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헤드의 본명은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이다. 한국에서는 보통 화이트해드로 불리지만 나름대로 자신의 긴 본명을 가지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1861년 잉글랜드의 켄트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캠브릿지에 들어간 것은 19세가 되던 1880년인데 트리티티 칼리지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따라서 우리가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수와 무, 무한의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1898년 보편대수학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하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정의할 수도 있고(프랑스철학), 있는 것과 없는 것들의 증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프로이트와 라캉), 경험한 것과 경함하지 못한 것들의 신비(영미 분석철학)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화이트해드는 1910년부터 약 4년을 연구하여 '수학원리'를 발표하고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공간, 시간, 그리고 상대성'이라는 이론을 정립한다. 시기상으로 보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원리'보다 빨랐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아인슈타인을 앞섰던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1919년 자연인식의 원리에 관한 연구를 시작으로 자연의 개념을 1920년에 발표하면서 물리학을 기본으로 세상을 정리하는 철할을 발전시켰다. 그가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넘어 온 것은 1924년이다. 흔히 '메타피지컬 학파'라고 불리우는 형이상학 학파가 만들어지던 시기이다. 이때 화이트헤드는 '과학과 근대세계'라는 책을 시작으로 과학철학이 무르익으면서 과학이 사회를 구성하는 후기 형이상학 연구에 천착하게 된다.
과학과 물리학, 계몽주의와 형이상학의 연결성을 고민하던 화이트헤드는 마침내 1929년 우리에게 유명한 '과정과 실재'라는 책을 저술하면서 인간이 일정한 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근본적인 '우주론'을 기초하고 1993년 '관념의 모험'에서 이것을 '문명'사적으로 정리하여 보편성을 담은 원리를 도출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에게도 '감정'과 '사건'이 틈입하지 못하는 보편성의 추구가 인간을 이성적으로만 볼 수 없다는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2차 세계대전때문이었다. 2차 세계대전을 넘어가면서 화이트헤드는 '사고의 양태'라는 책에서 문명이 이미 만들어진 상태에서, 프로세스가 끝난 상태의 문명이 어떻게 가치충돌을 통해서 세계대전과 같은 파괴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기술했다.
진리의 발견, 실체에서 실재로
인간은 언제나 진리탐구의 과정에 있다.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기 위해서 사람들은 진리를 어디서 발견하며 어떤 경로로 발견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지속적으로 해 왔다. 그러다가 근본적으로 진리를 이해하는 방식이 틀어지는 사건들이 발생하면 다시 진리를 획득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중세시대에는 인간은 진리는 '하나님과 같은 초월적 존재'로 부터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초월한 세계에서 내려오는 진리개념을 받아들였다. 일명 신플라톤주의라고할 수 있다. 모방의 세계인 현실은 언제나 완전한 이데아세계의 그림자였다. 그러나 인간을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인간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함께 진리를 생성할 수 없는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존엄은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중세시대에서 르네상스, 계몽주의, 과학주의 시대로 넘어 오면서 인간은 진리의 발견을 다양한 경로로 발견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헤겔과 같은 17세기 초기 낭만주의자들에게는 정신의 발견과 현실의 경험이 서로 연결되는 개념으로 보게 되었고, '정반합'이라는 통합의 논리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과정을 설게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정신의 상승작용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고, 반대로 보이는 것들의 관계 속에서 진리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진리는 사태 속에서 잉태되고, 상황 속에 내재된 잠재성이라고 보았다. 그러니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사건이 필요했고, 만남이 필요했다.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영미철학의 관점에서는 보통 실용주의라고 불리우는데, '진리가 외부에 있고, 그 진리는 경험을 통해서 발견된다'라고 보았다. 발견된 진리가 진리의 요소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일상 생활에서 유용한가였다. 영국과 미국의 철학의 스타일은 분석철학이라고 부르는데 나눌수 있는데까지 나누어보고 나눈 것들을 다시 합리적으로 연결하는 작업들을 '과정 속에서' 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흐름에서 화이트헤드는 영국철학에서 보여지는 합리주의 전통을 경험주의의 관점에서 실용주의로 발전시킨 인물이었다. 실생활에서 유용한 것들을 진리로 여기는 실용주의 학파, '메타피지컬 그룹'의 핵심이었다.
과거의 체계들이 활력을 상실했고, 수정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추상적인 언어를 현실화시켜야 한다
합리성과 체계화
화이트헤드의 질문은 사실 프랑스철학이나 독일의 관념철학과 정반대였다. 모든 것들을 합리성의 측면에서 체계화하려고 노력했고, 체계화되지 않는다라는 전제를 깨뜨리고 싶었다. 원래 어떤 거대한 사상이나 원리를 깨려면 그 원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화이트헤드는 '합리성'의 바깥에 있는 '비합리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베르그송의 도식에 도전한다. 베르그송의 생성의 원리는 하나의 물질에서 시작한 생성의 원리는 일정한 체계나 흐름, 과정이 있지 않고 끊임없는 차이와 반속 속에서 만들어지는 '우연성'의 결과였다. 우연한 것들이 지속되고 축적되면서 생성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비합리적 생성의 베르그손 철학에서 비합리적인 속성을 꺼내서 합리적인 과정으로 만드는 과정을 '경계' 위에서 달린다.
합리성의 두 가지 요소는 매칭성과 대칭성이다.
이른바 관념의 모험은 이러한 비합리적인 생성의 과정을 합리성의 측면에서 기술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상징'인 언어 자체가 이미 비합리성을 태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합리성의 두 가지 요소는 매칭성과 대칭성이다. 사물과 언어가 서로 1:1로 매칠될 수록, 서로 같은 크기로 대칭될수록 합리성은 증가한다. 베르그송이 이야기하는 지속과 생성은 언어로 담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해서 합리성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설득력은 떨어지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베르그송이 이야기하는 우연한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생성은 그것을 매칭시킬 언어가 없었고, 언어를 대칭할 것들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합리성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던 것이다. 적어도 화이트헤드가 보기에는 말이다. 그렇다면 화이트헤드의 대응은 무엇이었을까? 다름 아닌 언어를 발명하는 것이다.
과정 속에서 탄생하는 주체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기존의 철학들이 실재의 실상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활동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언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경험이 축적되지 않고 전수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인간이 타자와 경험하는 '사태'에 집중하고 이러한 사태를 경험하는 인간은 자기를 구성해가는 과정적 사건의 결정체라고 본다.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 완성된다라고 하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화이트헤드는 기존의 계몽주의의 시작이었던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전환하여 '나는 경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바꾼다. 생각하는 것도 역시 경험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현실적인 존재actual entity가 된다는 것은 현실적인 계기actual entity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가이다.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의미에서 performaty라는 개념으로 발전한다. 수행과정을 통해서 주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존재와 인식의 차이는 사라진다. 오히려 하나가 된다. 인식한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할 수 없다. 마치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은 유전한다고 보면서 인식하는 것에서 존재를 정의할 수 없다고 보았다면, 파르메니데스는 존재하는 것은 생각할 수 있고 말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 것과 같다. 베르그송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생성은 임의로 언제나 만들어지고 생성된다고 보았다. 그러니 지금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등를 담고 있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 결국은 세상에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화이트헤드도 임의의 생성을 가진 존재를 인정했지만, 그 존재가 경험의 계기를 마련하지 않고서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존재는 과정 속에 있고, 이 과정을 벗어나면 존재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다른 존재의 과정 속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존재들은 과정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과정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서 주체는 달라지게 된다. 다른 경험을 하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연성은 기본적인 전제가 되고, 우연한 연결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고 그 관계 속에선 새로운 주체가 탄생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동일성'은 없으며, 정태적이지도 않다. 생성하는 그 모든 것은 시간을 떠나 살 수 없고, 임의적이며 개인의 삶은 소우주의와 같다. 이 소우주는 과정을 거쳐서 나름대로의 존재로 만들어진다. 이러한 실제의 변화를 기술하기 위해서 화이트헤드는 기존의 '정태적이고 윤리적이며 형이상학적 언어'를 걷어차고 자신에게도 새로운 언어표현과 개념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