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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an 18. 2018

수학과 연역

알랭바디우 존재와 사건_철학아카데미

20180113_철학아카데미

알랭바디우 존재와 사건_홍기숙

성찰 24/2_존재론적 충실성의 조작자로서의 연역


존재는 공백에서 사건을 만난다라는 바디우의 논리.


들어가기


성찰 24를 읽으려면 성찰 18을 읽어야 한다. 존재로 다가가려면 일자가 아니라 순수다자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성찰 24는 '충실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충실성의 조작자로 연역'을 이야기한다.사건을 이야기하면서 개입을, 개입을 이야기하면서 충실성을, 충실성을 이야기하면서 연역법을 사용하는가를 살펴보자. 사건과 관련이 없는 순수다수의 존재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디우는 성찰 18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고 있다.


순수다수, 충실성


순수 다수론은 다수가 자신에 속하는 것을 금지하며, 그 결과 사건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성찰 18에서 이야기했다. 사건을 기본형식으로 만드는 역설적 유형의 다수는 존재론적 상황 내부의 모든 순환으로부터 배제된다. 다시 말하면 역설적 유형은 기존에 존재하던 논리를 배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수학의 역사성은 사건과 개입의 시간적 기초 기능이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위대한 수하자란 다름 아니라 수학적 상황 내부의 자리의 가장자리들에서 위험 천만하게도 공백이 호툴됨으로써 일자에게 큰 위험이 초래될 때 개입하는 사람이다.


수학에서 연역을 찾아낸 바디우


충실성, 전략


기존의 법과 질서에 절대다자가 다가올 수 있는 것은 바로 사건의 등장에 있다.충실적인 상상의 세계가 사건을 만나서 많은 이들에게 퍼져나간다. 그리고 이것은 연역법칙으로서 증명이 되어야 더욱 확산이 된다. 그래서 누가 가상의 세계에서 보금자리를 만들수 있으며 그것을 두려움이 없이 증진시킬 수 있겠는가'?충실성의 전략에서 그 충실함이 어떤 연역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알게 된다면 이 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



연역, 충실성


연역이 존재론적 충실성의 기준이 라는 것만큼은 선험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들은 항상 연역적으로 구성된 세계에서 자신의 출몰과 운영과 소멸에 관한 방식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한 존재들은 그러나 어느순간 모순이 발생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존재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되는 데 이것이 바로 징후이다. 이러한 징후는 현실에서도 존재하는 공백에 등장한 어떤 존재의 그림자 같은 징후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역의 공간에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모순이 생기고 이러한 모순을 설명하려고 연역들이 가득찬 충실성들은 모두가 달려들어 그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모순은 다시 연역의 영역에서 해결되어 버린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사건'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일자가 만든 세상이라면 모순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이 연역에 속하지 않은 순수다자적인 존재들이 출몰하게 되는 공백'이라면 말이 된다.


이것 자체로 귀류법이다. 공백이 존재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순수다자들이 자신들의 논리를 가지고 돌아올 수 있다는 징후이다. 공백이 존재한다는 것은 일자'가 가득찼다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다자들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연역의 영역에서 준비하고 있다는 것일 수도 있다. 순수다자들의 귀환은 현실에서 현시될 때 이미 존재하는 실재의 법칙 위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연역, 형식논리의 옷을 입게 된다. 이런식으로 존재는 충만한 연역의 옷을 입고 충실성으로 드러난다. 지금까지 논의된 존재론적 충실성에 대해 가능한 세 가지 규정들을 받아들인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귀납과 연역, 바디우에게는 이미 공백은 연역으로 가득차 있다.


삼중규정, 연역


첫번째 의미에서 존재론적 충실성 또는 연역적 충실성은 원리적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론적 충실성은 사건의 이름, 상황의 모든 항을, 담론의 모든 명제를 자신에게 종속적으로 만든다. 우리는 이것을 원리라고 부르고 있다.


두번째 의미에서 존재론적 충실성은 자발주의적이다. 새로운 정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기존에 존재하던 정리들과 같을 수가 없다. 명제를 존재론의 사건의 순환적인 이름으로 구성해주는 것은 그러한 명제의 절대적 특이성, 환원 불가능한 힘, 어떤 담론 중 저에는 이질적이던 부분을 자신에게, 오직 자신에게만 종속시키는 방식이다.


세번째로 존재론적 충실성은 유적이다. 창안, 개조, 계산으로부터 출발해 그리고 불합리인 모순을 모험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통해 이것이 짜내려는 것은 수학의 몇몇 분야의 교차점에 위치한 다형적이고 일반적인 명제들고, 그것의 지위는기성의 전문 분야들의 대각성 방향에서 자신 안에 수학성 자체를 집중시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중적 규정이 연역적 충실성을 모든 충실성의 모호한 패러다임으로 만든다. 사랑의 증거, 윤리적 견결성, 예술작품의 일관성, 스스로 자임하는 원리와의 정치의 일치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적시에 자신에게 요구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존재론이 투명한 합리성의 한가운데서 귀류법의 절차에 의지해 증명하는 저 모험을 위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우회 속에서 견고성의 연장이 등가적인 것으로 회복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행복, 행복의 초과를 산산조각내고, 소유했던 것을, 하지만 한층 더 순수하게 해서, 그것을 확대했던 요소로 찢어버렸다."


생각하는 것만 존재한다는 파르메니데스, 바디우는 정확히 생각하는 것은 연역의 논리를 따른다고 말한다


진리, 유적절차


바디우는 수학자 코헨의 '연속체'에 대한 논의를 자신의 철학으로 가지고 온다.이러한 연속체를 유적공리의 원리로 운영된다고 말하고 이러한 '유적관계'로 부터 '정치-과학-철학-사랑'이라는 연속체로 자신의 논리를 설명한다. 진리는 이러한 유적절차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연속되는 것들은 사건을 통해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민네이션, 귀류법


'나는 사람이다'를 귀류법을 표현하면 '나는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야'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형식논리학에서는 '나는 사람이다'와 '나는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다'라는 이중 부정은 같다.하지만 바디우가 가지고 온 귀류법에서는 '일자'로 존재하는 공백은 일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백을 변환시킨다.


일자만 존재하는 선언에서 순수다자가 존재하게 할려면 두개 모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두개 중에 하나를 두번 부정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정해진 하나는 절대 안 바뀌지만 뒤에 나오는 이중 부정된 존재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돌아오는데 이것은 연역의 방식을 벗어나게 된다.말 그대로 예측할 수 없는 순수한 다자로서 그리고 새로운 연역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정해진 공간에서 절대 못나가게 만들면, 그 정해진 공간에서만 존재가 정해진다.그러나 정해진 공간에서 바깥에 나갔다가 다시 그 공간으로 들어오는 존재는 바깥을 경험했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귀류법의 특징이면서 매력이다. 논리의 형식을 벗어나는 순간 정해진 규칙들이 새로운 형식을 받아들이게 되는 '공백'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순수다자가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연역의 공간에서 바디우는 귀류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파르메니데스보다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맞다는 생각을 한다. 만물은 변화한다. 스스로 시스템을 만든다. 이런 느낌으로.


민네이션, 사건


바디우는 형이상학에서도 일자로 압축되지 않는 절대적인 다수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다수는 우리의 일상에 충실하게 꽉 차 있다. 그러한 꽉 차 있는 것이 존재적으로는 '공백'으로 나타난다.이러한 공백은 우리가 항상 느끼는 텅 빈 공간이나,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 없는 것을 이야기한다.그러한 공백은 꽉 차 있는 충실성을 갖게 되는데, 그 충실성이 존재하는 방식은 바로 '연역'법이다.


그 이야기는 순수다자들이 현실에 도래하는 방법은 연역법의 의해서 등장한다는 것이다.아무런 규칙도 없이, 갑짜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규칙과 차례에 따라서 사건이 등장한다는 것이다.그래서 사건은 불현듯 등장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연역에 의해서 자신의 차례를 가지고 나온다는 것이다.그리고 그러한 연역은 '수'라는 방식으로 드러난다.이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현실에서 느끼는 사건'의 개념은 이러한 수의 개념, 충실성, 연역이 봉합되는 기회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바디우의 설명이다. 사건을 공백을 호출하면서 수학적인 연역법에 의해서 진리가 현실에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민네이션, 생각


형이상학의 법칙에서 다시 말하면 형상의 세계에서는 어떤 법칙에 의해서 생각이 등장하거나 존재가 등장한다.물론 심층이라고 불리우는 실재계에서는 더욱 눈에 보이는 법칙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그러나 사실 심층과 형상이 만나는 지점에서는 두개의 다른 규칙들이 만나는 봉합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형상의 질서와 심층의 질서가 만나서 서로 다른 것들이 하나의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과 신체는 이 모든 것들을 봉합시키기 위해서 정교하게 구성되었으면서도 지정의가 함께 공존하는 가장 복잡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시스템은 항상 생겨나는 것 뿐 아니라 모든 것들의 시스템을 이해하고, 만들어내고, 분석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바로, 여기 현실에서 인간은 새로운 질서를 만나고, 이해하고, 만들어내고, 바꾸고, 받아들인다.


연역과 귀납은 곧 관념과 실재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민네이션, 수


수와 무' 사이에는 무한이 있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들 사이에는 무한이 있다.무한한 존재가 있고 무한한 비존재가 있다. 우리의 사고는 없음과 있음 사이에서 항상 존재들을 위치시킨다. 무한은 공백 사이에 존재하면서 그 모습은 무한한 형식이다. 여기에 바로 '창조'가 있다.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수는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칭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수로 규정되는 순간 모든 무' 즉 없는 것들이 드러난다. 수의 존재는 무의 존재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는 파르메니데스를 무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생각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드러나서 정해진 논리로 등장하는 '수'는 이미 우리 머릿속에서 어떤 연역의 형식을 가지고 현실에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드러난 것들의 세계에서는 '무'가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다만, '수'와 '수' 사이에 '무'가 도래할 수 있는 공백의 징후가 있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해지지 않은 만물의 흐름과 시간 위의 존재들은 사실은 형식으로 정해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에 정해질수가 없고 이것은 '무'라는 없음에서 계속 '무한'으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 역시 무한으로 다가가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곧 수를 세다가 '무한대'라는 무한으로 들어가게 된다. 인간이성의 한계인 것이다. 이렇게 수와 무의 반복' 자체가 무한의 존재를 드러내 주기도 한다. 무한대로 그 수의 연결과 없음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니까 말이다.

결국 아테네 학당을 거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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