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우는 존재와 사건에서 '수'를 통해서 존재를 밝혀내고 이러한 존재가 현실에 '순수다자'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증명한다. 성찰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는 양과 숫자, 무한과 다수라는 여러가지 개념들을 설명하고 있다. 바디우가 혁명의 투가가 되는 이유는 하나로 정해진 일자'들의 세상이 아니라 순수하게 판단받지 않은 '순수다자'가 여전히 무한의 영역에서 무한으로 흘러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바디우가 말하는 양의 개념과 존재론이 겪고 있는 오류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이다. 존재론의 난국이라는 것은 존재는 부분의 합이 전체의 합'이라는 것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부분의 합은 언제나 전체를 넘어선다는 개념에서 바디우는 현실에서 무한의 개념을 드러낸다.
진리가 밝게 빛나던 순간, 순수 다자들의 등장
순수, 다수
존재를 순수 다수 또는 일자 없는 다수로 사유하는 것은 그러한 사유를 양quantity 중의 하나와 연관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존재는 내재적으로 한정 가능한가? 다수는 현시의 형식이므로 현시되는 것과 양적 확장 사이에는 본원적 연관성이 존재하는가? 우리는 칸트에게서 그가 '직관의 공리들'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적 원리가 '모든 직관은 외연적 크기이다'라는 것을 안다. 순수 다수 속에서 이 다수의 현시 중 존재인 것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칸트의 공이들과는 대칭적으로 모든 현시는 내재적으로 양적이라고 상정하지 않는가? 모든 다수는 가산적인가?
칸트에서 시작해서 칸트를 넘어서는 바디우
칸트, 크기
칸트는 '크기quantitatis의 순수한 도식은 수이다. 따라서 수는 동일한 종류의 직관 일반의 잡다함의 종합의 통일이다'라고 한다.수로 셀 수 있는 것들은 양개념에서 볼 때 같은 종류로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수들의 순수다수로서 현시의 존재론적 기본꼴은 또한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종류의 것이다. 그리고 일자-결과에 종속되어 있는 한 그것은 또한 잡다함의 종합이기도 하다.따라서 존재의 본질적인 수적 성격이 존재하는가?
존재, 양
존재의 양'의 정초는 칸트가 직관의 대상들의 양을 위해 제안한 것일 수는 없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의 초월적 잠재성 속에서 그러한 정초를 발견하는 반면 우리는 다수 현시의 시간과 공간과 무관하게 수학적으로 사유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개입의 의해서 정초되고 공간은 특정한 유형의 현시와 관련해서 특이한 구성물이다. 이로부터 크기 혹은 수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에게는 칸트가 사용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에게 외연의 크기는 '부분들에 대한 표상이 전체의 표상을 가능하게 해주는것'이기 때문이다.
바디우, 칸트
바디우는 존재와 사건 성찰 3,5,7에서 다수라는 칸트적 개념이 전체와 부분과의 개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니라, 부분의 합은 언제나 전체를 넘어선다는 것을 바디우는 이야기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차이는 '무한'의 개념이 칸트와 다르다는 것이다. 칸트는 인식이 가능한 범위에서, 오성을 통해서 파악하는 수의 개념이다.그러나 바디우가 이야기하는 '순수다수'라는 것은 칸트가 말하는 수적인 것이 아니라 무한의 개념에서 다자인것은 맞지만 수를 다 셀 수 없는 것들이다. 존재가 무한한 다수성들 형태를 받아들이게 되면 가산적인 것이 되는 데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비가산적인 것이 된다. 칸트는 '그러한 크기 개념은 주어진 무한성 개념으로서는 경험적으로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무한성은 기껏해야 경험의 한계 이념이지만 결코 인식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더큰 다수를 얻는가? 유한한 어떤 것을 무한에 추가하는 것은 만약 이 양을 그 자체로서 규정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면 무한한 양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바이다.
심층의 형이상학자들이 보기에 알랭바디우는 가까운 형상찰학자다.
칸트, 이해
칸트는 경험론을 비판하면서도 버리지는 않는다. 경험론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사물들의 질서가 주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주체의 직관형식에 의해서 바뀐다는 것을 말한다.이것이 흄이나 베이컨이 말하는 경험주의를 배격하고 '합리주의'를 우선시하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할 수 있다. 사물에 대해서 인식하는 오감만이 아니라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주체가 판단한다는 것이다.
양, 다수
현시의 외연적 또는 양적 성격은 약분 가능한 다수성들이 관계를 맺고 있음을 전재한다. 양에 대한 인식이 시작되려면 임의의 다수가 다른 다수보다 크다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하나의 무한한 다수가 다른 무한한 다수보다 크다는 말은 정확히 무슨 의미일까?물론 우리는 하나의 무한한 다수가 어떻게 다른 무한한 다수를 현시하는지를 볼 수 있다. 이런식으로, 즉 최초의 무한서수는 바로 뒤의 원소인 다수에 속하는 데 이것은 이름 자체를 구성하는 유한한 다수들에 추가함으로써 얻어진다.
갈릴레이, 무한
갈릴레이는 이미 엄격하게 말해 단순한 수보다 더 많은 제곱수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각각의 정수 n에 대해서 그것의 제곱을 대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로부터 아주 현명하게도 더 많은'과 더 적은'이라는 개념은 무한성과 무관하며, 무한한 총체성은 양이 아니라는 결론을 끌어낸다. 결국 양에 대한 모든 존재론적 학설의 외견상의 난국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자연적 무한성에 대한 결정인 극한서수가 존재한다는 것이 지탱되는 현시의 존재론적 기본꼴은 존재하는 무한한 다수성을 받아 들인다. 하지만 후자가 어떻게 이 다수성들에 통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셈하기의 단위에 속하는지를 이해하는 데는 일정한 어려움이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존재는 일반적으로 한정이 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난국의 해소가 사유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
제곱의 세계는 벡터의 세계이면서 무한의 세계다
존재, 서수
서수'에게서 존재론을 한번 생각해 보자. 일단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에 속한다고 하면 '추이적으로' 속한 존재는 자기를 포함시키는 존재의 부분집합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존재는 자기 자신을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스스로를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한집합들, 양적 비교
칸트의 핵심적인 생각 중의 하나는 무한한 다수들의 비교를 위한 규약을 제안하는 것이다. 칸트는 갈릴레이와 파스칼의 지적인 무한수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대해서 긍정하면서도 새로운 역설을 만들어 낸다. 지금까지 함수 개념은 동일한 수를 설명해내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동일한 수라고 전제하고 그것들의 양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곱의 관계에서는 동일한 수의 제곱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무한의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을 말한다. 일직선 안에서 2, 4, 6으로 늘어나는 수가 아니라 입체적인 공간에서 2, 4, 8 로 나아가는 벡터값에서는 시작되는 순간부터 그것은 무한한 방향성과 존재를 갖는다는 것이 바디우의 주장인 것이다.
바디우, 진리
바디우에게 진리는 없었던 것들이 현시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진리는 매번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이해하게 되면 지식이 되어버려서 원래의 진리는 사라져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는 해석되는 순간 사라져버린다는 의미에서 라캉의 실재계와도 비슷할수 있다.철학은 절대로 진리를 생성할 수 업다. 철학은 진리를 지식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학문이라는 것이 바디우의 생각이다. 바디우가 생각하기에 '정치, 과학, 예술, 수학'이 진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사건의 철학자 알랭바디우
기수성, 기수들
앞서서 무한에 질서를 무여하고 무한들을 비교하는 양적인 차원까지 확장시킨 바디우는 이제 다수 사이의 존재적 비교절차를 마음껏 사용한다. 최소한 다수가 양적으로 동일하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다. 서수인 '안정적인' 또는 자연적 다수들은 이런식으로 임의의 다수와 비교 가능하게 된다. 다수 일반을 이런 식으로 비교라는 방법을 통해 서수의 계열로 환원시키는 것은 양에 대한 모든 사유에 본질적인 것을 구성할 수 있도록 허용해줄 것이다.척도가 바로 그것이다.
자연적 다수, 존재론
자연적 다수의 존재론적 기본꼴인 서수가 이름의 수를 구성함을 성찰 12에서 알아보았다. 이 서수로 순서가 현시라는 근본적인 이념에 의해 전순서화되는 일자-다수가 또한 이전의 모든 서수의 긴 가산적인 연쇄를 가리키는 한에서 말이다. 이처럼 서수는 일단 선택공리에 의해 모든 다수가 완전 순서화될 수 있다는 것이 보장되면 일종의 도구-다수, 임읭 ㅡㅣ 집합의 길이를 재기 위한 잠재적인 측정도구가 된다. 우리는 서수의 이러한 가치를 전개해볼 생각인데, 그것의 토대는 모든 다수는 자연적 다수와 접속될 수 있따는 것, 존재는 자연으로 보편적으로 전개된다는 존재론적 의미가 깔려 있다.
가장 작은 무한기수
다수, 서수
존재론의 핵심적 실술은 모든 다수는 하나의 서수와 돌일한 비합의 원소 수를 가진다. 동일한 양을 가진 다수들로 형성되는 계층class는 최소한 하나의 서수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자연적 다수들 사이에서 하나의 '사례'를 찾을 수 없는 '크기'는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자연은 사유 가능한 모든 크기의 순서를 포함하고 있다.
임의의 다수, 자연적 다수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는 임의의 다수와 자연적 다수 사이의 근본적인 연관성을 확인해야 한다. 모든 임의의 다수에 대한 동일한 집합의 원소 수를 가진 자연적 다수의 대표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자연이 존재를 잰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식으로 임의의 다수와 자연적 다수를 연결하고 나면 자연 안에 파악하는 충실성의 복잡함은 더욱 복잡해 진다. 그것은 존재론적 텍스트를 더 멀리까지 파고들수록 충실성의 전략은 그만큼 더 복잡해지며, 메타존재론을 넘어까지 나아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존재론에서 무한을 상정하게 되기 때문에 존재의 제한이 사라지고, 존재는 언제라도 태어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건과 조건에서 어떤 성찰과 조건이 있은지 살펴조자
민네이션, 바디우
바디우가 무한집합들에게 양적인 비교를 하는 이유는 사실은 '사건'이 일어나는 현실에서 그 사건의 의미들이 그 자체로만 매몰되지 않고 더 많은 사건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표상된 사건과 표상된 사건을 '하나'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과 그러한 이해가 재현되는 것들은 '사건'이 1이라면 사건의 인식은 1+무한이 되고, 다시 그것을 재현하는 것은 1+무한+무한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바디우의 진리개념으로 보면 하나의 사건이 메마른 현실에 한번 번쩍거렸을 때는 단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무한을 만들어내는 블랙홀이 열린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재현이 무한의 무한이라고 한다면 한번 번쩍거리는 진리도 반대로 무한의 무한의 무한에서 나오는 '순수 다자' 중에 현시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바디우에게 일상은 순수다자가 충분한 연역의 세상 속에서 언제라도 출몰할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이다. 그 가능성은 행동함으로 도래할 수도 있고, 연대함으로써 도래할 수도 있다. 일단 시작되면 그것은 수 많은 무한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민네이션, 생각
존재가 순수다수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것을 역으로 보면 모든 존재는 '순수하지 않으면서 일자'가 아니다가 된다. 그 이야기는 이전에는 다수이지만 순수하지 않고 질적인 차이만 있다고 여기는 스피노자 주의를 배격하는 것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라는 일원론의 철학도 배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확히 바디우는 스피노자와 베르그송의 반대쪽에서 관념론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베르그송이 이야기한 것처럼 어떤 것을 '수'로 세기 위해서는 어떤 일정한 공간이 필요한데, 이러한 공간은 바로 생각의 공간이면서 현시된다면 보이는 외연을 갖는 것이라는 것에서 말이다. 결국 생각도 보이는 것이다.
한국 사상가들의 이념도를 알랭바디우식으로 비라보자
민네이션, 순수이성
순수한 이성은 동적인 부분이다. 앉아서 사물이 주는 인상들을 이성으로 종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천이성은 이제 행동하기 위해서 자기 안의 이성을 바깥으로 현상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므로 실천이성은 방향성이 매우 중요하다. 방향성을 결정하는 것은 가치value이다. 이러한 가치는 인간의 직관에 경험이 합쳐진 1차적 자료에 추구하는 윤리적인 가치, 목적론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치는 가치를 만들어내고 가치는 깊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무미건조한 연결을 이어주는 것은 파로 판단력 비판에서 다루는 상상력이다.인간은 자신보다 더 큰 것들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상상할 수 있다. 인간은 상상력에 의해서 더 나아진 삶을 그려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칸트의 주체'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칸트를 공부하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고 하는 것이다. 칸트의 존재론과 인식론 그리고 윤리론에서 안정성을 누리는 것은 쉽다. 그러나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인식툴이 도래하는 시간대에는 칸트의 12가지의 외연적 직관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어질 때도 있지 않을까?
민네이션, 수학
5000원을 잃어버렸던 어린시절 나는 왜 그것이 문제가되는지 몰랐다. 종이에 쓰여진 숫자가 정확히 5000원의 가치에 매겨진 물건과 대응한다는 것을 알기 까지는 직관 넘어에 있는 사회적 약속을 익힐 때까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숫자가 만들어낸 수학이 사실은 공간을 일부러 제약하고, 보여지지 않는 약속으로 이론을 만들어 놓았던 학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수학은 보이지 않는 약속의 총체였다. 직관으로 절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수학이 무한을 다루기 때문이다. 무한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러한 질서들을 연결시켜서 보이지 않는 영역을 넷으로 묶는 것이 수학이었다. 무한을 센다는 개념에서는 나는 혀를 내둘렀다. 말도 안돼! 그 다음부터 수학은 젬병이 되었다. 무한을 다루는 기술을 스스로 익힌 이들이 있는가하면 무한을 다루는 방법을 암기하는 이들이 많았다. 암기하는 이들에게 세상은 이론과 지식의 세계라서 점점 보수화되는 경향을 많이 보게 되었다. 공간에 관련된 수학은 어느정도 이해가 갔지만 숫자로 정리되는 함수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것은 약속과 약속이 연결되어 공리라는 것으로 증명된 것이 진리를 만들어낸다는 수학의 기본 원리를 나는 부정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도 숫자와 현실이 정확히 매칭된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더욱이, 무한의 개념을 정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다만, 그 시점에서는 기수의 개념으로 잡아둘 수 있겠으나 그렇게 잡아 놓는 순간 수 많은 무한의 물결이 그 기수를 피해서 흘러가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두려는 시계나 시간의 전략도 사실은 흘러가는 것을 임의로 상정하고 붙잡아 두려는 것이다. 이러한 수학을 통해서 가치를 숫자에 묶어둔 재화나 통화라는 것에서는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신적권위까지 격상된 자본주의는 어떻겠는가?지금도 나는 종이에 쓰여진 5000이라는 숫자를 그 만큼의 가치로 두고 싶지 않다. 그것은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실재로 존재하는 것들 바로 거기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고 어떤 독재자처럼 수학자나 과학자들을 이 세상에서 나 몰아내고 싶은 것은 아니다.
민네이션, 서수
기수는 stock의 개념이라고 보면 서수는 flow의 개념이다. 기수는 정지한 존재이고 서수는 흘러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수로 고정된 존재는 수학에서는 꼭지점이 되고, 서수로 흘러가는 존재는 수학에서는 기울기가 된다. 바디우가 설명하려는 것은 흘러가는 무한을 묶어 두는 것은 기수인데, 이 기수를 규정할 때 가장 작은 1을 규정하고 나면 무한들의 크기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지는 사실 주체가 정한 것이지 항사 이런식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정치에서는 사회적 약속이되고, 과학에서는 일정한 이론이 되고, 예술에서는 하나의 표현양식이 되며, 수학에서는 공리가 된다.
민네이션, 사랑
바디우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랑' 이 진리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서 사랑이 흘러넘칠 때 진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는 의미에서 사랑은 세상을 만들고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랑만이 인생의 전부라는 의미에서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