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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Feb 22. 2018

계몽과 한계

계몽의 변증법_철학아카데미

20180221_철학아카데미

계몽의 변증법_임경석

반유대주의적 요소들_계몽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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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지점이다. 반유대주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왜 계몽의 한계를 만들어내는가?반유대주의를 생각할 때 그 뜻 자체로는 '부정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 같다.그러나 그것은 부정성을 담지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해석을 통해서 잘못된 방향을 잡은 것을 말한다.신화가 가지고 있는 공포와 미메시스라는 외생적 주체화를 튀어 넘을려고 이것을 유대주의라고 칭하고, 이것에 대한 반대를 반유대주의라고 했다.하지만 이것은 제대로된 반유대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라, 다시 말하면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서 반유대주의를 구성해 낸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것을 부정하는 상태인 것이다.계몽은 사실 그런게 아니다. 부정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긍정성이 있다는 것이고, 이것들의 관계는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변증법적으로 상승하여 새로운 대안을 만든다는 것이 계몽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반유대주의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계몽의 투사를 살펴볼 것이다.




반유대주의, 계몽


반유대주의antisemitismus는 두 가지 진실이자 동시에 허위의 대립적 입장으로 대변된다. 파시즘에서 유대인은 세계 행복의 부정적 원리로서 이 유대인의 근절에 의존할 만큼 대항인종gegenrasse을 의미한다. 반면 유대인은 민족이나 인종과 무관하게 종교적 견해나 전통에 의해 동화되지 않고 형성된 특정 집단만을 의미한다. 첫번째 입장은 유대인의 종족적 특징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그 진실성을 지닌다. 유대인은 절대 악das absoute bose에 의해 절대 악이란 낙인이 찍힌 '선택된 민족'이다. 지배의 절대적 대상으로 노동자나 노예와 달리 제거되어야 하는 희생의 존재로 전락한다. 또 다른 무기력한 소수파를 다루는 입장인 자유주의적 테제는 비록 이념으로서는 옳지만, 기존 상태에 대한 의심스러운 변명일 뿐이다.계몽과 지배의 변증법적 상호 침투이자 박해에 의해 동화된 유대인의 본질 속에서 왜곡된 질서의 본질인 폭력Gewalt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반유대주의를 필름으로 재현한 영화포스터. 한국에서는 잘 모르지만 전세계적으로 '반유대주의'는 뜨거운 감자처럼 핫한 주제였고 지금도 그렇다.



대중운동, 반유대주의


대중운동volksbewegung으로서의 반유대주의의 토대는 그 선동자들의 탐욕이 사민주의자들sozialdemkraten에게 퍼부었던 비난인 민중의 '동일하게 만들기gleichmacherei였다. 반유대주의의 지배를 위한 합목적성'은 백일하에 드러났다. 행동주의 심리학이 지적하듯 박해자의 행동은 의미 없는 반사 작용으로 의식으로서의 살인행위Ritualmord에 다름 아니다. 반유대주의의 행동 맹목성blindheit이나 그 무의도성intentionslosigkeit는 반유대주의가 하나의 밸브ventil로서 진리의 척도에 그 진실성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그 활동은 무방비 상태의 제물에 퍼부어지는 분노와 증오, 제 2의 천성, 조직화된 살인 집단의 거창한 이데올로기들, 이성의 섬을 집어삼키는 어두운 충동의 바다, 지구의 청소부로 등장하게 된다. 자유주의의liberalismus는 유대인에게 점유besitz는 허락했지만 명령권befehlsgewalt을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힘이 없는 행복이란 관념은 마치 돈과 정신을 점유하는 유대인 은행가와 지식인이 불구자로서 권력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추구한 최고의 목표wunschbild일뿐이다.


반유대주의 포스터, 낙인 찍히는 순간 동화된 유대인들로 부터 멀어지는 전통 유대인들. 이렇게 세상은 양분화된다.



부르주아, 반유대주의


모든 것을 사고파는 사회로 정치가 상업이 되고, 상업마저 정치가 되는 오늘날의 사회 모습은 유대인이야말로 고리대금업의 상업정신을 절대적으로 부상시킨 장본인이자 유물론이나 악행의 당사자로 규정한다. 부르주아적 반유대주의는 생산에 내재한 지배의 은폐라는 특수한 경제적 이유를 가지고 있다.지배자의 전형인 샤일록, 은행가, 무역상, 공장주 등은 경제 체계 일반의 착취적 본질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를 노동 계약이나 경제체제 일반에서 사용한다.희생양으로 유대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알 수 있다. 임금과 가격의 관계야말로 노동자의 정당한 몫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여준다. 아울러 소위 착취에 대한 책임을 생산이 아닌 유통분야의 상인인 대표적인 유대인의 독점분야가 떠맡게 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드는 필연적인 가상이다. 생산수단의 소유물로부터 배제와 동화 유대인이 출현한다.   동화 유대인이란 세례와 개종의 의미와 뿌리를 상실한 존재, 긍중유대인, 규대인의 복작안 카프탄 등을 입는 사람을 이야기한다. 항상 일등이 죄려고 하는 자들은 오히려 훨씬 뒤쳐지게 된다. 왜 유대인은 산업기사가 되었으며 자본주의로 인해 영락한 수공업자나 농민들의 눈엣가시가 되었는가?   유대인의 자기반성이라고 할 수있는 반유대주의는 스스로에대한 증오이자 기생적 삶에 대해서 느끼는 양심의 가책이다.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민족주의적 반유대주의는 인종과 국가의 순수성만을 문제 삼으며 반유대주의에 깊이 뿌리박혀있는종교적 요인을도외시하고자 한다. 공포의 관념과 유대교의신(책임과 처벌)과 기독교도의 신(은총의 신)간의 차이점을 보자.자연종교적 속박의 계기를 깨고좀 더 정신적인 형태, 즉 '주술의 정신화'에로 변형된 기독교(황제의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를 볼 수 있다. '정신의 본질'은 바로 이러한 독단적 주장이 자기 모순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원시인이 공포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만든 의식의 제도화나 유사한 유대교의 합리적인 터부들 및 기독교의 희생적 사랑의 허위성등이 독단적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두려움에 대한 방어기제로 '자기방어를 포기한다'라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특히 무엇에 대한 반대급부로 등장하는 급진적 민족주의는 더더욱 '반유대주의'와 같은 폭력성과 비이성적 광기를 띄고 나타난다.



자연의 지배, 사회의 지배


과거 인류에게 공포의 대상인 '자연의 지배'를 대체한 '사회적 지배'는 어떤 위협을 되풀이 하고 있는가? 자연의 지배는 정형화된 주술적 의식, 외적 자연의 육체적 모방, 자기유지를 위한 자연에의 동화라고 볼 수 있다. 사회의 지배는 과학과 수학의 공식, 정신과정의 자동화, 자기유지를 위한 죽음에의 동화이다. 현대문명의 공포에 찬 방어적 색조는 선견지명이 있는 합목적성이란 이름 아래 추진되었지만 사실은 맹목적 자연의 지배로 부터 연유된 것이다. 부르주아적 생산 양식에서 내재해 있는 '미메시스적 잔재'는 망각을 강요당한다. 정직하지 못한 태도인 찡그리므 표정, 표현이나 정치적인 반유대주의는 사실 가동시키는 '합리화된 이데오진크라지'라는것이다.마지막 휴식처마저도 평화로운 곳이 아니다. 공동묘지의 파괴는 반유대주의가 우연히 저지른 과도한 행동이 아니라 반유대주의의 본질로부터 나온 행동이다. 해묵은 선사 시대의 모든 공포가 유대인에게 투사되어 합리적 관심으로서 다시 복원되는과정은 끝을 모르는 길이다.문명은 자연에 대한 사회의 승리로서 이 승리는 모든 것을 자연으로 변화시킨다.




억압된 미메시스, 잘못된 투사


반유대주이는 '억압된 미메시스'의 병적 표현으로서 '잘못된 투사falsche projektion'에 기초한다. 억압된 미메시스는 낯선 주변 세계와 유사해지려는 친화의 태도라면, 잘못된 투사는자신의것이면서자신의것이라고 인정하고 싶지않은 주체의 충돌들을 객체의탓으로 돌리려느 태도인 희생양을 만드는 것이다. 어떤의미에서인간의 모든 지식은 투사이다. 그러나 개인의 형성과 더불어 감성적 삶'과 '지성적 삶'이 분화된 인간 사회에서 개인의 투사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다.  '생리학적 지각이론'과 '의식적인 투사'와 반대에 있는 '반유대주의적 투사'에는 반성이 결여된 병적요소가 있다. 정신분석학은 '병적인 투사'의 본질이 사회적으로 터부시된 충돌들을 주체로부터 객체로 전이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진리와 궤변의 위선적인 동일성'을 이용한 히틀러를 보라. 도달한 결론에 대한 지속적인 '부정'이 없이 어중간한 단계에 머물러 경직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식이 지니는 병적 현상이다.


아브라함의 '이삭 살해'는 예배의 미메시스라고 볼 수 있다.
미메시스. ‘모방하다’ ‘흉내 내다’라는 고대 그리스 단어다. 하지만 ‘미메시스’란 단순한 모방을 넘어 자연을 모방하는 예술적 행위로 더 유명하다. 특히 플라톤의 해석은 인상적이다.

폴리테이아(The Republic)에서 플라톤은 질문한다. 우리는 어떻게 다양한 침대들을 모두 ‘침대’라고 인식할 수 있을까?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물체와 아이디어는 ‘이데아’ 세상에 있는 완벽한 존재들의 그림자일 뿐이다.

모든 침대들은 어차피 이데아 세상에 존재하는 완벽한 침대의 투사적 존재이기에, 그들의 동일함을 인식할 수 있다. 이데아 세상에 이미 존재하기에 우리는 상상할 수 있고, 상상한 침대를 만들어내는 목수는 완벽한 침대를 모방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미 모방된 침대를 또다시 그림으로 그리고 시로 표현하는 예술가는 모방의 모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진실은 오리지널에 있고, 모방은 왜곡이라면, 모방을 모방하는 예술은 진실을 두 번 왜곡한다는 말이다.

원문보기: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1/06/2015110601230.html#csidx8070663b03edb80be835e57456a33e5



사유판단, 본질


무언가를 확언하는 사유 판단의 본질은 단순히 고립되고 상대적인 단순한 주장이나 확고부동한 판단과 구분되는 '부정성'의 부단한 능력이다. 정신의 잘못된 투사 가능성인 자유와 교양의 왕국에 대한 약탈자와 어설픈 교양인의 징후인 편집증이 바로 계몽의 한계이다. 정신의 계몽과 인간의 실질적 해방의 간극 속에서 병을 앓는 교양이 존재한다.    모든것을 규율과 통제 속에 집어 넣어 개인을 사라지게 만든 파시즘에서는 양심마저도 해체된다. 양식의 능력은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와 내적인 상상력이 내부로 침투해 들어가는 과정인 반성의 능력이다. 증오는 화해의 부정적 측면이다. 조급함으로서의 '증오'와 기대'로서의화해가있다. 반유대주의란 잘못된 투사에 대항하는 대항운동의 발걸음은 무엇인가? 이러한 상황이 바뀌려면 피지배자들이 절대적 관기에 직면하여 거기에 당당히 맞서면서 정지를 요구할 수 있을 때 불행의 제물이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계몽이 바로 반유대주의의 전형, 타락한 이성 혹은 잘못 투사된 계몽이다.



계몽, 변증법


반유대주의자들의 선술집에서 논해지는 정치와 그 거짓말이 폭로되었다. 판단은 더 이상 변증법을 구체적으로 수행하면서 얻어지는 '종합' 위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을 무지막지하게 보편적 개념 밑에 밀어 넣는 포섭'에서 이루어 진다. 개인을 대신한 사회의 경제적 충동 매커니즘에 의한 운영이 만연해지고 있다. 광기를 넘어가는 계몽의 변증법이 필요하다. 부정하는 힘, 견뎌내는 힘, 다시 돌아보게 하는 힘이 바로 제대로된 계몽이고 이것이 변증법을 통해서 새로운 주체를 만들고 새로운 이념과 개념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스스로 강력하고 권력화된 계몽만이 계몽의 한계인 잘못된 투사를 분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이디오진크라지, IdeoSynKrasie


모든 반유대주의자들의 해묵은 대답은 이디오진크라지라는 자기방어적 개인적 성벽, 특이적체질, 병적 혐기에 호소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디오진크라지라는 것은 Ideo(Eigen) + Syn(zuammen) + Krasie(die Mischung) 즉 Eigentumlichkeit라고 할 수 있는 자기방어, 자기통제 상실을 말한다. 이것은 말미잘이 외부의 공격이 왔을 때 완전히 움직임 자체를 비활성화시켜서 생명자체를 포기하는것과 비슷하다. 디프네처럼 움직이지 않는 공간은 절대적인 소외이다.


여러가지 다양한 이디오진크라지가 나타날 수 있다. 해파리의 변화처럼.
이디오진크라시idiosincrasy라는 말이 있다. 고대 그리스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번역이 까다로운 단어라 지역마다 의미가 다르지만 대략 영어위키로는 이렇게 설명되고 "an idiosyncray is anusual feature of a person. it also means odd habit. the term is often used to express eccentricity or peculiarity", 스페인의 위키는 "유전적으로 물려받거나 살아오면서 얻은 개인 또는 사회적 성격 또는 식별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보통 한국에선 '특이체질, 병적혐오감'등으로 번역되는데, 병적 혐오감 같은 경우엔 혐오감이 지나쳐서 병이 된다는 뉘앙스가 숨어 있다. 이디오진크라지는 그 자체로 선한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게 있고 때론 그걸 존중해 줄 필요도 있다.

아도르노는 이 이디오진크라지가 나쁘게 발현될 때, 그러니까 위생이나 청결 감각이 지나쳐 자신과 타인을 밀어내기 시작 될 때, 개인의 특정한 성향을 가지고 대상화하여 자신과 구분짓기를 시작할 때 문제가 된다고 보았다. 더 문제가 되는 건 그러한 대상화를 통해 자기 자신 마저 사물화reification 시킨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귀결은 아우슈비츠. 그것은 유대인과 집시와 행려자와 장애인들을 '순결','순수'라는 명목으로 싸그리 모아 청소해버릴 때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과학'이라는 담론으로 포장 되었다.

아도르노는 진리는 뭔가 비뚤어진 것, 감추진 것, 모호한 것, 이상한 것, 그늘 진 것 등의 negative한 것에 있다고 보았고, 그것이 아닌 정상적인 것, 주류적인 것, 확실하고 양적으로 평균화시킬 수 있는 것, 일반화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 그것의 고유성을 지워내 대체가능한 것으로 만든 것, 규율화된 것 등을 대상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시장원리에 의해 쉽게 교환가능하게 된 것 등을 대상으로 하는, 그러한 실증과학positivism에 반대negative하였다. 그것이 아도르노의 인식론, 즉 negative dialectics 부정변증법이다. 죽음을 지워버림으로써 삶이 지워지고, 더러움을 지워버림으로 깨끗함이 지워지고 그늘을 지워버림으로 햇볕이 지워진다. 이런  '순수무결하여 이상화된 상태'를 '키취kitsch'라고 하며 그러한 상태를 잉태하는 사회구조를 살펴보는 것이 현대의 중요한 예술론이다. 이러한 담론이 바로 바르트의 '탈코드'이고 벤야민의 '진리는 의도의 죽음-신적 폭력'이고 지젝의 '탈상징계'고 김지하의 '흰그늘'이다.

참고_http://egloos.zum.com/sweattablo/v/4809064



 


민네이션, 생각


반유대주의가 과학이나 새로운 사상을 담아내는것 같지만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듯 두려움에 대한 반대급부로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반유대주의는 계몽의 한계를 지우고 계몽을 타락시킨다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말하는 것은 역사 초기에 신화가 가진 두려움을 몰아내는 방식으로 사회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타락하게 되어서 자본화되어 버렸다는것이다. 그 말은 두려움을 몰아내는 방식이 더 소유하는 방식이라는 방법으로 변경되었다는 것이다.이것이 바로 유대주의가 가진 신화적인 신적 권위를 벗어버리기 위해서 반유대주의를 추구했지만 이것이 사실은 자본주의로 변경되면서 인간은 더 큰 곤경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가바로 '자본에 동화된 유대주의'라고 할 수있다. 중요한 건 반유대주의라고해서 유대주의를 완전히 없셀 수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부정적인 유대주의는 항상 존재하지만 마치 이것과는 다르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유대주의로 반유대주의를 이야기 한다는 것이 모순이라는것이다. 부정적인 존재는 없애지지 않고 없앤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들. 반유대주의가 히틀러를 만나서 600만명의 희생자를 냈다.



민네이션, 투사


계몽은 정신이 현상과 만서 새로운 변증법을 만들어내는 진리에서 탄생한다고 하면 여러가지 고민이 생긴다. 정신은 무엇인가? 현상은 무엇인가? 변증법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현상학을 거치면 '교양'이라고 말하는 문명이나 계몽을 누릴 수 있는 주체가 생기는가? 이러한 정신현상학은 사실은 분석적인 것과 통합적인 것이 동시에 있지만 잘못된 투사는 이해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분석을 하고 이러한 분석을 진리로 믿어 버리면서 문제가 생긴다. 그렇다면 제대로된 투사는 어떤 것인가? 부정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멈출 수 있는 힘을 내면에서 탑재하고있는 것을 말한다.    긍정의 무한이 아니라 부정의 변증법을 통해서 계속 돌이키고 물어보는 힘이 계몽의 힘이라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반유대주의나 자본주의는 잘못된 투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민네이션, 한계


아노르노와 하이머의 한계는 '부정의 변증법'만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한 부정을 선언할 수있는 주체는 어떻게 탄생하는지에 대한 대안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사회운동이나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쿠제 같은 경우에는 사회에서 이러한 부정성을 만들어내는 주체는 부랑아, 학생, 소외된자들, 장애인이라고 말하는 급진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계몽의 변증법'에서는 거기까지 가지는 않는다.     


선민사상을 현대에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말그대로 계몽의 변증법을 부정의 변증법으로 사용했을 때, 온전한 이성이라면.



민네이션, 비판학파


프랑크프르트학파가 가지고 있는 이성을 통한 이성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이성을 통해서 이성을 극복하는 것은 이성자체를 수단으로 두는 방식이기 때문에 이것 역시 계몽이 제한되거나 잘못된 투사가 되는 것은 아닌가?     바로 이 지점에서 위르게 하버마스가 나온다. 도구적으로 전락해버린 이성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하버마스의 전략이었다. 현대성이라는 것은 그래서 이성이 도구화된 상태이다.그리고 그러한 현대성은 자본과 쉽게 결탁하고, 두려움에 대해서 쉽게 방패를 치게 한다.그러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아니고, 운동과역동성을 만들어 낼 수 없다.하버마스가 말하는 현대성의 담론에 옳은 방향은 무엇인가?       


반대유주의는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계몽은 아직도 잘못 투사되고 있는 것이다.

민네이션, 안티세미티즘


반유대주의가 가지고 있는 폭력성은 유대인들을 차별하는 것을 넘어서 살해하고 없애버리기 까지 한다.이것이 단적으로 보여주는 계몽이 잘못 투사되어서 '계몽을 사용했다면 절대 폭력이 드러나지 않아야 하는데' 살인까지 발생하는 것이다. 이성의 광기가 살해와 폭력을 낳고 있음에도 반유대주의가 이성의 결과였다고 말하는 모순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오기

반유대주의가 가지고 있는 계몽의 한계까지 돌아보면서 계몽의 변증법의 4가지 구성 중에 3가지 구성까지 살펴보았다. 이제 다음시간에는 계몽의 회복을 위한 아도르노와 하이머의 스케치를 돌아보면서 계몽의 변증법을 나올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은 다시 말하면 '부정의 변증법'이다. 계몽이 회복하기 위해서는 부정성을 그 자체로 놓아두는 '부정의 변증법'의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성으로 이성을 회복하는 내적 질서'로서 아도르노와 하이머의 대안이다. 이제 마지막을 준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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