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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Feb 23. 2018

무한과 유한

알랭바디우 존재와 사건_철학아카데미

20180223_철학아카데미

알랭바디우 존재와 사건_홍기숙

성찰 26_양 개념과 존재의 난국



들어가기

오날부터 바디우의 존재론의 핵심인 ‘양과 지식’에 대해서 알아본다. 여기서 바디우는 자신의 관점에서 ‘구성주의’의 한계와 문제점들을 비판한다. 양과지식의 6부에서는 식별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대해서 라이프니체와 괴델에게서 찾고 있다. 논리주의, 형식주의, 직관주의의 구분에서 굳이 이야기하자면 바디우는 형식주의와 실재론에 입각해서 직관주의의 반대편에 있다고 보면 된다. 피터회원들이의 바디우에 관한 글을 참고하면 ‘양과 지식’에 대한 관점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존재, 순수다수


존재를 순수다수 혹은 일자 없는 다수로 사유하는 것은 그러한 사유를 양 중의 하나와 연관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존재는 내적으로 한정 가능한가?또는 다수의 현시의 형식이라고 현시되는 것과 양적 확장 사이에는 본원적 연관성이 존재하지 않는가? 우리는 카트에게서 그가 ‘직관의 공리들’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적 원리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모든 직관은 외면적 크기다’라고 하는 칸트의 주장을 바디우는 내재적이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다. 순수 다수 속에서 이 다수의 현시 중 존재인 것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칸트의 공리들과는 대칭적으로 모든 현시는 내재적으로 양적으이라고 상정하지 않는가? 모든 다수는 가산적인가?


베이컨의 신체없는 기관은 칸트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직관, 내제


바디우가 말하는 숫자, 연역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넘어서는 것들이다. 모든 것은 집합이고 다수로 되어 있다는 것이 바디우가 주장한다. 이러한 것들을 칸트처럼 외면적 크기라고 보지 않고 내재적인 것이라고 한다. 진리가 등장하는 순간 이전의 시간이 정지하고 진리 이후에는 아예 새로운 시간이 도래하는 것이다. 공간 역시도 일정한 외적 직관에서 벗어나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바디우는 상정하고 있다.  



칸트, 잡다


칸트는 ‘크기의 순수한 도식은 수이다. 따라서 수는 도일한 종류의 직관 일반의 잡다함의 종합의 통일에 다름 아니다’라고 말한다.

다수들의 순수 다수로서 현시의 존재론적 기본꼴은 또한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종류의 것이다. 그리고 일자-결과에 종속되어 있는 한 그것은 또한 잡다함의 종합이라고 하다.따라서 존재의 본질적인 수적 성격이 존재하는가?


칸트의 인식론은 철저하게 보이는 것을 인식하는 주체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 진리가 등장할 공백은 없다.



인식, 부분


사물들에 의해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하면 바깥에서 들어오는 결과로서 나의 인식이 자리잡힌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인식의 틀이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나아가는 인식론인 것이다.

부분의 합이 전체의 합보다 크다는 칸토어의 정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생각해 보라. 이전까지는 부분의 합은 언제나 전체보다 작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이 칸트식의 생각이었으나 바디우는 칸트의 반대로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크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바로 ‘무한성’ 개념이 등장하는 것이다.



무한집합, 양적비교


칸토어의 핵심적인 생각 중의 하나는 무한한 다수들의 비교를 위한 규약을 제안하는 것이었다.단순한 숫자가 있는 만큼 많은 제곱수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저 오래된 유클리드의 공리,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는 공리가 위험해 진다. 다수에 대한 집합론적 원리는 다수를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전제와 부분에 대한 직관에 의해 정면 공격을 받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이것의 양 이론을 반칸트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우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용인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무한한 다수들의 관한 정수들 속의 제곱수들처럼 포함되는 것이 그것이 포함되는 것만큼 많은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한 약분가능성은 무한한 양들을 비교하는 데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인 대신 그러한 양들의 특수한 속성이 될 것이다.


무한한 것들에게 연역적으로 양의 개념을 부여하면 이와 같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같은 신체없는 기관 같은 표현도 가능해진다.

대상, 진리


바디우의 의해서 진리는 공백에서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반대로 말하면 공백이 아니면 진리는 등장할 수 없다.진리는 언제나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새롭지 않는, 이미 연역적으로 상정된 ‘드러남’의 공간에서 등장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재현되는 진리의 해석이라는 뿐이다. 대상이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신체없는 기관’이라는 들뢰즈의 논리와 대칭적으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칸트는 ‘외면적 크기’라는 것으로 보여지는 사실에 의해서 존재를 이야기하지만 바디우는 그러한 대상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대상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 완전히 다른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함수, 순수다수


수천년 동안 수학은 이 학문의 대상의 추상적 특이성, 수와 도형에 의해 규정될 수 있으리라고는 믿었죠 왔다.

객관성에 대한 이러한 추정은 수학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존재의 망각의 양식이다. 수학의 특수한 소명인 현시된 일반의 담론으로 현시된 존재로서의 존재이기에 기반해야할 소명에 대한 인식의 주요한 장애물을 형성해 왔다.다시 말하면 수학은 사실은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면서도 존재가 존재하는 방식을 ‘숫적’으로 변환시키기 때문에 존재를 망각하고서 함수와 존재를 연결한다는 것이다.


숫자들의 집합이 축적되면 무한집합이 된다.



임의의 다수, 자연적 다수


모든 임의의 다수에 대해 동일한 집합의 원소 수를 가진 자연적 다수의 표지가 존재한다. 자연이 존재를 잰다는 것이 그것이다. 자연의 실재로 보여지는 부분에서, 존재하는 양태로 부터 존재가 수학적으로 잴 수 있는 상대로 대응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인간은 자신의 존재방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임의의 다수와 자연의 다수는 일대일로 대응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무한, 기수


기술이라는 집합론의 핵심 자체를 형성한다. 수학자가 자연적 다수인 이름은 망각한 체 기교의 세련됨을 펼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집합론의 한 탁월한 전문가는 이렇게 쓴 바 있다. “실천적으로 말해 집합론의 가장 큰 부분은 무한 기수에 대한 연구이다’ 무한이 무한히 증식되는 것이 자연의 핵심적인 목적이다.이것이 어떻게 바디우의 철학과 연결되는가? 바디우는 여기서 무한한 기수를 덜무한한 기수와 더 무한한 기수로 표현하는 칸토어의 정리를 가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이 목적하고 있는 대상은 무엇인가? 바로 ‘일자는 없고 순수다자만 존재한다’라고 하는 것을 무한의 개념을 칸토어 정리에서 가지고 오는 것이다. 이렇게 무한한 존재로서 순수다자는 공백 속에서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는 진리의 주체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무한도전은 사실 무한의 개념이 항상 더 있음에 근거하고 인간의 행동이 무한함을 증명하는 프로그램이다.



상황, 상태


상황의 상태가 양적으로 상황 자체보다 크다. 모든 사유의 질서 속에서 상황과 그것의 상태 사이의 ‘양적’관계 또는 미합의 원소 수의 관계를 검토해 보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상황은 일자-다수들을 현시한다. 상태는 그러한 다수들의 부분들 또는 합성을 재-현한다. 상태는 상황이 일자-다수들의 현시하는 것보다 ‘더 많은’ 또는 ‘더 적은’ 부분-다수들의 현시하는가? 상태는 최소한 상황만큼 숫자가 많은을 지적하자. 집합의 부분들의 집합의 기수는 집합의 기수보다 작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이유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어떤 집합의 원소가 존재한다면 그것의 단집합은 집합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집합은 모든 현시된 원소에 ‘대응하기’ 때문에 최소한 원소만큼 많은 부분이 존재한다. 상황이 발생하면 그에 대한 여러가지 상태들이 발생한다. 상태들이 발생하면 상황은 발생되어 이미 남아 있기 때문에 추가되는 상태들이 더해진다. 따라서 상황자체보다 상황의 상태가 더 큰 것은 당연하다.



바디우, 리쾨르


바디우의 리쾨르를 연결해보려는 해석학적 시도는 실패할지도 모른다. 해석학은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들의 관계를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석학은 보이지 않은 것들을 보여지는 형태로 받아들여야 하고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글이고 문자이고, 숫자이다. 이러한 해석학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항상 사건 이후에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디우는 먼저 문자나 숫자로 치환될 수 없는 사건을 일으키는 진리는 무한이다.무한이라면 것은 숫자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고, 문자적으로 치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건은 그 당시에 우리가 보는 것들, 느끼고 경험한 것들이고 이것이 문자로 치환되는 순간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진술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진술은 진리 자체를 담을 수 없기 때문에 해석학은 진술의 영역에서 진리를 미메시스적으로 모방하려고는 하지만 절대로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디우의 리쾨를 진리로 묶는 작업은 실패할지도 모른다.


리쾨르의 의지에 의한 주체의 철학은 바디우의 순수다자와 다르다.





민네이션, 숭고


롱기누스에게서 그리고 칸트에게서 직관은 외적인 크기에 달려 있었다. 크고 장엄한 것들이 사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숭고의 기본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나가는 직관이 다시 가지고 안으로 들어온 숭고의 개념이다. ‘무한’을 셀 수 있는 것으로 상정한 수 시간의 축적으로 그것을 전부 알게 된다는 것을 가정하면 숭고의 개념도 결국 무한까지 다다를 수 있는 이해가능한, 그러나 시간이 걸리는 대상이 된다. 숭고하다면 것은 그래서 매우 쉽게 자본의 논리에서는 많은 수, 다수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숭고가 만약 외부로부터 주어져서 정리할 수 없고 분석할 수 없는 것들로 정의된다면 그것을 셀 수 없는 것들이 되고 계몽주의나, 이성의 역할의 범위를 넘어서는 ‘불확실성’의 영역이 된다.이러한 불확실성의 외연인 숭고’의 개념에서는 그 숭고한 대상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면서 신화처럼 경배하거나 금기처럼 저주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그렇다면 숭고한데 개념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하는가? 여기에 바로 칸트와 바디우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다.


문제는 외연적 크기를 숭고로 놓는 순간 자연스럽게 외연들의 위계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민네이션, 순수다수


바디우는 칸토의 정리를 가지고 와서 ‘부분의 합은 언제나 전체보다 크다’라는 인식론적 전환을 이룬다. 순수한 다수라는 것도 존재론적으로 동일성을 가진 존재로 전제하기 때문에 다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양개념, 셈개념 다시 말하면 기수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순수다자는 이러한 존재론적 동일성을 가진 존재인데, 연역적으로 생각하면 재미있게 된다. 그것은 순수다수가 보여지는 세상에서 뿐 아니라 존재의 내면에서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순수다수는 공백에서 등장하는 대상없는 존재이고 정해지지 않은 주제인데, 그것이 현시되는 것으로써 현실에서 뿐 아니라 개인의 내면에서도 순수다수로 존재하는 것이다.이러한 내면의 순수다수들을 살펴보고 그것들을 연결하는 작업을 통해서 존재를 화해시키는 작업을 한 사람이 바로 인간 중심의 상담을 이야기한 ‘칼 로저스’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민네이션,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사실 숫자의 학문이 현상에서 몸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무한의 가치들을 셀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숫자를 가지고 오고, 이것이 셀 수 있는 숫자의 테두리 안에 시대마다, 공간마다 다르긴 하지만 어떤 가치들을 가두어 넣는 것이다. 1000원이라는 숫자가 1000번 헤어진다는 개념이 지폐에 담기게 되면 그것은 어떤 작은 가치1이 1000번 모여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매우 놀랐지 않은가? 가치에 숫자를 부여하여 외연을 정한다는 것은 무한을 유한의 개념으로 끌어내린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그러한 유한의 개념으로 끌어내린 후에 더더욱 비교를 통해서 교환의 관계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가치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로 자본화하여 치환되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물화’라고 하는 외연이 지배라는 세상이 현실에 도래하면서 결국은 가치의 세상을 질식시킨다. 이런상황에서는 칸트가 말하는 인식론으로 실천의지를 통해서 세상에 자신의 의지를 실천한다고 해도, 그것을 받은 물화된 세상은 잡아 먹는것처럼 흡수해 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루소가 말하는 ‘일반의지’라 할지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무너지지 않은 이유이다. 수와 무, 무한의 관계를 규정하고 그것들의 관계들을 다시 풀어주지 않는 이상 자본주의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키키스미스의 기관들을 보고있노라면 들뢰즈가 말한 신체없는 기관이 생각난다.

민네이션, 바디우


지금까지 이해한 바디우의 개념으로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비판, 교수법에 대한 비판이 생긴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진리가 등장할 ‘공백’을 지우는 방법으로 교수법이 ‘일자’의 방식을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교실에서의 독재는 ‘답’이 존재하는 일정한 형식을 주입하는데 있다.주입이라는 것은 ‘일자’를 인간 내면의 공간에 끼워 넣는 것이면, 현시되는 현실에서도 자신의 목소리(그것도 자신이 고민한 목소리가 아니라 그렇게 자신이 배웠던 일자의 목소리)만 남게 만드는 것이다. 각자의 공백이 내면과 현실세계에 존재하는데 그것을 숫자나 문장으로 치환해 버리는 일자의 논리가 바로 주입식 교육의 핵심인 것이다. 한국의 경우 ‘제국주의의 규범’과 ‘일왕숭배’의 ‘일자’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주입식 교육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이름대신 ‘1번’이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바디우가 이야기하는 ‘공백’의 존재, 진리가 사건으로 드러나는 것’도 역시 공백 자체를 메워버리는 일자’의 목소리인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을 기술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를 떠난, 사건 자체와 멀어진 분석이나 해석이라는 것이고 이것을 듣는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이 아니라 위대한 철학자가 이야기한 ‘일자’의 공백의 도래를 기다리는 방식으로 진리를 찾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베이컨의 기관 없는 신체를 보라



민네이션, 양자역학


실재계, 현실에서는 오히려 수학이 가지고 있는 고전물리학보다 불확정의 원리를 가지고 있는 양자역학의 측면이 더 많다. 그러한 변화는 오히려 무한의 개념을 수학의 개념으로 가지고 오는 칸토어의 정리에서 힌트를 얻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일자로 존재한다는 것을 뒤집어서 순수다자가 있다는 것, 더욱이 이것이 무한의 개념과 연결되어서 더 무한인 것과 덜 무한인 것이 있다고 하는 것들은 잴 수 없다는 의미에서 순수하고 그것이 무한하기 때문에 다자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양자역학이 가지고 있는 개념 중에서 ‘형질변환’도 마찬가지이다. 무한의 개념을 변증법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일정한 양이 모이면 질적 변환을 이룬다’라고 하는 것은 일정한 양이 모여서 일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다수가 드러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민네이션, 디지털


디지털을 바디우적으로 보자. 그러면 1이라는 것과 0의 끊임없는 나열이 1바이트에서 1메가, 1기가, 1테라고 무한의 개념이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재미있게도 1이라는 일자’의 논리와 0이라는 무한의 논리가 연결되면서 존재들을 담아내는 메타존재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아날로그는 1, 2, 3으로 나아가는 가수들의 증거이기 때문에 유한하다. 그래서 시간을 예측할 수 있고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그러나 디지털에서 1,0의 반복은 프랙탈처럼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디지털에서는 오히려 제곱수’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1,0의 반복이라는 의미에서 이것은 무한을 0이라는 덜 있음과 1이라는 더 있음’에 멈추지 않고 다시 0이라는 덜있음(그러나 이전의 1보다는 더 있음, 그러나 0이라는 무한으로 다시 돌아오는)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1을 만들고 다시 0으로 돌아오고 다시 1로 갔다가 다시 0으로 돌아오는 과정의 무한 반복인 것이다.


디지털과 양자역학은 무한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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