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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Feb 09. 2018

지속과 운동

베르그송철학_철학아카데미

20180209_철학아카데미

베르그송철학_류종열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들에 관한 시론_지속은 측정할 수 있는가?


들어가기

베르그송이 본 실재는 무엇인가?의식이 개념을 매개하지 않아도 직관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자아를 바라보는 2가지 측면의 관점을 보자. 이데아의 확장extention으로서 사물이 아니라 실재의표면edante으로써 사물을 바라보자. 그러고 나면 우리의 자아는 어떻게 평가되는가?



지속, 측정


우리가 지속의 계기하는 순간들을 센다는 것 그리고 시간은 수와의 관계에서 우선 측정할 수 있는 크기, 그것도 공간과 대단히 유사한 크기로 보인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구별을 해야 한다. 가령 내가 방금 일분이 흘렀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은 시계추가 초를 똑딱거리며 60번 진동을 실행했음을 의미한다. 내가 그 60번의 진동을 단번에 그리고 단일한 정신의 포착에 의해 표상한다면, 가정에 의해 나는 계기의 관념을 배제한 셈이다. 나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60번의 박동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각각이 말하자면 시계추의 진동을 상징하는 고정된 선 위의 60개의 점을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 만약 내가 그 60번의 진동을 계기적으로 표상하되 그것이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면, 각 진동을 앞선 진동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보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실 자체에 의해 나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현재에만 머물도록 차단하는 셈이 될 것이며, 계가가 지속을 사유하는 것은 단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오늘도 3층 도식에서 시작한다



다수, 순수지속


내가 현재의 진동상image과 결합하여 그에 앞선 진동의 기억을 보존한다면,  다음 둘 중 하나의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하나는 그 상들을 병치하는 것인데, 이 때에 우리의 첫 번째 가정으로 떨어질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상들을 선율의 음들처럼 그들 사이가 상호 침투하고 유기적으로 조직화되어 서로 속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 결과 그 상들은 수와 아무 유사성이 없게 되며, 우리가 구별되지indistincte 않는 다수성, 또는 질적인 다수성이라 부르는 것을 형성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순수 지속duree pure의 상을 얻을 것이다. 동질적 장소나 측정 가능한 양이라는 관념에서도 벗어날 것이다.


인간자아의 한부분인 감정의 다발, 이게 실재라고 말하고 있다



지속, 표상


지속을 그 본래의 순수함에서 표상하는 데에 믿기 힘들 정보의 어려움을 느낀다. 이러한 지속을 바라보며 설명하려는 인간 혹은 관찰자만 지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어렵다. 외부 사물도 우리처럼 지속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 마지막 관점에서 보면 시간은 동질적 장소와 매우 닮았다. 그러한 지속의 순간들은 공간 위의 물체들이 그런 것처럼 서로에 대해 밖에 있는 것으로 보일 뿐 아니라, 감각이 보는 운동은 동질적이며 측정 가능한 지속의 이를테면 손에 잡히는 신호이다. 시간은 양의 형태로 역학의 공식에, 천문학자와 심지어 물리학자의 계산에도 들어간다.


공간은 프랙탈 상자처럼 둘레가 무한인 공백일지도 모른다



베르그송, 공간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이전까지의 철학은 형상철학이었다. 그 말은 이데아를 중심으로 하는 형이상학이었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베르그송에 의하면 공간과 등가적인 시간을 전제로 한다. 공간도 일정한 동일한 단위와 규격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고서 수학과 사회와 인간과 의식을 판단한다.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형이상학, 특히 형상철학을 하는 이들이 가진 고질 적인 문제이다.실제로 운동과 시간을 설명할 때 이러한 등가성이나 공간성으로는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일정한 공식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라는 것이다. 공식으로 설명된다는 것은 상상의 세계이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100킬로로 1시간을 달리는 자동차는 매 시간동안 같은 속도를 달리는가? 절대 그럴 수 없다. 이러한 분석은 오직 결과적으로만 추적할 수 있는 것이다. 운동과 지속을 설명하는 것은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설명이 아닌, 분석이 아닌 직관이 하는 일이다.




지속, 운동


외견상 동질적으로 보이는 지속의 살아 있는 상징인 운동의 개념을 동일한 분석에 회부해 보자. 같은 종류의 분해dissociation가 행해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아주 자주 운동은 공간 속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운동이 동질적이며 나누어질 수 있다고 선언할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지나간 공간이다. 공간을 운동자체와 혼동할 수는 있으나 운동체는 공간을 벗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베르그송이 다루고 있는 것은 사물이 아닌 진행이다.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이행인 한에 있어서 운동은 정신의 종합이며 심적인, 따라서 비연장적인 과정이다.공간 속에서는 공간의 부분들 밖에 없으며, 공간의 어느점에서 운동체를 생각하는, 위치 밖에는 얻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인공지능을 통해서 우리 의식이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이 드러났다



합리주의, 맹점


일자의 논리로 출발하는 파르메니데스의 철학과 제논의 무한급수까지 가보면 한가지 맹점이 발견된다.문제는 존재하는 것만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파르메니데스의 관점은 합리주의에서 꽃을 피운다.합리주의는 존재하는 것을 제가 입증해야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이다.반대로 입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합리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현실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와 사건들이 수 없이 많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주의는 세상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것이 바로 합리주의의 맹점이다.



내적 다수성, 의식


지속은 직접적 의식에 나타나며, 연장성으로부터 끌어낸 상징적 표상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한, 그런 형태를 보존한다. 결론적으로 다수성의 두 형태, 즉 지속의 매우 다른 두 평가, 즉 의식적 삶의 두 측면을 구별하자.주의 깊은 심리학은 동질적 지속, 즉 진정한 지속의 외연적 상징 아래에서 그 이질적 순간들이 상호 침투하는 지속을 분강해 낸다. 의식의 상태들의 수적 다수성 아래에서 질적 다수성을, 잘 결정된 상태들로 이루어진 자아 아래에서 계기가 유앟ㅂ과 유기적 조직을 함축하는 자아를 분간해 낸다.


베르그송의 두 자아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뉴스와 감각의 연결을 보자





민네이션, 베르그송


베르그송을 지나가려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시간은 지속되는 생명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공간은 인간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분석도구로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세계는 시간과 공간으로 나뉘고, 세계는 시간에 따라서 계속 변화하는 운동성, 지속성의 현시이다.이러한 시간의 흐름속에서는 인간의 이성과 사물들이 '창조적인 지속'을 만들어내면서 운동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시간은 또한 의식에 직접 주어지면서 '직관'을 담아내는 방식이다. 직관은 바로 주어지는 것이고, 분석은 이성을 통해서 해석한 것이다. 직관은 시간의 관점에서 지속하는 것들을 잡아내는 것이고, 분석은 공간의 관점에서 멈추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개념, 수학, 숫자들은 공간의 개념에서 사물과 사건을 멈춰놓고 연결짓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르그송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도 시간의 관점에서 직관적으로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그리고 베르그송에게는 생명은 언제나 지속하는 것이고, 이것이 가장 큰 존재의 코나투스라는 것을 주장한다.


데카르트는 분명히 봤다. 실재가 존재하는 방식을.



민네이션, 두 자아


베르그송은 심층으로 부터 나오는 의식이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표면과 이것이 형상에서 재해석되어서 등장하는 '재현' 모두 형이상학의 구성요소라고 보았다.그리고 이러한 형이상학은 인간의 자아를 구성하는 두가지 요소라는 것이었다.다시 말하면 심층과 형상이 모두 인간 자아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을 한 쪽으로만 보는 것은 인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플랫폼이다. 의식과 몸이 하나가 되어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플랫폼 말이다.그러나 자신이 배운 학문, 경험,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의식을 지나치게 부각하거나, 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제를 찾아볼 수 있다. 레비나스든 베르그송이든, 푸코든지 그들이 설명하는대로 혹은 분석하거나 제시하는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가?


의식을 표현하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인식된 것을 꺼내는 재현이다. 설문조사는 그래서 사실이 아니라 자신이 인식한 만큼 재현해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민네이션, 철학


바디우는 형상철학에서 공백을 이야기하고 이러한 공백에서 뿌려지는, 혹은 보여지는, 현시되는, 재현되는 것들은 순수한 다자들 중에 하나라고 말하낟. 그러나 베르그송은 그렇게 현시되는 것들, 재현되는 것은 대칭되어서 인간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들의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데카르트에서 실재의 개념이 바뀐다. 그 이유는 데카르트는 현재 우리의 삶이 신이나 이데아의 시뮬라크르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운동하는 실재적인 물질(edante - hyle - matter)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이 운동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운동이 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거대한 주장이었던 것이다.이것을 받아서 베르그속은 의식에 '이데아'적인 개념이 도장찍혀서 인간이 되는게 아니라, 의식에 매개하는 것이 없이 바로 물질에 대한 기억이 창조적으로 진화를 일으켜서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물질은 그 속에 affection인 감정과 욕망이 있고 이것이 표면에 드러나는 방식은 무한하게 드러난다. 정의내릴 수 없지만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경주에서 거북이를 절대로 잡을 수 없다는 논리적 귀결에 다다른다



민네이션, 제논


제론의 무한급수를 생각해 보자. 제론의 무한급수 개념에서는 이분법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 아무리 분할해도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러내는 것은 바로 이론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형이상학의 세계는 무한의 제논급수처럼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그 말은 실재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이렇게 제론을 설명하다가 형이상학이 가진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그래서 자기 자아에 대해서 더 심층적인 고민하게 된다.


나 역시 이러한 고민을 하게 된다. 어릴적부터 설명될 수 없었던 수 많은 사건과 고민들.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고 고작 몇명의 고지식한 학자나 어른들만이 이것은 이거야라고 말하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던가? 우리가 진정으로 존재는 방식은 과연 어떤 것일까? 제논의 논리라면 절대로 풀수 없지만 오히려 내 살깣의 언어로는 풀 수 있지 않을까? 나의 감정이 지적인 깨달음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지를 나도 기대가 된다. 말랑말랑하게 열어 놓고 새롭게 사고 하고 받아 들이자. 다만, 기존의 편견은 넘어가자 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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