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라는 책은 랑시에르가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을 정리한 책이다. 랑시에르는 불화의 배경를 플라톤의 아르케정치,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사정치, 마르크스의 메타정치로 나눈다. 기존에 정치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개념들에 대해서 불화하면서 '몫 없는 자들의 몫'을 이야기한다. 사실 '몫'이라는 개념은 스승인 알튀세르가 이야기했던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이득을 얻는 이들의 몫을 비판한 것이다. 대화에 있어서 '불화'라는 개념은 같은 이야기를 하지만 대화상대로, 주체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불화가 발생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민네이션, 생각 언제나 시작은 기존에 이미 구조화되어 있는 것을 깨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이 사라진 후에 도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잠재태는 가능태가 사라진 후에 등장하는 유령과 같다. 진짜 변화를 이루어 낼 수 있으려면 자신의 생각에 체계가 필요하고, 생각이 구체화되어 현실에 나올 때 그에 따른 방향성이 맞아야 한다. 삶이란 것은 언제나 철학을 배제할 수 없다. 어떻게 철학할 것인가를 계속 노력해야 한다. 스스로 이해한 것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설명을 듣고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생각과 방법으로는 정리가 힘들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민네이션, 이해 랑시에르가 이야기하는 불화의 배경은 기존의 정치체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기존의 정치체제는 세가지로만 구분이 되는데 플라톤이 이야기했던 아르케정치는 원리가 있고 그 원리를 지키기 위한 사회 혹은 국가가 지배를 한다는 식의 귀족정을 이야기 한다. para라는 뜻은 유사하다는 뜻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para politics라는 개념을 가지고 오면서 정치적인 구조는 있지만 실질적인 평등이나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실제로 정치체제의 3가지 방식은 각 나라와 공동체 혹은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마지막은 마르크스의 메타정치이다. 이 부분은 알튀세르와도 연결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상부구조화 하부구조로 세상을 나누고 상부구조를 타도하는 방식으로 하부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부구조는 지배하기 위해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피지배자들은 뭉치지 않으면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메타정치의 입장에서는 '계급'이라는 이해관계가 꼭 포함된다. 이러한 기존의 정치체제가 동시에 가지고 있는 부분은 바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존재하고 알아듣는 사람과 못알아듣는 사람이 생기고, 특별히 무엇인가를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이 존재하게 된다.
구분의 방식은 항상 일반화의 오류를 담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어떤 구분은 항상 불평등에 기인해 있다. 사회적인 제도들은 불평등을 축소시킬 수도 있지만, 불평등을 발전시킬 수도 있다. 의지가 자유를 만들어내지 않는가? 오히려 의지는 평등하지 않는가? 의지로 인해서 자유가 보장되는게 아닌가?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고, 평범한 것들이라는 것은 의지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무지한 스승'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진태원 교수의 '랑시에르' 설명
누군가가 <불화>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중요한 개념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나는 “몫 없는 이들의 몫”(part des sans parts)이라는 개념을 들겠다. 그는 이 개념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기존의 이해 방식을 일신했으며, 진보 정치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는 개념의 독창성은 몇 가지 측면에서 해명해볼 수 있다. 우선 이 개념은 민주주의와 정치를 동일시할 수 있게 해준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양 정치학의 역사에서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정치체제 중 하나로 간주되어 왔다. 곧 그것은 한 사람이 통치하는 군주정이나 소수가 통치하는 귀족정과 달리, 모든 시민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다수 대중이 통치하는 체제로 이해되었다. 이렇게 이해된다면 민주주의는 다른 여러 정치체제와 경쟁하는 하나의 정치체제가 될 것이다. 반면 랑시에르는 단도직입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에 반대한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치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르케 논리와의 단절, 곧 아르케의 자질로 지배를 예견하는 것과 단절하는 것이며, 특정한 주체를 정의하는 관계 형태로서의 정치체제 자체이다.”(‘정치에 대한 열 개의 테제’ 중 4번째 테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걸작 ‘불화’ 인정받으며 눈길 재산과 혈통 따른 통치 거부 못 가진 ‘을’들 정치 주체로
민주주의가 하나의 정치체제가 아니라 아르케 논리와 단절하는 것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리스어로 “시초”나 “원인” 또는 “지배”를 뜻하는 아르케(arkhe)는 정치 공동체가 어떤 합당한 근거나 원리에 따라 질서를 이루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 공동체의 아르케를 추구한 것은 두 가지 대립항을 피하기 위해서다. 하나는 공동체가 단순한 산술의 원리에 따라 구성되는 것을 막는 일이다. 솔론 이전의 고대 아테네에서 실제로 작동하던 이러한 산술의 원리에 따르면 공동체는 더 많은 부를 지닌 사람이 적은 부를 지닌 사람에 비해 더 많은 정치적 권리를 가지며, 심지어 채무를 지닌 사람들을 노예로 삼을 수도 있다. 두 사람에 따르면 이것은 정치 공동체를 질서 짓기 위한 원리로 적절치 않다. 또한 이들은 민주주의에 특징적인 안-아르케(an-arkhe), 곧 아르케 없음, 원리 없음의 사태를 피하고자 했다. (an-arkhe는 무정부(anarchy)의 어원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들이 보기에 민주주의는 정치 공동체에 고유한 아르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정치적 문제에 관여할 수 있고, 대중이 원하는 바에 따라 마음대로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곤 한다. “악은 (…) 민회에서는 어떤 구두장이나 대장장이든 일어서서 배를 움직이거나 성을 쌓는 법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심지어 공동선을 위해 이 배나 성을 사용하는 정당하거나 부당한 방식에 대해서도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불화>) 이것은 합리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무질서하고 잘못된 공동체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기하학적 비율에 따라 공동체의 성원들에게 돌아갈 몫을 정함으로써 공동체의 아르케를 세우고자 했다. 이것에 따르면 부유한 이들은 부에 따른 합당한 몫을 받고, 유덕한 귀족들은 그들의 고귀한 혈통과 유덕함에 따른 몫을 받으며, 재산도 혈통도 지니고 있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자유 시민이라는 몫을 지닌다.
랑시에르는 이처럼 공동체에 고유한 아르케를 설정하려는 것이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의 “정치철학”을 특징짓는 논리라고 간주한다. 그에 따르면 “정치철학”의 진정한 목표는 실은 민주주의, 곧 정치 그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아르케의 질서, 다시 말해 기하학적인 몫의 분배 질서는 결국 보통 사람들에게 허울뿐인 자유 이외에는 아무런 정치의 몫도 남겨두지 않는 것이며, 몫 없는 이들의 배제를 본래적인 정치질서로 정당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에게 정치란 아무나와 아무나의 평등일 뿐이며, 정치적인 참여에는 아무런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 이 때문에 랑시에르는 선거가 아니라 추첨제야말로 민주주의에 적합한 제도라고 주장한다. 반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하는 아르케의 원리에 따르면, 어떤 일에는 자격이 필요하며 그 일에 합당한 능력을 지닌 사람에게만 그러한 자격이 부여된다. 따라서 아르케의 원리에 따르면 아무런 자격이나 능력도 없이 아무나 정치를 할 수 있게 만드는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아르케 질서에 “잘못”을 범하고 그것을 “왜곡하는” 일이다. 반면 랑시에르에 따르면 아르케의 원리야말로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인 데모스(demos)를 배제함으로써 민주주의에게 “잘못”을 가하고 그것을 “왜곡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르케의 질서와 민주주의, 또는 치안과 정치는 “잘못”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해 있는 셈이다. 랑시에르는 고대 아테네에서는 민중으로서의 데모스가 이러한 잘못을 표현하는 집단이었다면, 근대에는 몫 없는 이들로서의 프롤레타리아나 여성 또는 이주자 등이 이러한 의미의 잘못의 계급, 잘못의 집단이라고 본다. 아르케에 근거를 둔 치안은 이러한 잘못의 계급을 배제하는 반면,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잘못의 계급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랑시에르에게 주체화란 치안 질서 속에서는 은폐되어 있는 이러한 잘못이 잘못으로 드러나고, 몫 없는 이들이 자신의 몫을 획득하는 과정을 뜻한다.
“정치적 활동은 항상, 치안의 질서에 대해 원칙적으로 이질적인 어떤 전제, 곧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는 전제를 실행함으로써 치안의 질서의 감각적 나눔을 해체하는 드러냄의 양식이다.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는 전제는 최종 심급에서 질서의 순전한 우연성, 말하는 아무나와 다른 말하는 아무나 사이의 평등성을 스스로 드러낸다.”(<불화>)
그렇다면 랑시에르가 말하는 몫 없는 이들의 몫이란, 단순히 분배나 재분배와 관련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 공동체를 정치 공동체로 만들어주는 토대 아닌 토대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왜 민주주의에서는 부자가 아니라, 또 왜 능력 있는 엘리트나 덕망 있는 현자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정치의 주체로 간주되는 것일까? 그것은 모든 사람의 능력이 평등하거나 본성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아무나와 아무나의 평등이라는 전제가 성립되지 않을 경우 본성과 자격에 따른 통치, 곧 금권정치나 과두제 정치가 군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평등 전제에 기반을 둔 몫 없는 이들의 몫은 빈민을 빈민이 아니라 데모스로, 시민으로 만들어주며, 재벌이나 대통령, 국회의원도 하나의 데모스로, 시민으로 만들어준다. 몫 없는 이들의 몫은, 이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이들, 익명의 을들을 공동의 정치적 주체로 (재)구성하는 원칙이자 그 실현 과정이다.
랑시에르, 주체의 문제
I. 랑시에르와 주체화의 문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1940~)는 파리 고등사범학교 시절 루이 알튀세르의 제자였으며, 알튀세르, 발리바르, 마슈레 등과 함께 유명한 『자본을 읽자』(Lire le Capital, Paris: François Maspero, 1965; 진태원 외 옮김, 『자본을 읽자』, 서울: 그린비, 근간)를 함께 저술했다. 그 이후 마오주의 운동에 참여하여 1974년 『알튀세르의 교훈』(La leçon d’Althusser, Paris: Gallimard, 1974)이라는 저작에서 알튀세를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독자적인 사상의 길을 개척하게 된다. 오랫동안 19세기 노동자들이 남긴 문헌들을 연구하여 『프롤레타리아의 밤』(La nuit des prolétaires: Archives du rêve ouvrier, Paris: Fayard, 1981; 안준범 옮김, 『프롤레타리아의 밤』, 서울: 울력, 근간)을 출간했으며, 『무지한 스승』(1985),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1990: 재판 1998), 『불화』(1995) 같은 저작들을 저술함으로써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랑시에르는 주체화라는 개념을 사상의 중심 개념으로 놓고 있는 현대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푸코 사상의 영향 속에서 주체화라는 개념을 받아들였지만, 푸코와는 상당히 다른 방향에서 이 개념을 발전시켰다. 푸코가 일차적으로 윤리적 문제설정에 따라 주체화 개념을 고안한 것에 비해 랑시에르는 철저하게 정치적인 주체화 개념을 고수하고 있다. 또한 푸코가 주로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를 통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서구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주체화 양식을 계보학적 관점에서 추적한 것에 비해, 랑시에르는 고대 그리스ㆍ로마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불변적으로 존재하는 평등의 논리 대 치안의 논리라는 대립 노선에 입각하여 주체화 개념을 사고하고 있다. 랑시에르에게 주체화 개념은 치안 논리와의 단절을 가능하게 해주는 장치라는 점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II. 치안, 정치, 잘못
랑시에르의 주체화 개념은 한편으로 정치와 치안(police)의 구별(및 대립)에, 다른 한편으로 치안 질서의 중심에 존재하는 잘못(tort)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랑시에르는 우리가 흔히 정치라고 부르는 활동이나 영역은 사실은 엄밀한 의미의 정치가 아니라 치안이라고 규정한다. 곧 그에 따르면 “집단들의 결집과 동의, 권력의 조직, 장소들 및 기능들의 분배, 이러한 분배에 대한 정당화 체계가 이루어지는 과정들 전체”(J. Rancière, La mésentente, Paris: Galilée, 1995, p. 51)가 곧 치안이다. 그리고 치안의 본질은 공권력이나 법 체계 같은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의 짜임(configuration du sensible)이다.
치안은 무엇보다 행위 양식들과 존재 양식들 및 말하기 양식들 사이의 나눔을 정의하는 신체들의 질서이며, 이 질서는 신체들이 그것들의 이름에 따라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과제를 부여받도록 만든다. 이 질서는 볼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의 질서로서, 어떤 활동은 가시적인 것으로 다른 활동은 비가시적인 것으로 만들고, 어떤 말은 담론에 속하는 것으로, 어떤 말은 소음에 속하는 것으로 알아듣게 만든다. 예컨대 전통적으로 노동의 장소를, 공적 영역이라 불리는 것에 고유한 보기 및 말하기 양식에 의해 규제되지 않는 사적 영역으로 만든 것이 치안의 법이다.(같은 책, p. 52)
이러한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랑시에르는 푸코에게 충실하면서도 그와 다르다. 그가 푸코에 충실한 이유는 일종의 예속화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치안을 국가의 공권력이나 법 등과 같은 공적 영역 내지 상부구조에서 찾지 않고, 신체들의 질서 및 그것들을 규정하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푸코가 규율권력을 법이나 제도를 지탱하고 있는 은밀한 하부구조로 간주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관점이다. 더 나아가 푸코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우리가 살아가고 우리가 느끼고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Pierre Dardot & Christian Laval, La Nouvelle raison du monde: Essai sur la société néolibérale, Paris: La Découverte, 2009, p. 5)을 규정하는 새로운 삶의 규범인 것과 마찬가지로, 랑시에르에게도 치안은 우리의 “행위 양식들과 존재양식들 및 말하기 양식들”을 규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푸코와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에 따라 치안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그가 치안을 정치와 대립하는 것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치안이라는] 감각적 짜임과 단절하는데, 이러한 짜임에서는 부분들 및 부분들의 몫 또는 몫의 부재가 그 짜임에서 아무런 자리도 갖지 못한 어떤 전제, 곧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는 전제에 의해 정의된다. 이러한 단절은 부분들과 몫들, 몫들의 부재가 정의되는 공간을 다시 짜는 일련의 행위들에 의해 명시된다. 정치적 활동은 어떤 신체를 그것에 배정된 장소로부터 이동시키거나 그 장소의 용도를 변경시키는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은 보일 만한 장소를 갖지 못했던 것을 보게 만들고, 오직 소음만 일어났던 곳에서 담론이 들리게 하고, 소음으로만 들렸던 것을 담론으로 알아듣게 만드는 것이다.(J. Rancière,La mésentente, pp. 52~53)
랑시에르는 정치를 치안을 규정하는 감각적 짜임과 “단절”하는 것이며, “오직 소음만 일어났던 곳에서 담론이 들리게 하고, 소음으로만 들렸던 것을 담론으로 알아듣게 만드는 것”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치안과 정치는 “전적으로 이질적인 논리”(같은 책, p. 55)에 따라 작동한다. 푸코에게는 랑시에르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치안과 정치를 전혀 상이한 논리가 지배하는 두 가지 활동이라는 관점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랑시에르는 푸코에게 정치가 부재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치와 치안은 어떤 점에서 서로 대립하는 것일까?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랑시에르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인 “잘못”(tort)이라는 개념(영어로는 wrong으로 번역될 수 있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랑시에르는 이 개념을 리오타르에게서 빌려오지만, 그 의미를 완전히 재규정한다. 리오타르에게 tort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과 같이 합리적인 담론의 영역을 넘어서는 어떤 절대적인 잘못이나 피해를 뜻한다. 이것은 피해를 가한 쪽과 피해를 당한 쪽 양자가 서로 합의할 수 있고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평가 기준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일체의 토론이나 손해 배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정치적 행위의 범위도 초월하는 어떤 것이다.(Jean-François Lyotard, Le différend, Paris: Minuit, 1984 참조) 반면 랑시에르는 이것을 정치에 구성적인 잘못으로 파악하는데,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양의 정치철학의 기초를 뒤집기 위한 목표를 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서양 정치철학은 시초 이래로 아르케(arkhe)에 기반을 둔 정치 공동체의 질서를 모색했다. 그리스어로 “시초”와 더불어 “원인”이나 “근거”를 뜻하는 아르케는 정치 공동체가 어떤 합당한 근거나 원리에 따라 질서를 이루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 공동체의 아르케를 추구한 것은 두 가지 대립항을 피하기 위해서다. 하나는 공동체가 단순한 산술의 원리에 따라 구성되는 것을 막는 일이다. 솔론 이전의 고대 아테네에서 실제로 작동하던 이러한 산술의 원리에 따르면 공동체는 더 많은 부를 지닌 사람이 적은 부를 지닌 사람에 비해 더 많은 정치적 권리를 가지며, 심지어 채무를 지닌 사람들을 노예로 삼을 수도 있다. 두 사람에 따르면 이것은 정치 공동체를 질서 짓기 위한 원리로 적절치 않다. 또한 이들은 민주주의를 기초 짓고 있는 안-아르케(an-arkhe), 곧 아르케 없음, 원리 없음의 사태를 피하고자 했다(an-arkhe는 아나키(anarchy)의 어원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들이 보기에 민주주의는 정치 공동체에 고유한 아르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정치적 문제에 관여할 수 있고, 대중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마음대로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곤 한다. 플라톤이 말하듯이 구두수선공이나 대장장이가 성벽 쌓는 일이나 배 만드는 일에 대해 전문가들과 똑같은 권리로 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합리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무질서하고 잘못된 공동체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기하학적 비율에 따라 공동체의 성원들에게 돌아갈 몫을 정함으로써 공동체의 아르케를 세우고자 했다. 이것에 따르면 부유한 이들은 부에 따른 합당한 몫을 받고, 유덕한 귀족들은 그들의 고귀한 혈통과 유덕함에 따른 몫을 받으며, 재산도 혈통도 지니고 있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자유 시민이라는 몫을 지닌다.
랑시에르는 이처럼 공동체에 고유한 아르케를 설정하려는 것이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의 “정치철학”을 특징짓는 논리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정치철학”은 민주주의, 곧 정치 그 자체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아르케의 질서, 곧 기하학적인 몫의 분배 질서는 결국 보통 사람들에게 허울뿐인 자유 이외에는 아무런 정치의 몫도 남겨두지 않는 것이며, 몫 없는 이들의 배제를 자연적인/본성적인 정치 질서로 정당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정치는 아무나의 정치이며, 정치적인 참여에는 아무런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이 때문에 랑시에르는 추첨제야말로 민주주의에 고유한 제도라고 주장한다. J. Rancière, La haine de la démocratie, Paris: La Fabrique, 2005 참조. 또한 랑시에르와는 다소 다른 각도에서, 하지만 역사적인 사료 검토와 경험적인 논증에서는 훨씬 더 정교하게 추첨제와 민주주의의 긴밀한 연관성을 고찰하고 있는 버나드 마넹, 『선거는 민주적인가?』, 곽준혁 옮김, 후마니타스, 2004도 참조할 수 있다. 아울러 국내의 연구로는 이지문, 『추첨 민주주의: 이론과 실제』, 이담북스, 2012도 참조). 반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하는 아르케의 원리에 따르면, 어떤 일에는 자격이 필요하며, 그 일에 합당한 능력을 지닌 사람에게만 그러한 자격이 부여된다. 따라서 아르케의 원리에 따르면 아무런 자격이나 능력도 없이 아무나 정치를 할 수 있게 만드는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아르케 질서에 “잘못”을 범하고 그것을 “왜곡하는” 일이다(그리스어 블라베론(blaberon)이나 그것에 해당하는 불어 tort에는 “잘못”과 “왜곡”이라는 뜻이 모두 담겨 있다). 반면 랑시에르에 따르면 아르케의 원리야말로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인 데모스(demos), 곧 인민을 몫 없는 이들로 배제함으로써 정치, 곧 민주주의에게 “잘못”을 가하고 그것을 “왜곡하는” 것이다.
III. 주체화
따라서 아르케의 질서와 민주주의, 또는 치안과 정치는 “잘못”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해 있는 셈이다. 랑시에르는 고대 아테네에서는 인민으로서의 데모스가 이러한 잘못을 표현하는 집단이었다면, 근대에는 몫 없는 이들로서의 프롤레타리아나 여성 등이 이러한 의미의 잘못의 계급, 잘못의 집단이라고 본다. 아르케에 근거를 둔 치안은 이러한 잘못/왜곡의 계급을 배제하는 반면, 정치 또는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잘못/왜곡의 계급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에게 주체화란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는, 하지만 치안 질서 속에서는 은폐되어 있는 이러한 잘못이 잘못으로 드러나고, 몫 없는 이들이 자신의 몫을 획득하는 과정을 뜻한다. “정치적 주체화는 공동체의 치안적인 구성 속에 주어져 있지 않은 어떤 다자(多者, multiple), 그것을 세는 것은 치안의 논리와 모순되는 것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는 다자를 생산한다.”(같은 책, p. 60)
따라서 랑시에르에게 주체화는 일차적으로 정체화(identification)의 논리와 대립한다. “주체화 과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자기(soi)가 아니라, 하나의 자기와 타자(autre) 사이의 관계인 하나(un)를 형성하는 것이다.”(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길, 2008, 140쪽. 번역은 수정) 이러한 정의는 주체화와 정체화를 세 가지 측면에서 대비하고 있다. 첫째,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하나의 정체성에 대한 단순한 긍정이 아니”라, “치안 논리가 고착시키고 타자가 부과하는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랑시에르, 같은 책, 143쪽) 둘째,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하나의 증명”이다. 이것은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단순히 적대적인 타자를 부정하고 배제하고 제압하는 절멸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의 공통 장소를 구성하는”(같은 곳) 데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랑시에르적인 정치적 주체화에서 중요한 쟁점은 이처럼 공통 장소를 구성하는 것이 어떻게 대화나 합의의 구성과 다른지 보여주는 일이다. 셋째, “주체화의 논리는 언제나 불가능한 동일시를 내포한다.”(같은 곳)
랑시에르는 1832년 혁명가 오귀스트 블랑키에 대한 재판의 과정을 주체화와 정체화의 대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제시한다.
직업을 말하라는 재판장의 요구에 대해 그는 간단히 답변한다. “프롤레타리아.” 이 답변에 대해 재판장은 곧바로 “그건 직업이 아니잖아”라고 반박하지만, 즉각 다음과 같은 피고의 응수를 듣게 된다. “그것은 노동으로 연명하고 정치적 권리를 갖지 못한 3천만 프랑스인들의 직업이오.” 그러자 재판장은 서기에게 이 새로운 ‘직업’을 기록하도록 지시한다. 이 두 개의 응답으로 정치와 치안 사이의 갈등을 집약해볼 수 있다. 이 장면에서 모든 것은 직업(profession)이라는 같은 단어의 의미[직업, 고백/선언]를 이중으로 받아들이는 데 달려 있다. 치안의 논리를 구현하는 검사에게 직업은 일자리를 의미한다. 곧 그것은 어떤 신체를 그의 자리 및 그의 기능에 따라 위치시키는 활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프롤레타리아는 어떤 직업도 가리키지 않으며, 기껏해야 비참한 육체 노동자가 처해 있는 막연하게 정의된 어떤 처지를 가리키는데, 어떤 측면에서 보든지 이것은 피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혁명적 정치의 관점에서 블랑키는 같은 단어에 상이한 의미를 부여한다. 직업/선언은 어떤 집단에 속해 있다는 고백, 선언이다. 다만 이러한 집단은 아주 특수한 본성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블랑키가 자신이 속해 있다고 고백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결코 어떤 사회 집단과 동일시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는 육체 노동자도 노동자 계급도 아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들을 셈해지지 않은 이들로 셈하는 선언 자체 속에서만 존재하는 셈해지지 않은 이들의 계급이다.(J. Rancière, La mésentente, p. 63)
랑시에르가 블랑키의 재판의 사례에서 정체화와 주체화의 차이가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본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랑시에르에게 정체화란, 각각의 개인들 및 집단들에게 이러저러한 정체성을 부여하고, 그러한 정체성에 걸맞은 행위 양식, 사고 양식, 존재 양식을 할당하는 메커니즘을 가리킨다. 이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란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사회의 하층 계급을 뜻하며, 그런 한에서 블랑키처럼 국민의회 의원의 자식이자 지식인인 사람은 프롤레타리아가 될 수 없다. 더욱이 치안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명칭 자체는 결코 직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가 없다. 따라서 블랑키가 자신의 직업이 “프롤레타리아”라고 고백/선언하고, 그것의 의미를 “노동으로 연명하고 정치적 권리를 갖지 못한 3천만 프랑스인들의 직업”으로 규정했을 때 염두에 둔 것은, 치안의 질서에서 배제된 몫 없는 이들이 지닌 공통의 상황, 또는 어떤 연대성이다. 다시 말해 노동으로 연명하고 정치적 권리를 갖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사회학적으로 그들을 규정하는 이러저러한 차이(곧 정체성에 따른 차이)에 앞서, 치안의 질서에 의해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채 몫 없는 이들로서 배제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정체화의 논리에 따르면 이질적인 개인들이자 집단들이지만, 주체화의 관점에서 보면 동질적인 주체들이며, 자신의 직업을 프롤레타리아라고 말한 블랑키의 고백/선언에 담겨 있는 논점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랑시에르에게 주체화는 일차적으로 어떤 권력의 획득이나 법적 권리의 취득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신들을 셈해지지 않은 이들로 셈하는 선언 자체”(같은 책, p. 62)를 뜻하며, “일련의 언표행위의 사례 및 능력을 생산하는 것”(같은 책, p. 59)을 가리킨다. 이 때문에 랑시에르는 데카르트의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ego sum, ego existo)를 복수 인칭으로 표현한 “우리는 존재한다, 우리는 실존한다”(nos summus, nos exsitimus)를 정치적 주체화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정식으로 간주한다. 『성찰』에 나오는 데카르트의 이 명제는 잘 알려진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보다 훨씬 더 수행문의 성격을 띠고 있는 명제다. 왜냐하면 이 후자의 명제에서는 생각한다는 사태에서, 그 사태에 함축된 존재한다는 사태로의 추론이나 수행성이 문제가 되고 있는 반면, 전자의 명제에서는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는 언표 행위에 수반되는 수행성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명제에서는 그것을 언표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그 언표 주체의 존재를 입증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몫 없는 이들이 공동으로 자신들을 “우리”라고 언표하는 행위 자체는 이미 그들이 이런저런 사회적 정체성의 차이들을 넘어선 공동의 주체로 존재하고 있음을 표현해준다.
둘째, 랑시에르의 주체화에서 법은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랑시에르가 평등의 삼단논법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이 점이 잘 나타난다. 랑시에르는 19세기 프랑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고용주들에 맞서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사용한 주장들을 삼단논법의 형식으로 재구성한 바 있다.
삼단논법의 대전제는 간단하다. 1830년에 막 공포된 헌장 전문에는 모든 프랑스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적혀 있다. 이 평등이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된다. 삼단논법의 소전제는 즉각적인 경험에서 이끌어 온 것이다. 예를 들어 1833년에 파리의 재단사들은 양복점 주인들이 급료, 노동 시간, 일부 노동 조건들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업을 시작했다. 따라서 삼단논법의 소전제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전개될 것이다. 그렇지만 양복점 주인 슈바르츠 씨는 우리의 근거들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실 그에게 급료를 재검토해야 할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근거들을 그는 검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검증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평등한 자들로 대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그는 헌장에 기입된 평등을 위배하고 있다.(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110쪽).
이러한 삼단논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전제가 성립해야 한다. 따라서 평등의 삼단논법에서는 모든 프랑스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전제가 헌법에 기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본질적인 중요성을 얻게 된다. 더 나아가 랑시에르는 법이라는 것을 사회적 불평등이나 계급적 착취를 은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만으로 치부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맞서 실제의 노동자들은 법에 근거하여 해방 투쟁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대전제와 소전제 간의 모순을 사고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이다. 그것은 단순히 법-정치적 문장이 환영에 지나지 않으며, 그 문장이 주장하는 평등은 불평등의 현실을 가리기 위해서만 거기에 있을 뿐인 외양이라고 결론짓는 것이다. ... 그렇지만 이것은 결코 노동자들의 추론이 선택한 길이 아니다. ... 평등을 말하는 문장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하나의 문장은 우리가 그것에 부여한 힘을 갖고 있다. 이 힘은 우선 평등이 그 자체를 표방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디엔가 평등이 있다. 이것은 말해졌고, 씌어졌다. 따라서 이것은 입증될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실천은 바로 거기에 바탕을 둘 수 있으며, 이 평등을 입증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을 수 있다.(같은 책, 111~112쪽)
이 점에서 푸코와 랑시에르의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이 나타난다. 푸코에게 법은 항상 권력이나 통치성과 대립하는 위치에 있으며, 권력이나 통치성의 실제 작용에 근거를 두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은폐하거나 가리는 것으로 제시될 뿐, 그것 자체가 정치나 주체화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반면 랑시에르에게 법은, 적어도 일부분의 경우 정치적 주체화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또한 이 지점에서 랑시에르 정치 사상의 중요한 한 가지 긴장, 심지어 더 나아가 모순이 나타난다. 랑시에르는 한편으로 아르케의 논리와 민주주의의 논리, 치안과 민주주의를 확연하게 대립시킨다. 그에게 양자는 결코 화해하거나 섞일 수 없는 전혀 상반된 두 가지 논리이자 두 가지 실천이다. 그런데 그는 다른 한편으로 이 양자는 항상 결부돼 있다고 주장한다.
정치가 치안의 논리와 전적으로 이질적인 논리를 작동시킨다 해도 정치는 항상 치안과 결부돼 있다는 점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양자가 결부돼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는 자신에게 고유한 대상들이나 질문들을 갖고 있지 않다. 정치의 유일한 원리인 평등은 정치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며 그 자체로만 본다면 정치적인 것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정치가 평등에 대해 하는 모든 것은, 평등에 대해 소송 사건들(cas)이라는 형태로 현재성을 부여하는 것이며, 계쟁이라는 형태 아래 치안 질서의 중심에 평등의 입증을 기입해 넣는 것이다. 어떤 행동의 정치적 성격을 이루는 것은 그것의 대상이나 그러한 행동이 실행되는 장소가 아니라, 오직 그 행동의 형식, 곧 분할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공동체의 제도, 계쟁의 제도 속에 평등의 입증을 기입해 넣는 형식이다. 정치는 도처에서 치안과 마주친다. 이러한 마주침을 이질적인 것들의 마주침이라고 생각해야 한다.(J. Rancière, La mésentente, p. 55)
정치는 치안과 전적으로 이질적인 논리에 따라 작용하지만, 그럼에도 정치는 치안과 항상 결부돼 있다. 이것이 수수께끼, 심지어 모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양자가 항상 함께 결부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랑시에르의 주장과 달리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그 이유를 “정치는 자신에게 고유한 대상들이나 질문들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치가 하는 모든 일은 “계쟁이라는 형태 아래 치안 질서의 중심에 평등의 입증을 기입해 넣는 것 ... 오직 그 행동의 형식, 분할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공동체의 제도, 계쟁의 제도 속에 평등의 입증을 기입해 넣는 형식”이다. 이러한 설명에 전제돼 있는 것은, 정치의 논리와 치안의 논리가 마주치는 공통의 장소, 공통의 무대라는 생각이다. 랑시에르는 한때 이러한 공통의 장소를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지만,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통의 장소는 어떤 것일까? 위의 인용문에서 그 장소는 “치안 질서[에 의해 지배받는 공동체]”나 “분할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공동체의 제도”다. 또는 우리가 흔히 국가라고 부르는 정치 공동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고유한 대상도 장소도 질문도 갖고 있지 않은 정치는항상 우리가 국가라고 부르는 공동체 제도를 전제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는 랑시에르의 관점에 따르면 공동체의 몫들의 분배를 규정하는 아르케의 논리, 치안의 논리에 의해 항상 지배받는다. 그렇다면 역설적이게도 랑시에르의 정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랑시에르적인 실천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치안 공동체, 아르케 공동체가 존재해야만 한다. 정치는 고유한 대상도 장소도 질문도 갖고 있 지 않으며, 오직 “아르케 논리와의 단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수께끼 같은, 또는 역설적인 귀결이 생겨나는 이유는 랑시에르가 정치와 치안을 전면적으로 대립시키고, “모든 국가는 과두제 국가”(J. Rancière, La haine de la démocratie, Fabrique, 2005, p. 9)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국가가 과두제 국가이며, 정치는 항상 국가 제도를 조절하는 치안의 논리를 위반하고 그것과 단절하는 데서 성립한다면, 하지만 동시에 정치는 치안과 분리할 수 없게 결부돼 있다면, “그 특성상 드문(rare) 것”(J. Rancière, La mésentente, p. 188)인 정치는 일시적인 위반이나 스캔들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본다면 랑시에르의 저작에는 국가나 정치 공동체에 관한 다른 관점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앞서 본 것처럼 평등의 삼단논법에 대한 매우 탁월한 설명과 사례들이 몇몇 제시되어 있다. 이 사례의 본질적인 의미는, 국가나 법을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 도구이자 계급 지배의 불평등한 현실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로 간주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과 달리, 법이나 국가 제도가 어떻게 노동자, 여성 및 기타 소수 집단들의 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본질적인 조건인가를 보여주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법이나 국가 제도는 단순한 지배의 장치, 아르케의 논리가 군림하는 장소가 아니라, 평등의 논리가 기입되고 법제화되고 물질적인 힘으로 작동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법이나 국가 제도는 지배의 장치이면서 동시에 해방 운동을 위한 핵심적인 거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랑시에르의 정치사상에서는 한편으로 정치와 치안의 전면적인 대립으로 표현되는 해방 운동과, 다른 한편으로 평등의 삼단논법에서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는 정치 제도 사이에 뚜렷한 긴장 내지 모순 관계가 성립할 뿐, 양자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의 가능성이 긍정되지는 못하고 있다. 아마도 이 점이 랑시에르와 발리바르(또는 데리다) 정치 사상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