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_철학아카데미
20180214_철학아카데미
계몽의 변증법_임경석
문화산업,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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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문명은 어떻게 다른가? 문화는 농경사회에 접어들면서 수확할 수 있는 곡물이 생기면서 이것을 관리한다는 의미에서 발전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가 노모스적인 성격에서 볼 때 소프트웨어라고 한다면 문명은 폴리스적인 성격에서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문화'는 대중을 기만하는 기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생각이다.기성 종교의 객관적 권위가 상실되고,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마지막 잔재마저 해체되며, 기술과 사회의 분화와 전문화가 심화됨으로써 문화적 혼란이 초래되었다는 사회적 견해는 거짓임이 드러났다. 오늘은 어떻게 문화가 대중을 기만하는 방식으로 계몽을 변질시켰는지를 살펴보자.
문화산업, 대중기만
문화적 혼란의 초래에 관한 사회학적 견해의 문제점은 대표적으로 영화, 라디오, 잡지에서볼 수 있다. 그것은 문화영역에서 일어나는 유사성과 동질적 획일화를 확대시켜서 체계화 시킨다는 것에 있다. 보편 문화산업과 특수 소비자 개인의 잘못된 통일이 일어나면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의 잘못된 동일화가 만들어 진다. 또한 도시 중심과 주변 주거단지의 예처럼 대중문화의 이해서 독점되는 부분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영상물과 라디오의 상업적 경향과 허접쓰리게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다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모든 것은 의식으로부터 나온다는 말레브량슈와 버클리의 신의식Gottesbewusstsein과 마찬가지로 대중 예술에서도 모든 것은 컨텐츠를 만드는 제작팀의 의식에서 나온다.
문화, 주체
문화산업을 이끄는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재밌는 사실은 자신들이 독점한다는 사실을 은폐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독점은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따는 것을 숨기는 것이 당연한데, 문화산업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산업 관계자들의 조종과 수용은 부메랑효과에서처럼 체계의 통일성을 가지고 온다. 문화산업에서 나타난 기술적 합리성은 바로 자본을 통한 지배의 합리성이다. 오늘날 기술적 합리성은 지배의 합리성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중앙통제로부터 벗어나려는 개인적 욕구의 사전 봉쇄는 경제적인 선별 매커니즘과 최고 경영진의 생산과 허가의 확고한 방침에서 나타난다.
문화, 양화
강력한 산업 부문들인 철강, 석유, 전기, 화학과는 대비되는 문화산업을 보자. 문화산업의 무시무시한 통일성은 차이를 강조하고 선전하지만 그 목적은 각계 각 층의 소비자들을 분류하고 장악하기 위한 다양한 질의 대량 생산물을제공하면서 그들을 양화하기 위한 법칙의 실현에 있다. 생산절차의 도식주의는 자동차 모델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경쟁과 선택가능성의 가상화도 문화의 보편화 안에 속해 있다. 가상화과 되고 나면 이제 가치의 유일한 척도는 얼마나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가, 혹은 얼마나 포장을 잘 하는가에 달려 있다. 바그너의 '총체적 예술의 꿈'은 오늘날 '투자된 자본의 승리'로만 귀결되고 있다.
여가시간, 문화산업
사람들의 여가시간은 문화산업이 제공하는 획일적 생산물로 채워지고 있다. 칸트의 주체에 대한 기대감이 상실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소비자가 직접 문화적 생산물을 분류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과연 주체의 자유주의의 이상인 선택권과 같은 것은 보장받고 있는가? 대중을 위한 꿈을 상실한 예술은 비판적 이상주의와 멀찌감치 동 떨어진 저 몽상적 관념론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오락물의 내용은 변화 없는 반복과 상투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부분의 전체로부터의 해방과 반란의 획책 및 부조화가 문화산업에 만연해 있다.
문화산업, 비판
전세계는 문화산업이란 필터를 통해 이끌려진다. 그러한 세계는 현실세계와 사이버 세계가 나누어 진다. 오늘날 문화소비자들의 자발성이나 상상력이 위축된 이유는 무엇인가?민첩성이나 관찰력과 상당한 사진지식을 요구하는 문화상품은 역으로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소위 문화소비의 다원주의는 주어진 것들 안에서 투자된 자본의 제시물과 관련된 제한적 선택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진정한 양식과 인위적 양식의 싸움이 일어나고 이것은 과거에 보수주의적인 구분의 가능성만을 제시한다. 다시 말하면 인위적인 양식은 유지되고 그것 안에서 새로운 것을 계속 만들어내려는 것이 전략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전략의 목적은 당연히 대량생산을 통한 자본의 확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보편자와 특수자의 양 극단들의 음울한 동일성은 '미학의 내적 긴장'이 아니라 예술 전문가들이 스폰서나 검열관들 사이에서 비방과 줄다리기를 하는 '이해관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결과 보편자가 특수자를 대체할 수 있으며 그 역도 가능하게 되었다.
문화산업, 모방
과거의 진정한 양식은 왜곡된 양식의 모습을 통해 파악될 수 있다. 쇤베르크나 피카소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은 예술에서 하나의 약속인 양식을 '부정적 진리'로서 작품에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런 한에서 예술의 요구는 항상 이데올로기가 될 수 밖에 없다. 위대한 예술 작품의 양식이 옛날부터 자기부정에 이르는 좌절에 스스로를 노출시킨다면, 열등한 예술작품은 동일성에 대한 대용물로서 다른 작품과의 유사성에 매달린다. 문화산업에 오면 이런 모방은 절대적인 것이 된다. 산업사회가 문화산업을 완전히 포섭함으로써 비로소 문화의 이런 개념이 완전히 타당한 것이 된다.문화산업에 의한 문화 장악은 대중화의 반대하면서 개성을 오오하는 철학자들의 통일적 문화를 조소하면서 그 개념을 충족시키고 있다.
예술가, 문화산업
문화산업이 마주하는 저항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선 그 자신이 그 부류의 일원이 됨으로써만 살아남을 수 있다.전후 독일이 문화산업의 야만성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던 역설적인 이유가 있다. 예술가들에게 결정적으로 재갈을 물린 것은 심미적 전문가이자 사업가의 삶에로의 압력을 받는다. 오늘날 예술이 비합법적인 주민들에게 복종해야 함을 백 년 전에 분석한 토크빌의 타당한 분석을 주목해 보라. 기만당한 대중의 항상 동일한 것Immergleichheit에 대한 순응주의와 생산자들의 재생산이란 뻔뻔스러움이 동시에 존재한다.
동일성, 문화
항상 동일한 것이란 관념은 또한 과거에 대한 관계도 주재한다. 후기 자유주의적 단계에서 새로운 것은 새로움을 배제한다. 참신한 아이디어, 신선한 무엇, 경이로운 것과 같은 추세가 부추기는 것은 속도와 역동성이다. 하지만 기계적인 생산, 재생산 리듬의 보편적인 승리가 약속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며 부적합한 것은 아무것도 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산업, 유흥
문화산업의 오랜 요소인 유흥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문화산업은 유흥을 세련화 시키고 상품의 형태를 개선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외부에 있을 수 있는 진리를 소멸시킴과 동시에 자신의 내부에선 거짓말을 임의로 재생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산업의 승리는 이중적이다. 진지한 예술 혹은 자율적인 예술과 가벼운 예술의 분리 자체가 진리이다. 오늘날 문화 산업의 새로운 점은 문화나 예술이나 오락의 화해 불가능한 요소들을 하나의 목적 밑에 종속시켜 문화산업의 총체성이란 잘못된 틀 속에 포섭한다는 점이다. 결국 문화산업의 새롭게 하기는 대량 복제의 개선이자 기술에 의해 이룩된 효과적 존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이 그 시스템의 핵심이다.
유흥, 시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산업은 유흥산업으로 머물고 만다. 다만, 유흥은 더 많은 유흥의 추구에서 드러날 적대감 때문에 결국에는 깨지게 된다. 문화산업의 모든 경향들은 시장의 원리에서 그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1차 세계대전 직접 영화산업을 팽창시킨 물적 기반과 진설성 보다는 히트나 최근 1000만 관객에서 그것의 예를 볼 수 있다. 문화산업은 대중의 욕구에 부합하기도 하지만, 역으로 문화산업이 만들고 조장하는 대중욕구의 출현일 수 있다. 후기 자본주의에서 유흥은 노동의 연장이다. 과연 아침에 출근하고 직장업무 후 퇴근한 현대 직장인에게서 통일적 문화인은 가능한가? 삶의 곤궁과 압박으로 말미암아 진지함이 조롱거리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 사람에게 진지한 예술은 낯설고 사치일 수 있다.
문화산업, 기만
문화산업은 그 소비자들에게 끊임없이 약속한 것을 기만한다. 문화산업은 충동을 승화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한다. 예술작품은 절제를 알면서 수치스러워하지 않는다면, 문화산업은 포르노적이면서도 점잠을 뺀다. 과연 문화산업은 소위 긴장 이완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가? 유흥산업에서 웃음이나 유머의 의미는 '잘못된 사회의 웃음은 행복을 공격하는 질병으로서 행복을 그런 사회의 무가치한 총체성으로 끌어 들인다.'진정한 재미와 웃음은 육체적 위험으로부터 그리고 주어진 내적 논리의 올가미로부터 해방이다.
쾌락, 생산물
베르그송의 지적처럼, 삶이란 장벽을 돌파하는 것이다. 집단적인 웃음과 인류의 패러디화는 왜곡된 모습의 연대화이다. 기쁨은 진실한 것이다. '문화산업의 생산물을 즐긴다는 것은 무언가 사고하지 않는 다는 것이며, 고통을 외면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즐김은 삶의 무력감이며 저항의식으로부터의 도피일 수 있다. 문화산업의 최고 계율은 자신의 욕망을 만족할 수 없기에 불가능을 웃어 넘기고 이런 거세의 위협을 웃음으로 자족하는 것이므로 '쾌락은 단념을 부추기며, 단념은 쾌락 속에서 망각되고 싶어한다.'
거짓, 문화산업
모든 속박으로부터 풀러난 유흥은 예술에 대립될 뿐만 아니라 예술의 극단으로 교정역할도 수행할 수 있다. 문화산업은 타락이며 기성품적인 성격이 따라 다닌다. 의미를 제거해버린 문화산업의 틀에 박힌 이성은 '지성적 예술'에 저항하는 '육체적 예술'의 방어와 정당화다. 오늘날 문화와 오락의 융합은 문화의 박탈뿐만 아니라 유흥의 강압적인 정화Vergeistigung를 완수한다. 이제 문화산업은 내면성을 공공연한 거짓말로 만들어버렸고, 양식stil에서처럼 카타르시스에 관한 야만적 진리를 드러내게 되었다.
소비자, 욕구
문화산업과 소비자의 욕구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장사와 오락의 친화적 원리는 즐김과 현실적 고통의 망각이다. 여기서 무력감이라는 것은 저항의식으로부터의 도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우민화의 진보인가 아니면 지능의 진보인가?순진한 동일화와 하나의 개인으로서 각자는 절대적으로 대체 가능한 존재로서 절대적인 무적인 존재로 타락했다고 볼 수 있다. 시민적 행복이란 계산 가능한 노력의 결과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우연과 계획이 동일한 것으로 변모한다.
필연, 공허
문화산업이 제공하는 약속이나 삶에 대한 의미있는 설명이 적으면 적을수록 문화산업이 유포하려는 이데올로기도 필연적으로 공허해진다. 문화산업의 이데올로기는 천근같은 삶을 사진으로 재현하는 것과 삶의 의미에 관한 새빨간 거짓말으로 양분된다. 여기서 사진으로 재현하는 것은 카메라가 제공하는 여행지의 아름다움이며 새빨간 것짓말은 푸른 초원과 주유소의 결합처럼 자연과 기술의 동원된 조합이라고 볼 수 있다. Paul Apels 'Hans Sonnenstober'와 드라마 '아버지와의 생활'에 등장하는 기만적 즐거움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노예 주인, 변증법
현대의 공허한 이데올로기는 농담을 허용하지 않는 진지성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보장된 형식적인 자유는 주어진다. 사실 이 사회는 자신을 충실히 따르는 구성원들의 삶만을 재생산하기 때문에 사회에서 아웃사이더가 된다는 것은 가장 큰 죄라고 할 수 있다. 이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가상은 실제로 먹여 살리는 주체인 노동자들이 거꾸로 경제를 이끌어나가는 경영자들에 의해 부양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비극, 굴복
황금의 심장das goldene Herzen에 대한 강조는 사회가 생산한 고통을 인정하는 방식이다. 모든 사람은 이 체제 속에서 더 이상 스스로를 도울 수 없음을 알고 있고 이데올로기 역시도 이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 사회의 대중문화는 비국을 다룬다. 예전의 비극성이 지니는 역설적 의미가 '신화적 위협'에 대한 절망적 저항에 있었다면, 오늘날의 비극성은 동참하지 않는 자를 파괴하는 위협으로 축소되었다. 산업사회의 문화는 과거의 혁명적 또는 야만적인 본능을 길들이는 역할에 더해 사람들이 겨우 겨우 감당해내는 가혹한 삶의 조건을 부단히 연습시키는 역할도 한다. 이 사회는 낙담한 자들의 사회로서 그 때문에 갱단의 제물이 된다. A.Doblin의 '베를린의 알렉산더 광정'이나 H. Fallada의 'Kleiner mann, was tun'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모든 사람은 완전히 굴복하고 행복에 대한 요구를 포기할 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게 된다 비극의 유동성Liquidation이 개인의 폐지를 승인한다.
자기 유지, 유적 존재
문화산업에서 개인이란 관념이 환상적이게 되는 이유는 생산 방식의 표준화뿐만 아니라 개인과 보편성과의 무차별적인 동일성이 전혀 문제로 제기되지 않을 경우에 용납될 수 있다. 재즈 음악의 경우 규범화된 사이비 개성의 지배를 보자. 아노르노는 개인적인 것과 자아의 특수성이란 형식적 자유를 보편적인 경쟁사회라는 경제적, 정치적 경직성의 산물로 본다. '자기유지'의 계급적 형태는 모든 사람을 단순한 유적 존재의 단계에 묶어 둔다. 비록 유아 상태에서 개인으로의 개별화의 진보가 있었음에도 개인의 존재에서 인격의 통일성이란 셰익스피어의 햄릿 이래 가상임이 드러났다.
평균, 숭배
평균적인 것의 영웅화는 저렴한 것의 숭배에 속한다. 예술이 상품이란 사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진짜 새로운 것은 이런 사실을 내놓고 떠들고 다니며, 예술이 자율성을 포기하고 상품의 일원임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베토벤의 현악 4중주의 경우를 들어, 시장과 자율성의 대립적 모순을 은폐하려 드는 작품은 이데올로기로 전락함을 지적한다. 이상주의적 미학의 목적 없는 합목적성과 시장의 원리인 목적있는 무목적성이 대립한다. 예술의 효용성의 원리에서 해방이란 원리의 배반을 이야기한다. 적대적인 사회에서 인간이 예술작품으로 부터 얻고 싶어하는 효용이란 상당 정도 바로 효용없는 것의 존재 자체인데, 이 존재는 효용 속에 완전히 포섭됨으로써 폐기되는 것이다. 라디오의 무선방송이 갖는 위치는 유사하게 인쇄술이 종교개혁에 끼친 것과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민네이션, 문화
다시 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계몽의 의해서 시작된 문화의 생성과 변화 양상은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에서 살펴볼 수 있다. 문화라는 것은 '생활양식'의 근거해서 삶의 스타일과 선택에 관련된 일체의 양식이라고 보면 우리의 문화는 과연 우리 고유한 것이 있었는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 고유한 것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것도 고민하게 된다. 문화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촉진되고, 확대되며 사라지는가?라고는 고민을 할 때 많은 상상력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대중문화의 틀을 나아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럿것 같기도 한다. 계몽이 제대로된 길을 찾으면 문화도 대중 문화를 넘어서서 각자의 문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그럼 과연 대중 문화가 아닌 것이 있었는가?를 미디어시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생각해 보게 된다.
민네이션, 생각
문화산업에서 드러나는 대중문화의 병폐들은 개인들의 삶의 중심으로 더욱 들어온다. 삶에서 무엇이 자신의 것인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것이 유행인지가 중요해 진다. 유투버들이나 페이스북을 보면 좋아요 버튼이 자신을 입증하는 최고의 것이 된다. 그런데 이것은 인정투쟁 자체로 중요한게 아니라 그러한 인정투쟁 밑에는 자본의 논리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자본이 모든 것들보다 가치를 바꿔주는 신적인 존재로 올라가면 결국 자신이 신이 되기 위해서 자본을 사고, 자본을 산 만큼 가치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가진 가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은 동일하고 획일적인 구조 안에서 동일하다고 여기게끔 가치를 찍어내야 한다. 그렇게 할려면 삶의 기본적인 것들에서 중요한 것들까지 모든 것들이 동일한 가치로 환산되어야 한다. 따라서 자본보다 이런 가치의 환전을 잘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민네이션, 루소
오늘 우리가 살펴본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루소가 이야기하는 허영에 대한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이 허영이 생기는 이유는 도시에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이고 그러한 모임에서 비교의식에 의한 열등감이 생겨난다.열등감은 사람들에게 다른 이들과 같아지려고 하는 모방의 감정을 만들어낸다.이러한 모방의 감정까지 오면 이제 이것을 채워줄 것들이 필요하다. 그것은 지위나 명예를 만들기 위한 삶의 기본적인 요소들이 필요한데 그것은 다름아닌 패션, 뷰티와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칸트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정체성을 건드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체성은 결국 자본이라는 본질과 만나서 정체성의 상승효과를 만들어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민네이션, 유행
발터벤야민의 아케이드프로젝트에서처럼 유행이란 것은 어쩌면 계획된 것인지도 모른다. 문화에 민감한 사람일수록 유행에도 탄력적이 된다. 문제는 이러한 유행은 항상 자본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패션은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내고 차이를 만들어내는 문화적 민감함은 제품이라는 완성된 정체성으로 제공된다. 결국 '가치'로 단위로 환산된 인간의 이상은 가치와 가치의 교환인 자본으로 연결된다. 자본은 교환되는 순간 더 많은 가치를 가지게 됨으로 수단으로 사용될수록 더 많은 가치를 가지게 된다. 어느순간 자본은 자기스스로의 가치로 인간보다 더욱 현실을 움직이는 수단이 된다. 유행은 이 과정에서 많은이들의 마음속에 절대적인 가치들을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표출하게 만들고, 그것들에 대응하는 가치를 만드는 흐름에 넣는다. 자신들의 가치가 내면에서 꺼내져 나와서 외부의 제품과 대응하는 순간 이것을 소유하느냐 아니냐라는 문제 앞에서 내 자본이 얼마나 있는가가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민네이션, 방향
결국 방향의 문제가 된다. 어떤 방향으로 발을 내딛을 것인가? 진보의 방법은 계속 고민하고 있지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할까가 문제이다. 계몽의 변증법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성의 말머리를 돌리는 작업이 아니던가? 나는 잘 가고 있는가를 계속 돌아보는 자기객관화도 중요하다. 이런 자기객관화를 통해서 자신이 서 있는 좌표를 찍어보고 그러한 좌표가 과연 내가 가고자 한 것인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유행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의 부추김에 의해서 혹은 허영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닌지 말이다. 나는 '사랑' 안에서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더욱 즐거웠으면 좋겠다. 물질적인 것 뿐 아니라 생각하고 관계 맺는 것에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