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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an 20. 2018

의식과 다양

베르그송철학_철학아카데미

20180119_철학아카데미

베르그송철학_류종렬

수적 다수성과 공간


들어가기


우리는 순서를 조금 바꿀 것이다. 먼저 2장에서 의식상태들의 다수성에 관하여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속의 관념을 생명이라는 지점에서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3장으로 가서 의식상태들의 조직화인 '자유'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야 1장인 심리상태들의 강도에 관하여 알아볼 것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삶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표현되는 의식의 상태들은 자유에 의한 것이고, 그러한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의 '심리'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베르그송은 증명하려고 한다.  오늘은 지난시간에 이어서 2장인 지속의 관념을 살펴볼 것이다.


지속의 개념을 이런식으로 바라보자. 우주의 형성과 유지까지.


unite, 다자


수는 일반적으로 단위들의 집합,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해서 하나와 여럿의 종합으로 정의된다. 왜냐하면 모든 수는 정신esprit의 단순한 직관에 의해 표상되고 하나의 이름이 주어지므로 하나의 수이다.하지만 그러한 단일성unite는 합계somme의 단일성이며, 그것은 개별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다수의 부분들을 포괄하기 때문이다.당분간 그 단일성과 다수성의 개념을 깊이 다루지 말고, 수의 관념이 또한 어떤 다른 것의 표상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지를 자문해 보자.



수, 단위


수가 단위들의 집합이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그 단위들이 그들 사이에 서로 동일하거나, 또는 적어도 그들을 셀 때는 곧 동일한 것으로 가정한다는 것을 덧붙여야 한다.아닌게 아니라 한 무리의 양을 세면서 오십마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서로서로 구별되며 목동은 그들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음에도 볼구하고 그겋게 하는 것일 터이다.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그 때 개별적인 차이는 무시하고 그들의 공통적 기능만을 고려하고자 합의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대상이나 개체들의 특수한 특징에 주의를 고정하자마자, 그것들을 열거는 할 수 있을지 언정 합계를 낼 수는 없다. 한 부대의 군인들을 셀 때와 호명할 때는 분명히 다른 그 두 관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따라서 수의 관념은 서로가 절대적으로 닮은 다수의 부분이나 단위들에 대한 단순한 직관을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생명체의 기본 구조인 DNA.결국 여기까지 분화할 기세다.


구별, 코라


그러나 그것들이 단 하나로서 합일되지는 않기 때문에 어디에선가 분명 구별되어야 한다. 방금 말한 양들의 무리가 그들 사이에서는 동일한다고 가정한다. 그들은 적어도 공간 속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장소에서 다르다.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도대체 무리를 형성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십 마리의 양 자체는 제쳐두고 그 관년만을 취하자.그 때에는 그들 모두를 동일한 상 속에 포괄하여 그 결과 그들을 이념적 공간 속에서 병치시켜야 하거나 그들 중 하나의 상을 오십 번 연속적으로 반복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나중의 경우에는 그 연쇄가 공간보다는 지속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앞에서의 그 양떼들 가각을 차례로 그리고 따로따로 떠올린다면, 내가 관여하고 있는 것은 아무리 해봐야 오직 한 마리의 양일 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양들의 수가 증가해 가려면, 계속되는 상들을 붙잡고, 그것들을 내가 관념으로 떠올리는 새로운 각각의 단위들과 병치시켜야 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병치가 이루이지는 것은 공간 위에서지, 순수 시속 속에서가 아니다. 게다가 물질적 대상들을 세는 모든 조작은 그 대상들의 동시적인 표상을 내포하며, 그 사실 자체로 그것들을 공간 속에 놓는 것임에 쉽게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간의 직관이 모든 수의 관념, 심지어 추상적인 수의 관념에도 따라 오는가?


류종렬선생님의 삼층계단이 더더 복잡해진다


하나, 의미


모든 수는 단위들의 집합이며, 다른 한편 모든 수는 그것을 구성하는 단위들의 종합인 한에서 그 자체 하나의 단일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라는 말이 그 두 경우에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가?수가 하나임을 인정할 때 우리가 그 말로 의미하는 것은 정신의 단순하고도 불가분적인 직관으로 그 수를 그 전체에서 표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단일성은 전체의 단일성이므로 다수성multiplicite을 내포하고 있다.



두종류, 단일성


우리가 수를 구성하는 단위들을 말할 때의 그 단위는 더 이상 합계가 아니고, 분명 순수하고도 단순한 단위 그 자체이며, 서로 무한히 결합됨으로써 수들의 계열을 제공하도록 운명 지어진, 없앨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두 종류의 단일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는 결정적definitive인 것으로서 스스로에 보태짐으로써 수를 형성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나는 잠정적provisioire인 것으로서 단위들이 보태져 이루어진 수의 단일성인 바, 그 수는 그 자체로서 여럿이지만 지성이 그것을 파악하는 단순한 행위로부터 그 단일성을 빌려온다.


물질과 내면의 감정이 연결되는 방식.


주관성, 객관성


베르그송의 개념에서 우리는 표현되어 진 것들은 이미 분할되어진 이데아에서 봉합하는 방식으로 드러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것은 객관적인 것이다. 그래서 표현되어진 것들은 이미 단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단위를 입히기 위해서 생각 속에서 분할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이데아가 분할되지 않으면 절대로 객관적으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이 논리가 맞다. 바로 이것이, 표현되지 않은 이데아 혹은 표현되지 않은 내면이 바로 주관성이다. 이러한 주관성은 단위를 적용할 수 없는 부분이다. 주어진 한 공간의 다양한 부분들에 차례로 주의를 고정하는 불가분의 과정은 고유하게 정신에 속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고립된 부분들은 다른 것들에 보태지기 위해 보존되며, 일단 서로 보태지면 어떠한 방식으로도 분해될 준비가 된다. 그것들은 따라서 분명 공간의 부분들이며, 공간이란 정신이 수를 구성하는 질료이며, 정신이 그것을 위치시키는 장소이다. 우리가 미리 수를 공간에 위치시키지 않았다면, 과학은 아마도 우리고 하여금 수를 공간으로 옮기게 하는데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는 분명 수를 공간 속에서의 병치로 표상했음이 틀림없다. 그것이 모든 덧셈은 동시에 지각된 많은 수의 부분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에 의거하여 우리가 먼저 도달한 결론이다.


연역에서 말하는 수학과 심층에서 말하는 수학이 다르다. 물질과 기억의 관계가 물질의 입장에서 규정될 수도 있다.


주관적, 다수성


계속되는 소리를 이념적 공간에 도열시키고는 그것을 이제 순수 지속 속에서 센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 오해가 없어야 한다.틀림없이 종소리는 나에게 계기적으로 도달한다. 그러나 다음의 둘 중 하나이다. 하나는 계기적인 감각 각각을 붙잡아서 그것을 다른 것들과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알려진 어떤 곡조나 장단을 상기시키는 하나의 무리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 때 나는 소리를 세는 것이 아니라 그 수만큼의 감각이 나에게 끼치는 이를테면 질적인 인상을 받아들이는 데에 그친다. 다른 하나는 명시적으로 그것을 세려고 마음먹는 것이며, 그 때 나는 분명 그것을 하나씩 분리해야 할 것이며, 그러한 분리는, 소리들이 그 질을 벗어 버리고 말하자면 속이 비어서 그들이 지나간 동일한 흔적만을 남기는 어떤 동질적 장소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생명체는 사실 단위로 분정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결을 끊는순간 모든 지속은 정지한다.


민네이션, 단위


우리의 삶을 양분할 수 있는가? 우리의 시간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가?우리의 몸무게는 정말 70킬로인가? 우리의 아이큐는 정말 120인가? 우리가 사는 세계는 사실 단위들의 집합이며 표상된 것들이 머무를 기준이 정해진 사회이다.그러한 기준은 매우 단순하기도 하면서 다양한 계몽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에 유용하다.그러나 이러한 기준은 사실이 아니다. 물론 칸트는 이것을 진리로 인도하는 직관이라고 이야기한다.그러나 베르그송에게는 '단위'라는 것은 가짜이며 잘못된 완벽주의의 표현이라고 이야기한다.


단위는 사실 형이상학자 혹은 형상에서 가지고 온 개념이다. 그래서 형상적인 개념에서는 정확히 나누어 떨어지거나 분할되기 때문에 단위는 '개념화'이면서 사실은 상상이다.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단위가 실재계속으로 들어오면, 다시 말하면 심층으로 들어오면 현실을 분할하는 순간 모든 생명은 지속을 멈추게 된다.지속은 단위에 따라서 살아 있고 죽는 것이 아니지만 단위의 의해서 분할을 시행할 경우 생명의 지속은 멈춘다.


생명의 지속은 단지 세포들의 성장만이 아니라 두뇌 안에서 기억과 마음에서 감정이 함께 생겨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다층 퍼셉트론.


민네이션, 불연속성


베르그송은 실재로 존재한다는 것을 실재로 표현한 것이다.우리의 삶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생각이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서 그 구조를 형성한다.그 구조를 실현하게 되면서 실재계는 또 바뀌고 그러한 바뀐 실재계는 또 새로운 삶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을 최근에는 시스템사고'로 파악하는 복잡계 네트워크가 있다. 연결 자체가 새로운 구조를 만들고, 배치 자체가 새로운 장을 만든다는 입장에서 이것은 들뢰즈적이면서 그 원천은 베르그송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민네이션, 코라


코라라는 것은 플라톤에게서 나왔다. 이 개념은 최근에 크리스테바의 정신기호계적 코라라는 개념에서도 드러난다.코라는 베르그송의 3층 도식에서 볼 때 2층과 1층의 경계를 말한다. 이러한 코라는 1층의 천장이면서 2층의 맨 밑바닥이라고 할 수 있다.2층 바닥은 이미 사물과 관념이 만난지점이고 이것은 라캉에게서는 상징계이다.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기호계적 코라는 바로 상상계와 상징계의 사이에 2층 밑바닥에서 등장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베르그송이 말하는 코라는 1층 천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말은 라캉식으로 하면 실재계와 상징계가 만나는 지점에서의 코라라고 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코라'의 개념은 플라톤에게서 나온다.



민네이션, 의식의 다양성


베르그송의 표현 방식은 처음에는 기존에 존재하는 사고방식이나 개념을 설명한다.그러나 점점 시간이 갈 수록 앞에서 설명한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서라도 자신의 개념이 존재할 공간이 있다고 주장한다. 2장의 원래 이름은 '의식상태들의 다양성'에 관한 글이다. 이 말은 원래 단위로 규정되어서 의식되어 있는 '의식'은 아무런 매개가 없다해도 가능하다는 것이 베르그송의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은 '단위'라는 상징계, 기표를 빌리지 않더라도 '지속'이라는 전 과정에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지속의 개념을 생물학에서의 '진화'의 과정으로 보고 진화의 과정 속에서 인간이 지속되는 인간의 삶에서 '기표, 단위'가 없은 무매개적으로 사유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3층에서 내려온 시뮬라크르와 1층에서 올라온 시뮬라크르의 싸움. 같은 코라이지만 다른 방향성이다.


민네이션, 감정


유클리드 기하학을 사용하여 나눌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플라톤주의자들이 만든 이념이다. 그러나 비유클리드적 기하학을 가지고 있으면 인간의 내면은 덩어리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베르그송이 말하는 감적이면서 스피노자와 들뢰즈와 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덩어리로 표현되는 것들은 반복되어야만 그 형상을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정말로 지속되는 것은 이념의 지속이 아니라 영혼의 자기 지속인데, 이러한 자기 지속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감정은 영혼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인간의 여러가지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에게서 가져온 개념이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개념을 숨기고 다가온다. 그리고 결국은 사물의 존재 방식은 결국 '영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영혼은 서로 침투한다. 이념은 서로 침투하지 않는다. 영혼은 서로 침투하기에 나눌 수 없다. 영혼에게서 나오는 의식은 사실은 연속적이면서 침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영혼의 연결성을 신의 속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이어받은 베르그송은 영혼의 속성은 자기 스스로의 속성이라고 말한다.



민네이션, 알랭바디우


알랭바디우가 말하는 '연역과 수학'은 2층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미 이 공간에 가득 차 있는 연역과 수들은 '이념'적인 결정들의 총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념적인 연역들이 점점 충실해지는 것은 '귀류법'때문이다. 정해진 연역의 법칙들을 귀류법으로 비켜나간 후에 새로운 연역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반복되면 그것은 연역의 충실성을 계속해서 증가시키는 것이다. 알랭바디우의 존재론은 2층과 3층 사이에 존재한다. 그리고 3층으로 완전히 다가가기 보다는 중간에서 존재하면서 '순수다자'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순수다자'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결국 이념들이 다자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러한 이념들은 항상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속성이라는 것을 드러낸다.그러나 베르그송은 1층과 2층 사이에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역의 영역이 아니라 생물학의 영역이다. 그래서 지속이라는 개념은 항상 생물들, 물체들을 지속하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바디우에게서는 지속의 개념이 아니라 연역이 충실하다는 분할된 개념들의 공간이다. 이 부분은 매우 흥미로운데 두 개념은 서로 하나의 공간 안에서 오마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방향으로, 다른 공간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강의가 끝난 후 철학아카데미에서 바라본 인왕산의 불빛. 묘하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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