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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Feb 26. 2018

인상과 감각

베르그송철학_철학아카데미

20180224_철학아카데미

베르그송철학_류종렬

자아의 두 측면


들어가기

공간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가? 인간은?자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라고 하는 것은 2층에서 3층으로 가는 형상철학의 고민이다.그렇다면 심층철학은 무엇이라고 질문해야 하는가? 바로 ‘나는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이 질문은 사실 한나아렌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도 나온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신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신 앞에서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어거스틴에게서 나타난 사랑의 개념’을 썼다. 이제 베르그송에게서 우리는 자아’라는 것이 이미 인간을 상정한 개념이 아니라 자연에서 표상화되는 ‘코라’에 투영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돌아볼 때가 되었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직접이라는 것은 언어를 거치지 않고 바로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언어가 아니면 무엇인가? 인상-감각-감정’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등장한 3층 철학.



자아, 두 측면


다수성의 두 형태, 즉 지속의 매우 다른 두 평가 의식적 삶의 핵심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다수성은 의식의 다수성도 있지만 자연의 다수성도 있다.다수성은 바디우로 보면 의식의 순수다자가 있을 수 있고, 자연의 순수다자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이것이 위로부터 아래로 다시 말하면 의식에서 현실로 투사되는 시뮬라크르가 있고, 자연의 근원에서 현실로 투사되는 바로 아래로부터 위로 투사되는 시뮬라크르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층위의 위와 아래의 개념이다. 형상철학은 현실을 2층으로 놓았을 때 2층 바닥에서 3층으로 가는 길이다. 물론 반대로 3층에서 2층으로 내려오는 길일 수 있다. 심성철학은 당연히 반대로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거나 1층에서 올라오는 것을 말한다. 바로 자아는 2층에서 3층으로 가는 한 측면이 있고, 1층에서 2층으로 가는 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플라톤 독해는 시작에 불과하다. 플라톤의 세상은 오직 형이상학적 형상철학일 뿐이다.



고전적 시간, 존재


서양의 고전적인 존재 개념은 변하는 것의 존재를 참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흘러가는 것이여서 불확실한 것을 정지시키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존재를 고정되고 불변하는 것으로 세고, 그 다음에는 숫자개념과 함께 축적과 사칙연산이 가능한 물화가 진행된다. 이러한 흐름에서 모든 존재는 명명된, 명시된 존재이기 때문에 경계가 분명해 진다. 존재로 증명된 것들은 ‘개인주의적 선언’으로 인해서 침투나 겹칩은 불가하고 오직 연결만 가능해 진다고 보는 것이다. 자아를 고정해 놓는다고 가정하고, 시간을 보면 시간의 흐름을 볼 수 있다는 관점이 생긴다.존재는 멈춰있고 시간이 존재 주변을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그렇게 되면 존재자체는 영원의 존재가 되고 존재를 둘러싼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분절된 개념이 생성되는 것이다.서양철학은 지금까지 형상철학의 주요한 흐름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고전적인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베르그송은 이것을 재정의한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우리의 존재론. 과연 언제 지상으로 돌아오는가



베그르송, 시간


베르그송의 작업은 시간에 대한 고전적인 존재론을 무너뜨린다. 베르그송은 시간을 고정 불변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변화한다고 생각했다.또한 고전적인 시간 개념에서는 시간과 수를 연결했지만, 베르그송은 시간과 수를 분리한다. 플라톤은 수의 특성을 시간에 덧입히고 나서는 시간은 수에 따라서 셀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이 운동의 수로 셀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어쩌면 바디우가 거론했던 ‘자연이 의식을 센다’라는 개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베르그송은 시간은 분절될 수 없는 것이며, 상호 침투하는 것이며, 공간적인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운동 역시 공간적인 것일 수 없고 시간을 이해하는 것처럼 공간도 변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개념적인 영원’에 대해서도 지속적이며 살아서 흐르는 생명의 영원성만을 인정한다.  




베르그송, 방법


베르그송은 철학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직관이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직관’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 역시도 직관’을 이야기 했다. 데카르트에게서 직관은 명석판명하고 가장 단순해서 모든 지식의 기초가 되는 것을 자아의 의식에서 찾아내는 작업이다. 또한 데카르트의 직관은 그 직관된 명제에서 다른 명체즐 찾아내는데도 찾아내는 직관이다. 생각하고 있는 자아를 직관한 후 신관념이 사유하는 존재로서 나에게 있음을 직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직관’은 참된 지속을 찾아내는 일에 상요된다고 주장한다. 베르그송의 직관에 대한 생각은 분석이라는 방법과의 비교를 통해서 잘 드러낸다. 데카르트는 직관을 통해서 복잡한 개념과 사물을 분해하고, 하나하나 분석해서 다시 이것들을 종합하는 과정을 통해서 사물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이런 데카르트의 방식은 철학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말한다. 일단 어떤 사물을 분해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공간이 필요하고 그 공간은 고정되어 있어야만 한다. 분해한 요소들을 열거하기 위해서도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분해해 놓았다고 해도 이것이 본래 있던 전체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고정된 방법론stock은 흘러가는 것flow들을 절대 인식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바로 직관을 통해서 이렇게 흘러가는 것들, 지속하는 것들, 운동하는 것들을 인식하고 감각하고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이야기한다. 분석은 언어와 수학을 사용해야 하지만, 직관은 언어와 수학을 사용하지 않아도 시간과 공간을 인식하고 감각하고,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베르그송의 이야기이다.





민네이션, 생각


언어는 분절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려면 움직이는 것을 표현하지는 못하고, 항상 고정되고 불변하는 것으로 상정해야만 한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을 구성하려는 것은 사실 인간을 전체로 보는 것이 아니다. 일부분만을 본 것이고 숫자로 나누어진 시간개념에서 현실을 대응하지 못하는 거짓자아가 될 가능성이 많다. 베르그송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 사실은 인간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사건에 대해서 인상impression이 있고, 그러한 인상은 곧 감각기관에 의해서 감각되고sense이것들이 감정이 되는 것이 베르그송이 언어를 거치지 않고 자연과 현상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원자와 퀄크 그리고 근본적인 물질에 대한 논의들




민네이션, 꿈


시간도 마찬가지고, 존재도 마찬가지고 정해진 개념으로 놓고 보면 이것은 자체적으로 연결개념만 존재할 뿐이지 중첩되거나 통합되는 것으로는 상정할 수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베르그송은 꿈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는 중첩, 왜곡, 승화의 개념이 나온다. 생각해보면 시간은 오히려 흘러가는 존재이고 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위의 존재라고 인간을 이야기하면 인간도 역시 흘러가는 존재로 정의를 내릴 수 없게 된다. 꿈은 바로 이렇게 ‘진리’를 담보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민네이션, 철학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3가지의 결합들을 보자. 먼저의 3가지는 제도-문화-인간’이다. 모든 세계의 질서는 ‘제도’로 외형을 이루고(폴리스) 그 제도 안에 흘러가고 변화시키고 창조하는 ‘문화’ 내용이 있고(노모스), 이것들 사이에서 만들어지거나 만들어가는 ‘인간’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3가지의 흐름은 거대한 철학사의 흐름을 만들어 냈다.제도를 중심으로 구조를 보는 독일철학의 흐름이 한가지이고, 문화를 중심으로 사회의 변화를 보는 프랑스 철학이 또 한가지 흐름이고, 인간의 의지와 도덕, 기술과 실용을 중심으로 보는 영미철학이 바로 마지막 흐름이다. 이러한 흐름들 때문에 각 국가들은 제도-문화-인간’의 어느 가치가 우선되는가에 따라서 국가에서 제도가 우선되는 국가주의나 법치주의가 되는가? 혹은 문화가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나 상대주의가 발전하는가? 혹은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과 내면과 심리를 다루는가?라는 식의 철학이 국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법학, 문화, 과학으로 또 발전되면서 서로의 영역을 구축하거나, 서로 연결되거나 새로운 분과가 만들어지거나 하게 된다. 철학은 바로 이러한 흐름들 속에서 제도를 만들어내는 가정을 고민하거나, 문화를 이해하는 질문을 던지거나,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을 하는 것이다.사회학은 이러한 것들이 현실로 나타나서 사회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실제로 이것들을 사용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정치’이고 이러한 정치의 기저에 어떤 철학들이 있는지를 보는 것이 바로 ‘정치철학’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에토스-로고스-파토스의 결합



민네이션, 비판


원래 철학하는 방식대로 강의가 진행되지는 않는 것이다. 만약에 베르그송이 말하는대로 어떤 개념이 소개되어 진다면, 혹은 설명된다면 그것은 모순이다.베르그송은 지속을 직관의 의해서 찾아내는 것이고 그것은 내면 안으로, 자아 안으로 들어가서 서로 의식과 몸에 침투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첩되거나 왜곡되거나 기억된 것들이 표현될 때 강의라는 방식이나 그림이나, 음악이나 어떤 것이든 어떤 수단을 가지게 되면 그것은 데카르트 적이라고 볼 수 있다. 개념되어버리는 순간 그것은 영원성을 잃고 지속성을 잃은 체로 멈춰져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베르그송의 방식으로 한다면 느껴야 하고, 인상을 그냥 받아들여야 하고 감각해야 하는 것이리라.



민네이션, 라캉


베르그송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대편에 있는 소피스트들처럼 이데아의 반대편에서 시작하여서 언어와 심각하게 싸운다.언어와 싸우고서는 결국 기억과 심리에 대해서 말하면서 인간을 다시 정의하고 있다. 라캉은 어떻게 보면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고서 인간이 형성되거나 상처를 입거나하는 것은 바로 언어라고 생각했고, 언어 때문에 인간의 내면의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도 구조화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언어화된 무의식을 분해하는 방식으로 존재를 다시 규정하고 다시 존재론을 구성하는 것이 라캉의 방식이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라캉의 방식은 언어에 의해서 규정되어버린 존재가 그것을 분해한다고 해서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다. 인간이 ‘큰사물’(주이상스)와 직면한다고 해서 새로운 자아로 승화’하는 것은 아니다. 대안을 고민하지 않는 것이 라캉의 특징이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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