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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Feb 07. 2018

인간과 계몽

계몽의 변증법!_철학아카데미

20170207_철학아카데미

계몽의 변증법_임경석

부정의 변증법


들어가기


계몽의 변증법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시작은 헤겔의 변증법과 같은 취지이다. 이성의 힘은 '부정'하는 힘으로 인류를 발전시킨다는 것.그러나 부정하는 힘이 '동일자와 긍정성'에 질식되어 버리는 순간 계몽은 미몽이 되고, 마법과 주술에 빠지게 된다. 부정하는 힘은 '갈등'을 만들어내지만 갈등은 그것 자체로 사회가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정하는 힘이 어떻게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니체와 사드가 보여주는 '부정의 변증법'이다.


어떻게 계몽은 미몽에 빠졌는가?


순수이성, 비판


순수이성 비판으로서 계산적으로 사유된 계몽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칸트에 의하면 계모이란 스스로에 기인한 미성숙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것인데,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의 인도 없이는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이다. 다른 사람의 인도 없이 자신의 옷어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 계몽이다. 이 능려깅 바로 이성과 관계한다. 칸트는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선천적으로 오성의 형식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경험은 그 자체로 일정의 인식으로서 오성을 필요로 하며, 이 오성의 규칙은 대상이 나에게 주어지기 이전에 선천적으로 나의 내부에 전제되기 때문이다. 이성은 위계질서 지어진 하나의 통일된 체계인 순수 이성의 체계를 세우는데, 이를 통해 선천적 인식은 하나의 원리 아래 모든 사실들을 포섭한다. 필연성과 엄밀한 보편성을 지닌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을 정초하려고 했던 칸트의 노력은 계몽의 관점에서 볼 때 '사유의 체계적 통일성'이라는 이념에 기여한다.


칸트의 인식체계


무반성적, 계몽적 사유


'자기 유지'는 칸트가 최고 심급이라고 부른 '자아'의 지위를 박탈한다. 시민들의 박탈당한 자아는 물적 자원의 형태로 대기업 총수들에게 넘어갔으며, 이들의 학문은 굴복한 대중 사회의 재생산 방식의 총화가 되어 버렸다.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계몽된 정신-계산적 사유-은 순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자연으로 되돌려진다. 지배자에게 있어 인간이란 자연 전체가 사회에 대해 그러하듯 물적 자원이 된다. '지배'는 파시즘적으로 합리화된 형태를 띤 '태고의 공포'임이 드러났다. 총체화된 국가는 국민들을 조작하고 조작하는데, 이것은 조직적 체계라는 이성의 기능을 통해 구현된다. 이성의 목적없는 합목적성인 '계획을 위해 고안된 계획'은 스포츠나 대중문화에서 보이듯 실제적 목표를 결여한 전체 삶의 조직화를 통해 드러난다. 조직의 목표 달성을 위한 미친듯한 활동 자체가 목적이며 계획이다.



근대, 계몽


근대의 계몽은 문명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파괴의 과정이었다. 시민 계급을 해방시켰던 계몽은 시민 계급이 지배 체제로서 억압의 주체가 되자 이 계급에 등을 돌렸다. 계몽은 그 자체의 속성인 반권위적 경향으로 말미암아 최소한의 믿음에서 멈출 수가 없다. 계몽의 이러한 반권위적 원리는 궁극에 가서는 계몽 자신의 대립물, 즉 이성 자체에 반대되는 것으로 변한다. 결국 지배적인 생산 방식에 얽매이게 된 계몽은 억압적인 질서의 밑을 파헤치려 노력하지만 오히려 그 자신을 해체해 버리게 된다. 무반성적인 계몽적 사유는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회의주의에 귀착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기존 질서에 충분한 설자리를 마련해 준다.


호르크하이머의 저서

금지, 용기


사드나 니체의 작품은 실천 이성에 대해 비타협적인 비판을 가한다. 칸트가 이성의 사실로서 도덕법칙을 정화한 데 반해 사드나 니체는 실천 이성에 대해 비타협적인 비판을 가한다. 사드 소설의 주인공인 줄리엣은 가톨릭을 최근의 신화라고 말함으로써 사탄으로 만들며, 이와 함께 문명 자체를 그렇게 만든다. 그녀는 성사를 행함에 있어 계몽적으로 하며 터부라는 것을 자각하고 실행한다. 왜냐하면 모든 가치판단은 본래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구현하고 있는 것은 퇴행에 대한 지적, 악마적인 기쁨의 사랑으로서, 문명 자체의 무기로 문명을 파괴하는 즐거움이다. 자신의 모든 능력은 이성의 통제 하에 놓아야 하며 감정이나 경향에 의해 지배당해서는 안 된다는 칸트의 금지 명령, 즉 초연한 무감동의 의무는 줄리엣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칸트가 덕에 대해서 그러하듯이 줄리엣은 악덕에 대해서 그러하다. 초연한 무감동은 개별 인간의 자발성이 사적 영역으로 은퇴하는 것으로, 시민들의 적절한 실존 형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살인자의 얼굴은 최고의 냉정함을 보여야 한다. 후회는 퇴보다, 다만 후회가 가질 유일한 정당성과 관련해서 스피노자는 스토아 학파의 말을 되받아 두려움을 모르는 민족은 두렵다라고 덧붙인다. 그리고는 제대로 마키아벨리주의자가 되어 겸손과 후회는 공포나 희망처럼 이성에는 어긋나지만 매우 유용한 것이라고 말한다.


2차대전의 와중에 비판학파의 고민은 깊어진다


부정의 변증법, 사드 혹은 니체


부정의 변증법에 대해서 알아보자. 여기서 우리는 사드와 니체의 경우를 살펴보는 것이다. '합리성'에게서는 예배 대상에 헌신하는 것이 우상 숭배로 보인다. 신화의 금지는 유대교라는 일신교에서 시작되어 그것의 세속화된 형태인 '계몽'에 의해, 사유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경배에 대한 계몽 속에서 수행된다. 기독교는 눈 먼 성욕을 결혼의 신성화를 통해 정화시켰으며, 신의 율법을 지상에 가져오려 노력했다. 기독교가 하느님이라는 교리를 통해 때 이르게 얻어내려 했던 '자연과 문명의 화해'는 계몽의 엄격주의만큼이나 유대인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사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변태인가 개혁가인가?


니체, 초인


니체는 기독교가 신화임을 꿰뚫어 보고, 신을 초인Ubermensch으로 대체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더 높은 자아라는 이 고나념 자체도 죽었다고 말해지는 신을 다시 구출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임이 드러난다. 초인의 의지는 정언명령인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라는 것 만큼 전체적이다. 칸트나 니체의 원칙은 모두 외적인 힘으로부터 독립, 즉 계몽의 본질로서 규정된 조건없는 '성숙'을 목표로 삼는다. 거짓에 대한 두려움은 '법칙'을 자기 입법에 의해 해체하고,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미신임을 포괄하게 됨에 따라 계몽 자체나 어떤 형태의 진리도 우상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신을 믿지 않는, 반형이상학자인 현대의 우리는 신은 진리이고 진리는 신적이라는 믿음을 이어간다. 신을 부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지양될 수 없는 모순, 앎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드, 계몽


사드는 계몽의 사상을 이 역전의 지점까지 밀고 가지는 않았다. 그에게서 계몽은 아직은 정신적 현상이 되지 못한 단순한 사회적 현상이었다. 그는 집단의 해체와 사회, 가족과의 유대에 대한 비판을 무정부 상태가 찬양되는 지경까지 몰고 갔다. 그의 작품은 종교가 문명의 기초를 이룬다고 말하는 원칙들인 십계명, 가부장적 권위나 소유의 신화적,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폭로한다. 학문이나 산업은 사랑을 형이상학이라고 매도하는데, 이성 앞에서는 어떠한 사랑도 버틸 수 없다. 부모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이라는 마지막 결사체는 노년에 버림받을 두려워하는 부모들의 경제적 불안에서 생겨난다. 사드는 문명의 토대인 족외혼 제도를 탈마법화시킨다. 가족 결사체는 사회적인 이유로 분쇄된다. 사드가 법칙들과 투쟁하면서 선포한 무정부 상태나 개인주의는 공화국, 즉 절대적인 보편의 지배로 귀결된다. 몰락한 신의 더욱 지독한 우상이 되어 돌아왔듯이, 예전의 양경국가나 자유방임은 파시스트 집단의 폭력으로 전환된다.



사드, 소설


사드의 소설은 '지배기관으로서의 사유에 대한 역사'라는 마지막 신화적 껍질이 벗겨진 호머의 서사시이다. 시민 계급이 자신의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이미지에 경악하게 되자 그들으 ㄴ자신의 계급 너머 저편에 있는 세계에 시선을 주게 된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계몽의 경악'을 사드가 그의 적들에게 넘겨주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작품을 구제해주는 힘이다.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사드는 부정의 변증법의 모티브를 제공한다.


시민 계급, 사상가들


시민계급의 어두운 사상가들인 사드와 니체는 시민 계급의 '변호론자'들과는 달리 '조화'의 교리를 통해 '계몽의 결론'을 빠져나가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저 어두운 사상가들은 사악한 지배가 정의라는 충격적인 진리를 무자비하게 폭로한다. 과장되긴 하지만, 극단적인 잔혹성이 개별사례인 포그롬학살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지나간 역사의 본질이 아니었던가? 잔혹한 세계 속에서 '행복한 삶'이란, 엄청난 고통 속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몰염치한 것이다. 이 희생자들이 본질을 구현한다면, 저 행복한 삶은 무인 것이다. 실제로 파시즘의 지배자들이 보여준 적나라한 형태에 비할 때, 파시즘의 구체적 실례를 보여주는 사드의 결정적인 묘사는 사적인 악은 전체주의 시대에 자행된 공적인 악의 예고편일 뿐이다.



사드, 니체


사드와 니체는 이성을 통해 살인의 부당성을 제시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큰 소리로 외쳐댔지만, 논리실즈주의자들보다 더 철저히 합리성에 집착함으로써 칸트의 이성 개념에서나 다른 위대한 철학자들에 은밀히 내포되어 있는 유토피아의 표피를 벗겨내 그 본질을 적나라하게 들추어 낸다. 사드와 니체의 무자비한 교리들은 '지배와 이성의 동일성'을 공표하고 있지만, 그들은 시민 계급의 비굴한 도덕주의자들보다 오히려 자비롭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온갖 위안과 보장에 의해 매일매일 배반당하고 있다고 할 때, 니체는 오히려 그의 '부정' 속에서 인간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뢰를 구제했던 것이다.



민네이션, 계몽


계몽이 신화로 퇴보하게 된 원인은 퇴보를 위해서 고안된 민족주의적이거나 운명론적인 현대적 신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경직된 계몽 자에체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호르크하이머와 아노르노는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계몽은 두려움 때문에 새롭게 나아가지 못하는 생각, 물화된 정신, 정지된 관계에서 미몽에 빠진다는 것이다. 역으로 계몽은 새로움에 대한 도전, 고양된 정신, 계속해서 진보하는 깨달음의 역할을 했는데 이것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함으로 발생하는 것이 바로 미몽이라는 것이다. '나의 인생에서 계몽의 시대'는 언제였떤가?를 떠올리게 된다. 아직 두려움에 빠져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항상 무엇인가에 의지해야 했떤 것들을 생각해보면 아득하다.



민네이션, 생각


계몽과 변증법이 만나는 지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변증법은 그 자체로 상승 혹은 깊이로 향하는 방향성을 가졌다. 계몽에게 변증법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계몽주의 시대를 지났는데도 계몽은 변증법의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가?호르크하이머와 아노르노가 이 글을 썼던 시대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인간이 계몽주의의 길을 따라서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진보를 맛 보았지만 계몽 자체가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정신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고, 가치 판단은 두려움에 우물에 빠져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던 것이었다. 땅에 떨어진 계몽을 변증법적으로 승화시켜서 부활시키려는 것이 바로 이들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생각을 시작하면 새로운 생각이 탄생하면서 고도화된 정신이 탄생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며, 이들의 반대편에는 스피노자나 베르그송이나 들뢰즈와 같은 자연에서 배치와 연결을 가지고 정체성을 만드는 철학자들이 있다. 어떤 것이 맞는 지는 자신이 어디 서 있는지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자연에서 질서를 따라서 인간을 규정할 것인지, 아니면 학문과 정신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발전시킬 것인지에 따라서 방향(벡터)는 점점 격차를 만들어 낸다.



민네이션, 부정의 변증법


사드는 자신을 악으로 선언한다. 그러므로 자동적으로 선은 칸트가 된다. 윤리를 지키겨른 칸트와 윤리를 분해하는 사드는 완전히 반대에 있다. 여기서 사드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의 변증법의 한 축으로 만든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개념들은 항상 그와 반대되는 개념이 있어야만 설명되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남자가 있으면 남자가 있고, 선이 있으면 악이 있다는 것이다. 마법이나 신화는 바로 변증법으로 존재하는 세상에 대해서 '정'만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은 '정'과 '반'이 만나서 '합'을 이루는 것인데 이 세상은 특히 유럽사회는 '정'으로 자신을 지정한체 스스로 계몽을 했다고 말하는데 있다. 누군가는 '반'의 입장에 있고 이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어느새 계몽은 미몽과 주술과 신화에 빠져서 오직 '정'으로만 구성되었다는 것으로 마멉을 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타자를 통해서, 부정성을 통해서 진정한 세상을 살게 되지만, 2차 세계대전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정'의 세상을 상정했던 이들에게 도래한 현실의 도전이라는 것이다.



민네이션, 인간


누군가가 던져준 정의 말고, 내가 경험하고 정의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나의 제한된 경험에 갖혀 있는 인간의 개념도 아니고 너무 긍정해서 희망만으로 정의된 인간의 개념도 아닌 것 같다., 인간이 계몽과 연결되어 있을 때 인간은 크게는 두 가지 방향으로 고양된다. 자연은 더 연결되는 네트워크를 가지게 되고, 정신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시스템화되고 체계화된다. 인간은 어떻게 보면 보이는 것과 보이는 것이 만나는 플랫폼이고(사실은 모든 사물이 그렇다. 그러나 이런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다.) 자연과 사회가 만나는 플랫폼이다.인간들의 모임이 플랫폼이고 이러한 사회적 플랫폼들의 모임이 또한 국가가 되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세계과 우주는 마찬가지의 연결고리를 갖는다. 다만 생각의 방향, 자연의 방향인 벡터값이 중요한 것이다. 계몽도 마찬가지로 방향이 중요한 것이다. 진정한 진리는 양자역학이나 양자생물학처럼 여러가지 방향으로 자유롭게 발산하면서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간다. 부정이 있으면 긍정이 있고 이것을 한 플랫폼에 다스리면서 생성되는 생명이 바로 인간인 것이다.



민네이션, 고민


칼포퍼도 역시 '부정'의 점을 지우지 않을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지우는 순간 다시 말하면 반증'이 없어지는 순간 인류는 역사주의로 추락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운명론이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 엘리트들이 세상인 것이다. 존재가 가지고 있는 고유성을 '시간'에 정초해 놓고 시간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물을 절대로 변경시킬 수 없는 지점에 놓는 작업이 바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그리고 칼포퍼가 하고 있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어느정도의 변증법적인 방법론을 가지고 오지만 헤겔이 이야기하는 정신현상학은 거부한다. 그것은 오히려 동일성의 철학이면서 위계질서를 만들어내는 엘리트주의적인 방식의 오도라고 할 수 있다. 존재는 시간 위에 있다. 그러나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다. 그 말은 각각 개인의 시간을, 사물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물의 시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나의 시간이 탄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네이션, 질문


헤겔은 어떻게 보면 초기독일 낭만주의의 '생기론적 범신론'에 따라서 '변증법'을 고안해 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변증법의 낭만주의적인 성격이 '계몽의 변증법'에서도 드러나는 것일까?


계몽의 고양은 자연의 공백을 만들어 낸다. 그 공백에서 독재가 일어나고 그러한 독재는 또 전쟁과 악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구조에서 계몽이 공백을 만들지 않으면서도 고양되는 방법은 없는 걸까?


플라톤-헤겔-계몽주의'로 이어지는 엘리트주의의 흐름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이야기하는 칼포퍼의 질문을 피해갈 수 있을까? 누가 누구를 지배한다는 것인가? 이런 고민들이 나타나지 않는가?


비판사회학 대회에서 보면 '멀티트랜스포메이션'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각 사회들이 가지고 있는 시간은 그대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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