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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r 09. 2018

집합과 무한

알랭바디우 존재와 사건_철학아카데미

20180227_철학아카데미

알랭바디우 존재와 사건_홍기숙

양개념과 존재론의 난국 3



들어가기

메타존재론은 존재론들을 모두 모아보는 작업이다.  작업을 통해서 존재론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밝혀진다.칸토어의 정리를 통해서 무한의 개념이 무한기수라는 빙식으로 양화될 수 있으면 우리는 더욱 무한에 다가갈 수 있다.특히 '부분의 합은 항상 전체보다 크다'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기존의 방식을 뒤업는다.공백에 출현할 진리를 기다리는 사건의 철학자 바디우는 오늘까지 알아보기로 한다.


존재와 사건을 설명하고 있는 알랭 바디우



상황, 상태


모든 사유의 질서 속에서 상황과 그것의 상태 사이의 양적 관계 또는 집합의 원소 수의 관계를 검토해보자. 상황은 일자-다수들을 현시한ㄷ.상태는 그러한 다수들의 부분들 또는 합성을 재-현한다.상태는 상황이 일자-다수들을 현시하는 것보다 ‘더 많은’ 또는 ‘더 적은’ 부분-다수들은 현시하는가?촤고점 정리는 ‘이미 상태는 상황(이것의 상태가 다수이다)과 동일한 다수일 수가 없음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러한 이타성은 상태의 내재적 양(기수)이 상황의 내재적 양과 동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상태는 다르면서도 동시에 ‘그만큼 많은’ 상태로 머물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상황, 숫자


어쨌든 상태는 최소한 상황만큼 숫자가 많음을 지적하자.

집합의 부분들의 집합의 기수는 집합의 기수보다 작을 수는 업기 때문이앋.이유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어떤 집합의 원소가 존재한다면 그것의 단집합은 집합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집합의 모든 현시된 원소에 ‘대응하기’ 때문에 최소한 원소만큼 많은 부분이 존재한다.




칸토어, 기수


이제 남게 되는 유일한 질문은 부분들의 집합의 기수가 최초의 집합의 기수와 같은가 아니면 그것보다 큰가를 확인하는 것 뿐이다. 앞서 말한 칸토어의 정리는 그것이 항상 큼을 확인한다. 그것에 대한 증명은 러셀의 역설 그리고 초과점 정리와 유사한 수단을 이용해 이루어진다. 즉 그것은 ‘대각선적’ 추론을 포함하는데, 그것은 완벽한 것으로 간주되는 절차 속에 ‘하나-더’가 존재함을 드러내며, 그리하여 완벽함의 참칭을 무너뜨린다. 그러한 절차는 존재론에서 다름 아니라 초과 문제와 관련된 모든 것에서, ‘그러한-일자의-심급에-따른-비존재’에서 전형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한의 세계를 열아놓은 칸토어



무한성, 일자


무한성은 일자로부터 풀려나오고 자연적 존재를 포함해 다수-존재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갈리레이적 몸짓, 칸토어에 의해 존재론적으로 사유되었다. 다수성은 다음곽 같은 조건 아래서는 무한하다.최초의 존재의 점, ‘이미’ 존재하는 것 / 내가 어떻게 한 항으로부터 다른 항(타자라는 개념)으로 ‘통과하는가’를 가리키는 이행의 규칙 / 이 규칙에 따르면 항상 ‘아직 하나 더’가 존재하며, 정치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 / 아직 타자의 개념이 고수되는 다수인 이차적 존재자, ‘두 번째의 존재적 봉인’ 자연의 문한성’의 존재론적 기본꼴은 극한서수라는 개녀멩 기반해 구성된다.


무한으로 작아지는 도형들로 나눠지는 원형 공간. 네덜란드 작가 M.C. 에셔(M.C. Escher)의 1958년 작품 ‘서클 리미트 I(Circle Limit I)’



초과점 정리, 상태


초과점 정리는 상황과 그것의 상태에 대한 질문에 대해 국소적 대답을 제시한다. 상태는 최소한 상황에 속하지 않는 하나의 다수를 셈한다는 것이 그것이다.따라서 상태는 상황(이것의 상태가 상황이다)과 다르다. 다른 한편 칸토어의 정리는 이 질문에 대역적인 대답을 제시한다. 상태의 집합의 원소의 수(순수한 양이라는 측면에서)는 상황의 것보다 더 많다는 것이 그것이다.그런데 바로 이것이 상태는 단지 상황의 ‘반사물’일 뿐이라는 생각을 배제하게 만든다. 그것은 상황과 분리되어 있다. 이것만큼은 이미 초과점 정리에 의해 증명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이 상황을 지배한다는 것을 안다.



포함과 집합의 관계, 상태가 상황을 포함하고 있다



다수, 일자


바디우는 철저하게 유물론자이다.그리고 철저하게 총체성 개념을 부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들은 항상 ‘존재다수’이고 그 존재들을 우리가 인식할 때는 ‘일자다수’로 드러날 것이다. 일자이지만 다수로 인식한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 자체의 상황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인 것이다.존재는 공백이다. 그리고 그 공백에는 ‘순수다자’가 존재한다.



바디우, 비판


바디우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바디우의 내면의 논리를 직접 비판하는 사람들은 없다. 바디우가 가지고 온 ‘칸토어 정리’라더니 ‘집합론’이라는 것은 시대를 따르고 있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이것은 잊혀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순수다자’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시대의 언어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들뢰즈의 방식 ‘차이와 반복’은 다시 반복되는 것은 똑같을 수 없다라는 것이지만, 순수다자의 논리에서 반복된다는 것을 설정한 것도 사실은 총체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함수의 의해서 포함과 연결관계는 달라진다



칸토어 정리, 척도


무한한 다수성들의 이러한 척도(알레프연속)가 무한성들의 수로 헤아린다는 약속과 그렇게 수로 헤아려진 유형들의 무한성들을 수로 헤어린다는 약속과 그렇게 수로 헤아려진 유형들의 무한성이라는 이중적 약속을 충족시켜준다. 이것은 무한성이라는 개념의 총체적 전파 또는 비단일화라는 칸토어적 프로젝트를 완성한다.만약 서수들의 수열이 유한을 넘어 자연적 무한성들(이것은 자신들에 속한 것을 순서화한다는 사실에 의해 구분되어 진다)의 무한성을 가리킨다면 알레프 연속은 어떤 순서도 없이 원소들의 수라는 원래 그대로의 차원에, 즉 현시하는 것의 양적 확장에 사로잡혀 있는 일반적 무한성들의 무한성을 명명한다. 그리고 알레프 연속은 서수들에 의해 지표화되기 때문에 자연적인 무한적 다수들이 존재하는 만큼이나 많은 양적 무한성의 유형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이나 많은’은 착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정합적일 뿐만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은 두 총체성을 연관시키기 때문이다. 모든 서수의 집합이 존재할 수 없고(이것은 자연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또 모든 기수의 집합의 존재할 수 없듯이 절대적으로 무한한 무한성, 내재적으로 사유 가능한 모든 무한성들의 무한성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번에 이것은 신(총체성)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바디우, 존재


존재는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는 자신에게 불충실한데, 부분들을 일자로 셈한느 데서 모든 현시 속에 투자되는 노고가 무한한 연장 소겡서 과연 얼마만 한 가치가 있는지를 더 이상 추론할 수 없는 한에서 말이다. 상태의 척대-부재는 양 속에서 우리가 상황에 대한 보장과 고정을 기대하는 바로 그것이 방황하도록 만든다. 공백을 폐지하는 조작자가 그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것이 자신과 상황 사이의 결합 자체에서 공백을 재출현하도록 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선택의 거의 완벽한 자의성을 용납해야 한다. 객관성의 패러다임 자체인 양은 순수한 주관성으로 이어진다 등 이것들이 바로 바디우가 기꺼이 ‘칸토어-괴델-코헨-이스턴’ 증상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이다. 존재론은 난국 속에서 사유가 항상(거기서 사유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존재 자체임은 알지 못한 채) 자신을 나누어야 하는 지점을 드러낸다.


무한과 연역, 공백에 무한의 개념들이 잠재되어 있다





민네이션, 생각


바디우는 왜 수학에서 이야기하는 ‘서수/기수’의 문제를 가지고 오는가?

바로 존재가 존재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존재라는 것을 잃어 버린체 인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를 서수와 기수 사이에서 집합을 하고 그것을 가지고 조직을 만들고 진리가 탄생할 수 있는 공백을 없애 버린다.존재는 다시 말하면 ‘사건’을 통해서 진리가 발생할 때 ‘무한’의 옷을 입는다.무한한 존재를 ‘유한’하게 만들기 위해서 수는 항상 유한집합 안에서만 셈을 하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게오르크 칸토어’에 의해서 무한집합을 셈할 수 있다는 ‘칸토어 정리’를 통해서 무한의 개념으로 넓어진다.




민네이션, 무한


바디우는 이러한 칸토어의 정리의 핵심인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항상 크다’라는 것을 가지고 진리를 통해서 발생하는 상황에서 항상 사건보다 더 많은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진리-공백-사건-상황-상태’로 발전하는 가운데 진리는 항상 더 많은 것들을 무한으로 생산해 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총체성’이나 ‘전체성’이라는 개념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의 개념 안에서 순수다자’라고 하는 존재들이 공백에서 드러나는 것이 사실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바디우는 말한다.


무한의 공백은 무한의 질서를 갖는다.

민네이션, 신


바디우는 자신의 유물론을 발전시켜 총체성을 가진 ‘신’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자, 신이 정말 없는가? 없다는 것은 총체성’ 다시 말하면 전체를 다 알 수 없는 무한에게 어느 순간 그 무한을 끊어서 생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그렇게 생각하고 끊어서 기수화시켜보아야 상태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그런데 신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 역시도 자신의 지적한 오류를 동일하게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신이 ‘순수다수’로 존재한다면 어쩔 것인가? 신이 ‘일자 다수’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공백을 가득 체우고 있는 ‘순수다수’의 존재론을 가지고 있다면 어쩔 것인가? 신이 예수를 통해서 재현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재현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보이는 ‘일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만나보면 순수다수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보이지 않기에 공백에서 항상 존재하지만 ‘자유’를 주기 위해서 진리를 선물한다.그 진리는 진리자체가 우리를 만든다는 것이고, 우리는 진리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바디우의 책 사도바울에서도 ‘보편성’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예수는 그렇게 드러나지 않는다. 항상 우리가 이 선생님은 너무나 좋다 특히 나에게만’이라고 생각하는 그 좋은 선생님처럼 ‘나와의 관계’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비밀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우리에게 날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른 관계로 우리를 찾아온다는 것이다. 혹은 찾아간다는 것이다. 혹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연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다른 식으로 말하면 ‘예수는 우리를 자유롭게 사랑하고, 우리는 자유롭게 예수를 사랑한다’라고 할 수 있다.



칸토어, 영상


처음에는 칸트와 칸토어를 혼동했다. 수학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게 여실히 티가 났다. 여기저기 칸토어에 대한 이론과 영상을 찾아보고 나서야 결국 칸토어를 통해서 20세기 수학이 유학에서 무한까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EBS 다큐프라임에서 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https://youtu.be/oM3TXwQ6hbw

EBS다큐프라임에서 칸토어의 삶을 찾아가보았다. 넘버스 2번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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