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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ug 21. 2022

욜로와 초인사이에 '니체'

니체_정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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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드리면서 책을 읽는 모임에서 이번 시즌은 니체를 읽기 시작한다. 니체를 그동안 많이 읽어왔지만, 오늘부터는 1세대 니체 철학자인 정동호 교수님의 책을 함께 읽는다. 이번 시간을 통해서 그동안 애매했던 니체의 사상을 정리하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영원한 현재인 현실에서 우리는 다양한 관점을 서로 이해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니체를 따라서 삶의 원칙들과 보는 방법으로서의 '관점'을 이제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또한 '신의 죽음'을 그 자체로 정말 죽었다고 본 것인지 아니면 비유인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영원히 반복되시는 시간 속에서 '욜로'의 인생을 살 것인지 자신만의 철학을 개척해서 '초인'이 될 것인지도 생각해보자. 계속 시간을 거슬러 '나는 누구인가'를 살펴보자. 


https://brunch.co.kr/@minnation/991



근대적 질환들


니체가 생각할 때 그의 시대에 나타난 근대화로 인한 질환들은 근대지식과 정치 과학기술혁명에서 야기된 문제들, 생의 궁핍화와 왜곡, 민주의 허울을 쓴 대중 정치와 대중문화에 의한 인간의 천민화, 만능을 구가하는 과학기술의 횡포와 그것에 의한 자연 유린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대진단에 대해서 니체의 대안은 '이성주의의 지배 아래 고유 의미를 잃은 생을 복권시키는 한편,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발호하는 대중에게 재갈을 물리고, 고삐 풀린 채 질주하는 과학기술에 제동을 거는 것'이었다. (니체_정동호)


그렇다면 이런 근대적 현상들의 원인이자 뿌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플라톤주의이다. 이데아의 절대성을 추구하는 이성은 언제나 현상, 현실, 실제, 진실을 왜곡시키고 삶을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플라톤 철학에서 존재론이 비틀리고, 관점 자체가 이원론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니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윤리보다는 지식의 탁월성만 추구하면 되는 것으로 이해되도록 현실인식을 만들어 버렸다. 더욱이,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지상세계와 저편의 세계를 나누는 '천국' 개념이 플라톤주의를 재탕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사람들이 현실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이데아의 세계, 천국의 독단성은 니체가 생각하는 근대적 질환들의 원인이었다. 


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가 근대질환의 원흉이다


따라서 니체는 근대적 질환의 뿌리가 되는 이데아사상과 플라톤, 그리스도교를 타도의 대상으로 잡았다. 이러한 질환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내기 위해서 '플라톤-그리스도교'를 '신'이라는 개념으로 포섭하고,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전쟁을 시작한다. '신'만이 보유하고 있는 '윤리의 담지자'라는 지위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저술작업과 함께 사람들에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신'이 죽어야만 비로소 인간의 해방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현재시점에서 사람들은 '신'으로 부터 해방되어서 자유의 세계를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헬라철학을 엎고 중세를 지니가는 기독교의 여정


힘에의 의지, 힘의 원천


니체가 보기에 자연은 힘의 원천이면서 힘의 권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러한 자연을 움직이는 거은 신도 아니고 어떤 섭리도 아니다. 자연은 도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인격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오히려 선악의 개념을 대입할 수 없다. 반대로 '자신을 완성하려는 코나투스'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약육강식의 시대에서 자연은 항상 그랬다. 살아남으려면 힘이 있어야 했고, 힘이 있으면 자신의 의지를 마음껏 방출해도 문제가 없었다. 따라서 자연은 힘들의 각축장이었고, 모든 운동을 일으키는 힘들은 다양한 방향으로 서로 경쟁하고 싸우고 살아남았다. 


공간이 유한하고 시간은 무한하기 때문에
한 공간 안에서 존재는 계속 반복된다

니체가 이해하는 우주는 이러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범주의 개념에서 보면 힘은 일정한 공간 안에서만 작용하는데, 유한한 공간이라는 전제는 무한한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었다. 공간이 유한하고 시간이 유한할 경우 그럼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다양한 힘들이 생겨났다고 없어졌다고 연결되었다고 흩어지는 것들의 반복되는 이유였다.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무한한 시간 속에서 힘에 의해서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영원회귀'의 쳇바퀴 안에 있는 것이다. 



영원회귀와 허무주의


영원히 돌아오는 무한의 시간에는 의미가 없다.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무한대이다. 단순한 반복이 무한히 반반복될 뿐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두 가지의 방법론 중에서 선택할 수 밖에 없다. 한가지는 허무주의이고 다른 한가지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초인'이다. 니체가 말하는 대로 영원히 반복되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죽인 신을 대신해서 스스로 윤리를 제시해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니체 읽기가 달라진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자신이 살아있는 순간에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운명애'amor fati를 강조하는 쪽이 있다. 현실을 긍정하고 즐기고 살아가면서 행복해하고 감사하는 요즘에 말하는 '욜로'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초월적 이념과 이상 속에서 왜소해진 인간이 건강해지는 방법은 결국 신의 죽음을 긍정하고 신이 가진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초인이 되는 것이다. 사실 운명을 사랑하려면 무한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할 수 있는 강건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거듭난 인간 짜라투스트라 혹은 위버멘쉬Ubermensch는 니체가 말하는 존재론과 인간론을 집대성한 것이다. 위버멘시의 철학은 결국 우생학이나 우월성으로 오해받기 쉽상이여서 히틀러의 의해서 독일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철학이 되었다. 




관점주의, perspectivism


관점주의는 모든 인식은 그 인식 주체가 가지고 있는 관점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관점주의에서는 '초월적 관점'은 존재하지 않으며, 만약 이러한 관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관점은 보통 물리적 공간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시각의 방향을 말하지만, 관점주의는 시간의 경과 속에서 수시로 달라지는 심리적 상태아 요구, 정서적 취향 등의 정황이 모두 반영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구분해야하는 것이 있다. 바로 '상대주의'와 관점주의는 어떻게 다른가?이다. 상대주의는 '그 물질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관찰자가 관계맺는 방식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상대주의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라는 것이라면 관점주의는 '그 사람의 그 위치에서는 그렇게 보는게 맞을 것 같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관점주의는 상대주의와 달리 사태의 단면에서
관점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관점주의는 상대주의보다 훨씬 더 상대적인 국면을 더 받아 들인다. 상대주의는 다른 생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면 관점주의는 상대방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상황까지 고려하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는 관점주의를 표방하면서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것에 맞서서 상대적 국면 하나하나를 받아들이는 사태의 복원을 꾀한다. 회의주의와는 또 다르게 그 관점 안에서는 사실적인 접근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알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인식가능성을 열어 놓고 계속 그 관점이 제시하는 사태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화가들은 소실점에 따라서 원근법의 깊이가 달라진다. 선원근법, 공기원근법, 색원근법 등에 따라서 화가들의 화폭의 구도가 달라진다. 그런데 소실점을 알지 못한체로 이 그림은 진실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소실점을 모른 상태에서 오히려 무지한 것을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피라미드가 이등변 삼각형인지, 정사각형인지, 사각뿔인지는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니체는 관점주의를 시작으로 해서 생의 철학에 대입해서 생을 기본으로 인생을 바라보고, 인간을 직시할 것은 요청한다. 역동적인 생물학적인 현실인 생을 기반으로 관점주의를 펼친다면, 심층적이고 다층적인 면이 부각되면서 다양한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의식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로데릭 치좀의 철학에서 드러난 다양한 관점들



머리말


왜 니체인가?

니체, 어떻게 읽나?


제1장. 생ㅡ처음이자 끝이다

제2장. "신은 죽었다"

제3장. 선과 악을 넘어서

제4장. 니힐리즘

제5장. 가치의 전도

제6장. "자연으로 돌아가라"

제7장. 힘에의 의지

제8장. 귀족주의

제9장. 영원회귀

제10장. 우주 허무주의

제11장. 위버멘쉬



책소개


한국 1세대 니체 학자의 연구 결실을 책으로 펴냈다. 니체를 특정 시각으로 해석하는 것보다 제대로 읽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에서, 자의적 해석을 최대한 지양하며 니체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자 했다. 그래서 책 제목도 더도 덜도 없이 단지 ‘니체’다.


저자는 신의 죽음, 가치의 전도, 허무주의, 자연으로의 복귀,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운명애, 위버멘쉬 같은 니체의 핵심 주제들을 하나하나 탐색해나감으로써 니체가 어떻게 서구를 지배해온 이성주의의 독단에서 벗어나 현실 중심적이고 생명 중심적인 사상을 전개했는지, 그의 사상이 어떻게 인문 사회 예술 등 모든 영역에 지적 토양을 제공하며 하나의 철학으로 생명력을 유지해왔는지를 보여준다.


니체는 자신의 사유를 특정 저작을 할애해 체계적으로 논증하지 않았는데, 크고 작은 조각들로 흩어져 있는 니체의 중심 주제들을 퍼즐을 완성하듯 유기적으로 재구성해 니체 이해에 다가가는 이 책의 방식은 니체가 택했던 관점주의와 닮아 있다. 체계와 논리 대신 이 세계에는 관점에 따른 무수히 많은 전망이 있고 이들 전망은 모순되기도 하다는 니체의 관점주의에 눈뜰 때, 풍요롭게 생동하는 니체 사상에 더 깊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제1장_생: 시작과 끝 


1. 니체의 철학 = 생의 철학

생은 힘에의 의지다: 모든 존재는 힘의 작용이고, 물질도 힘의 점들이다. 생은 삶이며 생물학적인 생명이다. 

생명은 경험을 축적하고, 성장하고, 증식하려 하며, 그렇기 위해 자신을 위협하는 외부환경과 경쟁자들과의 싸움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적자생존, 동물의 왕국).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맞서 싸우는 웅전이 생명에게는 도약의 발판이 된다 (상대방이 때리면 너는 더 세게 때려라) 


2. 인간에게 생명은 알파와 오메가다: 생명을 초월하는 도덕이나 이념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생에 적대적인 다음 세부류와 맞서 싸워야 한다. 

이성, 오성, 지성, 의식 따위의 정신적 기능은 생명의 에너지인 본능(충동)을 억제하여 빈사상태로 만든다. 이성은 신체의 감각을 불신하며, 원래 삶을 지배하던 신체에 봉사하는 대신 군림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체의 본능, 감각이 파괴되면 이성도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오성은 추상을 통한 개념화, 보편화, 일반화하는 능력이다. 오성은 “지금, 여기”라는 삶의 특수성을 배제하게 만들고, 본능의 즉각적 반응에 제동을 건다. 

지성은 변화하는 현실을 문자로 추상화하여 박제화된 지식으로 만든다. 의식은 (사회적/제도적 관점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객관화하고 반성하게 만든다 (남들 눈치 보느라 내 자신의 본능대로 살지 못하게 한다.) 니체에 의하면, 의식을 통한 사회화를 통하여 “나”는 사라지게 된다. 

이 땅에서의 삶을 외면하게 만드는 초월적 이상(플라톤 형이상학, 기독교 교리)은 지금 여기의 생보다 저편의 세계에 집중하게 만든다. 

선/악, 정의/불의 같은 반자연적인 족쇄는 생명의 원리인 싸움과 착취를 반도덕적인 것으로 규정하여 생을 중상해 왔다. 


3. 니체의 실증주의/과학지상주의 비판 

실증주의는 실험과 관찰을 통해 검증가능한 사실만을 인식의 근원으로 삼는다. 형이상학, 종교는 팩트로 논할 수 없다. 

GDP VS 행복지수. 

니체에게 실증주의에 의한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다. 사실은 없고 단지 변화하는 해석만 있을 뿐이다. 

니체 당시 자연과학의 전성기를 맞았다 (진화론, 세균학, 주기율, 빛, 전기 등). 니체는 자연 현상을 인과법칙에 따라 해석하는 기계론과 목적론 모두 반대한다. 인과 관계는 주어/술어로 구성된 언어습관에 원인/결과에 대한 신념이 숨어 있다고 보았다. 

변화만을 실제적으로 받아들이는 니체는 행위 주체는 없고, 행위만 있을 뿐이다. 역사의 주관자로서의 신 부정. 인과관계에 의해 특정사건을 분석하면 그 사건의 특수성을 놓치게 되고 일반화시키게 된다. 

니체는 기계론도 목적론도 아니고, 모든 존재의 생기의 근원을 힘과 힘의 작용으로 보는 역본설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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