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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r 10. 2018

강도와 다양

베르그송철학_철학아카데미

20180308_철학아카데미

베르그송철학_류종렬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들에 관한 시론_강도와 다양체


들어가기


오늘은 베르그송의 마지막 단계인 심리와 강도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우리는 처음에는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들에 관한 시론’ 2장에서 인상을 배우고, 3장에서 감각을 고민했다.그리고 우리는 이제 1장의 감정 즉 심리를 배우는 것이다. 이것은 더 심층으로 가는 방식이다. 오늘은 그러한 심리 혹은 감정의 강도들이 어떻게 다양하고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다룰 것이다.결과적으로 이제 우리는 표상에서 투사되는 베르그송의 센터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시 3층 도식에서 서양철학사를 모두 훑어보았다


베르그송, 3가지 감정


베르그송은 감성적 감정들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그것은 우아함, 아르마움, 연민이다. 우아함은grace 자연스레 됨을 말한다. 아룸다움이라는 것은 beau라고 읽는다. 연민은 pitie로 표현된다.



심리상태, 강도


사람들은 보통 감각, 감정, 열정, 노력과 같은 의식의 상태들이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어느 한 감각이 같은 성질을 가진 다른 감각보다 두배, 세배, 네배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음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인간의 외부에 대한 것들을 인상’적으로 파악하는 것에 있어선 기수와 서수를 사용해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그러나 인상을 거쳐서 감각으로 넘어가는 순간 비교는 사라진다. 개인의 내면으로 들어가면서는 심리적 강도들에 대해서는 표현은 되지만 비교나 평가는 되지 않는다.이것은 다시 말하면 심리적 강도들은 크기의 변화라기보다는 질의 변화에 속한다.



우아함, grace


우아함은 우선 편안함 그리고 용이함에 대한 지각이다. 어쩌면 자연 그대로 됨이다. 노자의 무위자연과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종교성과도 같을 것이다. 라틴어로 우아함을 표현하는 단어는 gratia라고 읽는데 주로 잘 이루어짐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음으로 우아함은 직선보다 곡선을 선호한다고 하는데, 삶의 실행은 직선이 없으며, 직선이란 관념의 기호일 뿐이다. 좀 더 가까이에는 인간의 신체 부분들이 곡선에 있어서 더 매력적이다. 미학적으로 보면 고정의 직선보다 운동의 곡선이 매력적인 것으로 보인다. 우아함은 또한 리듬과 박자일 수 있다. 박자는 규칙적이고, 규율적인 측면에 있기에 이해하기 쉽다.그러나 리듬은 신체적 공감synpathie이 있고, 이것이 도덕적 공감과 인접성이 있으며, 이런 운동성으로부터 잠재적 또는 생성하는 공감의 지표를 찾을 수 있다. 그런 운동의 공감은 고급적인 우아함의 본질이다.


베르그송에게서는 우아함이나 아름다운이 다른 곳에서부터 출발한다. 자연그대로. 그래서 다시.루소를 들렸다와야한다.


아름다움, beau


아름다움은 예술론에 속한다. 예술의 목적은 인격의 활동적이고 저항적인 힘을 잠재우고 표현된 느낌에 공감하는 것이다. 음악, 시, 미술, 조각, 건축에 리듬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리듬에 대한 견해는 들뢰즈가 리토르넬로에서 설명하듯이 자연 환경의 리듬과 삶의 리듬의 영토화와 코드화가 같은 계열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러면 베르그송의 설명에 따르면 자연과 우리와 사이에는 오랜 동지의식 같은 것이 있어서 공감이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미적감정은 세기가 전해지고 심도 있고 깊이 있게 고양시키면서 전달한다. 대부분의 감동은 수 많은 감각과 감정들로 다양체와 마찬가지이며, 각 감동은 유일무이하고 정의할 수 없는 상태를 보여준다. 예술가란 이해시키기 불가능할 정도의 감동을 개인적인 작업에 끌어들여 그 감동을 경험하게 하는 노력하는 자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정의할 수 없는 상태에 단번에 자리 잡게 한다. 단번에 오는 단순한 감정이 아름다움의 느낌이다.



연민, pitie


연민이라는 단어는 18세기 초에서 18세기 말로 넘어 오면서 달라진다. 단어가 바뀐 것이 아니라, 그 단어의 사용이 신에 의한 것인지 인격에 의한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차이는 계몽주의에서 낭만주의로 이행에서도 나타나지만, 생산력의 발달로 인민이 노동에서 여가를 지니면서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 갔으며, 산업구조의 변화로 인민이 자율성을 확보하면서 예속에서 주체로 바뀌는 과정에서, 인간은 인간에 대한 투쟁이라기보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인간에 대한 연민이란느 관점이 등장한다. 다시 말하면 자연속에서 인간이 인간에 대한 동질감이 바로 연민인 것이다. 예속과 달리 주체는 외롭고 또한 환원할 수 없는 일회성의 존재라는 각성에 있다.


동일성에서 출발하면 연민이 된다. 그 동일성이라는 것은 자연 안에 같은 인간종족이라는 것.


프랑스, 심리학


프랑스는 19세기에서 20세기 2차 대전 전까지, 바칼로레아의 과목 명칭을 형이상학, 논리학, 심리학, 도덕학으로 불렀다. 시리학은 인간에 대한 인식과 지식이며, 논리학은 과학들의 여러 논리들이며, 도덕학은 실천철학인 셈이다. 전쟁 이후 1960년이 지나면 점점 심리학이 인간과 실천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변화를 맞는다.즉, 신칸트학파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인지의 인식론적 관점에서 인도주의적 담론과 표현을 중심으로 하는 심층형이상학적 관점인 구조 없는 구조로 바뀐다. 여기에서 바로 라캉의 무의식 개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베르그송이 설명하는 방식은 물질에 따라서 인지가 바뀐다는 것을 말한다.20세기의 변화들이 곧 인간을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었다는 것이고,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도 다른 관점을 제시했따는 것이다. 인간의 이해를 인지로 볼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면 여기서 상층부인 형성철학으로 승화한다. 그러나 인간의 이해를 영혼이나 인간 고유의 심리적 특성으로 보기 시작하면 여기서는 리좀과 다양체로 발전하게 된다.상승부로 올라가는 철학이 헤겔이라면, 하층부로 내려가는 철학이 스피노자이다.다시 이것을 받은 헤겔을 잇는 푸코와 스피노자를 잇는 들뢰즈의 싸움으로 번진다.  


심리학의 발전은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을 바꾼다. 사물 내면의 강도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림을 보고 무엇인가 다르게 떠오른다.


정조적 감각, 표상적 감각


정조적 감정은 les sensations affectives이라고 부리는 감각이다. 정조적 감정은 다시 말하면 감화적 감적이라고 하고 이러한 감각에서는 쾌락과 고통을 다룬다. 감각이 신경체계를 통해서 일어나는 일 외에 감각에 다른 어떤 것이 개입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개입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체의 존재 근거가 아니거나 또는 자유의 시작인 영혼의 자유로운 운동의 시작일 것이다. 이것을 베르그송은 감각에서 일어나는 일 가운데 다른 생성, 표출이 있다고 말한다. 들뢰즈로 치면 되기 혹은 생성devenir가 기관없는. 신체에서 생겨난다거나 혹은 표출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감화적 감각에는 신체적인 활동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적으로 준비되고 있는 운동들을 자아가 의도하고 있었을 것 같은 현상들도 있다. 여기서 미래와 의도는 어디서 오는가? 종교와 도덕은 이런 감각들에 깊은 감정을 포함할 것이다. 베르그송은 시간적 미래와 의도가 생의 전체에 연결되어 있을 경우는 본능적으로 그리고 또 다른 미래의 창조와 생성에 관련 있을 경우 지성과 직관을 통하여 생산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들뢰즈에서는 생명체는 변화하는 환경과 더불어 끊임없이 새로운 생성으로 나간다는 점을 강조한다. 생성이전의 덩어리는 언제나 카오스모스로서 존속하며 탈영토화와 탈코드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생성으로 재영토화를 만들 때 코스모스의 현상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생명현상은 영토화-탈영토화-재영토화 과정을 계속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자연이 기계적으로 자동적이라면, 의식은 그냥 비의지적 운동의 자유로운 과정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자연은 기계적 운동으로 소산적 자연도 있지만,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능산적 자연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역동적이란 자유인데, 실재적이고 내재적인 선택이란 점으로 앞으로 베르그송은 전개해 나갈 것이다.



강도, 다양성


강도의 개념은 외연과도 너비와도 다른 것이다.그런데 외연으로 또는 비교에 의한 너비(부피)로 측정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은 오류이다. 정신물리학적 태도에서 스코틀랜드 학파의 학설에 따라 획득된 경험적 지각으로 설명한다고 해도 오류이다. 이에 비해 혼재된 지각으로서 강도적인 것은 토대적, 심층적 상태이며 다양체이다. 하나는 외연적 크기의 관련에 관련되어 있으며, 다른 하나는 내적 다양체의 이미지이다. 강도의 문제가 은근슬쩍 끼어든 공간의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강도의 문제로부터 외연적인 문제를 벗어나고, 그리고 수와 공간의 배열에 대한 추상적 논리에 벗어나는 것은 내적 다양체와 지속의 문제탐구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외연성 이론으로부터 공간의 개념의 도입이 엘레아학파의 소피즘과 임의자유의 문제가 나온다. 인격성의 자유로운 작동과 자유는 지속에서 영혼 전체로 부터 분출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선택은 영혼 전체로부터 분출하는 것이다.


비로소 베르그송의 센터가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민네이션, 생각


문명이란 표현은 인지적인 접근이고 문화’라는 것은 인간적인 표현이다. 문영이 인식론이라는 것은 코젤렉의 개념에서 보는 것처럼 영미철학의 심미철학, 인지철학의 발달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시대적 흐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서 문명으로 볼 것인지, 문화로 볼 것인지에 따라서 개념사의 기반이 달라진다. 인지적인 것은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개념인데, 인간적인 접근은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그래서 이것은 더 좋고 좋지 않다는 표현을 할 수가 없다. 이러한 분류는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서양세계의 문명에 대한 생각이 구분되는 시기에서 등장한다. 이런 방식으로 설명한다면 인지구조를 가지고 인간을 평가하거나 판단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메타인지’라는 개념으로는 인간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쓰여진 문명의 지식만을 칭할 때 메타인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인지와 함께 경험도 있고 어떤 이론도 있다. 경험에는 기억도 있고 감정도 있고 이미지도 있다.인간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어떤 기준으로 설명할 것인가?에 따라서 국가, 사회, 가정에 대한 정의가 달라진다.


문화 안에서 인간은 평등하고 심리적인 강도를 자유롭게 인정받는다


민네이션, 리듬


재미있는 사실은 우아함을 리듬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리듬은 매끄러운 것이면서도 운동성을 이야기한다.

운동성이라는 것은 생명의 잠재적인 성질이면서, 리듬감의 본질이다. 한별철의 ‘아름다움의 구원’에서는 매끄러운 긍정성은 부정성을 잃어 버린 가속도의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매끄러운 긍정성 속에서는 리듬감이 미끄러져 내려가서 생명력이 사라지는 경향이 나온다. 매끄러움은 까칠까칠한 곳에서의 마찰력을 줄이게 되고, 이것은 단지 현상 뿐 아니라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가 된다. 긍정만으로는 생명의 운동력, 리듬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인간성의 붕괴는 바로 긍정성을 모든 부분에 도입하고 적용할 때 생기는 것이다. 베르그송에게도 리듬이 사라지면 그것은 생명이 아니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지속할 수 없는 것이었다. 리듬은 지속-생명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사라져버린 리듬은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감각의 마비는 감정의 마미를 가져오는 것이 당연하다.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리듬은 지속가운데서 발생한다. 지속은 생명의 운동이다. 살아있는 것들의 차이와 반복이 언어가 없이도 계속된다.


민네이션, 계몽주의


계몽주의는 인식론적이다. 그 시작에 있어서 데카르트의 도움이 컸다.

계몽이 된 인간과 계몽이 되지 않은 인간들 사이에는 상이한 인지과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좀더 발전하여 칸트에 있어서는 경험으로 인지되는 것인 순수이성과, 의지와 실천으로 이루어져 있는 실천이성으로 분화하면서 더 많은 것들을 포함하게 된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낭만주의에 가면 이것이 바뀐다.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인간은 인지적인 측면도 있지만 내면에서 발생학적으로 인지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스피노자에게서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에서의 연민은 동질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차이에서 오는 것이고, 낭만주의에서의 연민은 자연이라는 범주 안에서 인간이라는 동질감에서 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역사이론도 역시 변증법을 따라가고 있다. 물질에서 정신으로.


민네이션, 마르크스


PD 계열은 주지주의적이다. 다시말하면 인지적이다. 이러한 관점은 마르크스는 과학이다라고 말하면서 인지적인 차원에서 마르크스를 바라본다. 한마디로 과학적 사회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NL계절은 주의주의자들이라서 공상적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임종석이나 문재인대통령이 주의주의, 공상적 사회주의적인 측면이 강하다면 안희정이나 조국같은 이들이 주지주의적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마르크스의 이론은 왜 두가지로 분개하는가? 어떻게 보면 헤겔이 가지고 있는 유기체론을 이어서 받아서 다른 방식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관념론과 기계론을 합쳐서 유기체를 만들었는데 이것의 확대 과정에서 사회와 국가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고민하는 부분에서 이러한 관점이 달라지는 부분은 다시 관념으로 보는냐 아니면 기계론적으로 보는가로 ‘국가와 사회’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국가가 사회로 편입되거나, 사회가 국가로 편입하거나 결과론적으로는 사회가 즉 국가가 되는 차원’이 현실에서 펼쳐지는데 이러한 결과 안에서 사람들은 또 나누어 진다고 할 수 있다.



민네이션, 강도


베르그송 철학은 심층철학이라고 한다. 그것은 물질에서부터, 어떤 덩어리에서부터 인간이 시작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층의 덩어리에서 부터 출발하는 인간의 인상, 감각, 심리는 덩어리가 운동성을 가지고 체계를 가질 수록 더욱 깊어지고 넓어진다고 할 수 있다. 심층으로 갈 수록 강도는 낮아지고 현실로 올라갈수록 강도는 높아진다. 현실로 올라오는 것들은 아래서부터 쌓여서 만들어지는 강도가 깊은 것들이었던 것이다. 이제 베르그송 센터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덩어리(마스)에서 부터 시작하여 표상되는 존재가 베르그송의 인간론이다.


민네이션, 베르그송


베르그송은 심층에서부터 표면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현실 자체를 유지하는 생명에 집중했다.그러나 들뢰즈는 다시 심층으로 내려가서 탈영토화를 통해서 재영토화를 추구하는 입장으로 벡터값이 심층으로 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벡터로 볼 때 베르그송은 생성 후 지속을 지성과 직관으로 보았다면 들뢰즈는 생성에서 다시 생성으로 돌아가는 위아래의 벡터값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의 그래프는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가 하는 반면에 베르그송의 센터는 센터에서 현실로 투사되어 투사된 것들이 유지되고 지속되는 것임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이제 고민이 더 깊어진다. 진짜로 세상은 그런가? 심층철학에서도 베르그송과 들뢰즈로 나누어지는데, 형상철학으로 올라가면 다시 다자와 순수다자의 문제가 생기긱 때문에 매우 복잡해진다.


들뢰즈의 심층 개념도 이제 들오오기 시작한다. 강도에 따라서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달라진다. 차이와 반복은 여기서 발생한다.


민네이션, 푸코


푸코는 3층 철학에서 2층철학으로 투사하면서 2층철학 표면의 코라에서 생성되는 사회적 구조를 고민했다.이러한 구조는 감시와 처벌, 정신병동, 권력체 정부 등과 같은 것들이었다.이것을 고고학적으로 밝히면서 들뢰즈나 베르그송과 다르게 정신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벡터값이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것이었기에 결국 푸코에게서 결론은 정신의 문제나 지식, 권력의 문제로 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체들이나 표면의 사물들을 중심으로 정신을 표현한다는 입장에서 유물론이면서, 이러한 과정에서 마르크스의 유물론(2층에서 3층으로 투사하는 유물론)을 가지고 와서 변증법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다양하게 표상되는 라캉과 강도에 대한 이야기들.


민네이션, 유기체 플랫폼


이제부터는 나의 철학이다. 일단 나는 1, 2, 3층으로 구분하는 것이 설명을 위해서 세계지도를 펼쳐 놓은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오히려 인간이나 사물은 1,2,3층이 하나의 구모양으로 형성되어서 서로 주고받는 섞여 있는 과정일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도 어느정도 공간을 상정해야 하는데, 우리의 삶은 사실 공간으로 상정될 수 없다.이해를 위해서 공간을 상정하고 그 공간에 생각에서 나온 곡선과 직선을 가지고 면을 만들고 이것을 입체의 개념에서 3차원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것도 현실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어찌되었든 우리의 일상은 정신과 몸이 만나는 유기체의 플랫폼이다.이것들이 만나는 방식은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지긴 하지만 사람은 상황에 따라서, 말에 따라서, 인상에 따라서 다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잇는 작업은 결국 의지의 발현일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의지와 표상의 세계라고 정의한 쇼펜하우어가 했을 것이고, 말에 의해서 이어진다고 했던 것이 비트겐슈타인이었다. 성에 의해서 이어졌다고 하는 주장은 프로이트에게서 나온 것이고, 무의식 안에 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것이 라캉의 이해다. 오늘 본 베르그송은 덩어리, 몸이라고 하는 물질 그 자체가 이어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그럼 어떻게 생각하는가? 잘 모르겠다. 사실 그러나 확실한건 우리의 표면, 우리의 현실, 우리의 현실은 항상 플랫폼들의 세상, 유기적으로 몸과 정신이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이어지고 무엇으로 연결되는지는 사회마다 사람마다 국가마다 다를 것이다. 이것이 문화가 되고 국민성이 되고, 개성이 되지 않을까? 험난한 오딧세우스의 여정은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기여코 끝까지 추적해보고 고민해보고 경험해 보려고 한다. 결국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인간이 회복될 수 있을까라는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철학아카데미를 마치고 나오면 항상 사물과 자연이 달라보인다. 철카 옥상에서 바라본 인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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