 한국 기독교가 직면한 난제들을 헤쳐 나갈 길을 제안한다. 한국 교회의 현실과 관련한 주제들을 종횡무진 동서양 2,000년에서 끄집어내어, 성경의 텍스트와 한국의 콘텍스트가 만날 다리 놓기를 일관되게 시도한다.



목차


프롤로그: 인문주의로 교회를 읽는 이유

01 텍스트를 넘어서 콘텍스트를 읽다

나는 왜 인문주의자인가
교회여,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를 고민하라
한국 복음주의에 대한 성찰
부활의 현재적 의미
면벌부는 살아 있다
이제는 루터를 보내야 할 때

02 한국 교회를 넘어서 보편 교회를 고민하다

명성교회 세습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
대중독재, 일상적 파시즘, 그리고 대형 교회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목회를 성직이라 믿는 이들에게
대형 교회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17세기 유럽 교회와 21세기 한국 교회의 평행이론

03 배제와 혐오를 넘어서 포용의 공동체를 향하다

‘가나안 성도’를 재고한다
그들만의 유토피아, 그리고 배제와 혐오
배제와 혐오가 생산해 낸 괴물
어떻게 이슬람은 혐오의 대상이 되었는가
종교인 과세와 차별금지법
개인의 영성을 넘어 형제애의 영성으로

04 개인 신앙을 넘어서 공적 신앙으로 살다

믿음과 불신 사이에 선 경계인
이제 인본주의자가 되자
개인의 욕망으로부터 소명을 해방하라
일상화된 엄숙주의를 넘어
그리스도인이여, 비판적 성찰을 하라
포스트모던 시대, 기독교 역사의식은 유효한가

에필로그: 개인을 넘어 공공을 지향하는 신앙





최종원


유럽 중세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이며 캐나다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교수이다. 경희대학교에서 회계학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서양사를 공부하고 영국 버밍엄대학교에서 중세 말 잉글랜드의 대학과 종교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한국 교회 회복의 시작이라고 믿는 그는 인문학적 시각과 통찰로 한국 교회를 읽어 나가는 글쓰기와 강의를 하고 있다. 특히 초대 교회로부터 근현대 교회의 역사를 신학적 관점이 아닌 역사적 관점으로 풀어 나가는 ‘교회사 다시 읽기 3부작’을 기획하고 집필 중이다. 그 첫 책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홍성사)는 <국민일보> ‘2018 최고의 책’과 <크리스채너티투데이CTK> ‘2019 도서대상’에 선정되는 등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더불어 중세부터 근현대를 포괄하는 유럽 지성사의 흐름을 오늘 한국 교회의 상황과 연결하여 인문주의적 성찰점을 찾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왜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했을까?》(자음과모음), 《서양문화사강의》(공저, 형설출판사)를 썼으며, 《12세기 르네상스》(심산문화), 《UBC 열왕기》(공역, 성서유니온)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15세기 옥스브리지의 재속 칼리지 설립 운동”, “위클리프와 옥스퍼드의 롤라드파”, “천국
을 향한 약속어음─중세 유럽 면벌부 이론의 변화 연구”를 비롯한 중세의 대학, 면벌부, 위클리프와 롤라드 운동 등에 대한 논문을 10여 편 발표했다. 캐나다의 대자연 속에서 캠핑과 카약킹을 즐기는 자연주의자이며,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와 조우하는 페이스북 글쓰기를 통해 대중과 활발하게 소통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tl6nyFFr_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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