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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an 17. 2018

계몽과 신화

계몽의변증법_아도르노_임경석

20180112_철학아카데미

계몽의 변증법_임경석

계몽의 개념



들어가기


오늘은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의 개념에 대해서 고민을 해 볼 것이다. 계몽의 개념이 어떤 방식으로 아도르노를 통해서 정의되는지를 살펴보자. 계몽은 '정-반-합'을 통해서 상승하는 관념론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계몽은 반대하는 힘 혹은 부정하는 힘을 통해서 자양분을 얻고 계속해서 증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계몽의 개념, Begriff der Aufklarung


계몽의 개념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살펴볼 수 있다. 지배의 도구로서 지식을 창출하는 계몽이 있다.

계몽이 자연을 탈마법zauberung화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신화를 파괴하는 계몽을 살펴보자.

신화는 이미 계몽의 산물이다.

계몽과 신화의 인식론적 차이

계몽의 신화로의 회귀

사회의 지배에서 개념의 영역의 지배로

마나와 유사성



지배의 도구, 지식창출


지배의 도구로서 지식을 창출하는 것은 계몽의 특징이다. 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계몽의 프로그램은 세계의 탈주술화였다.모든 논의를 시작하며, 계몽을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공포이고 다음은 탈마법화이며 마지막은 인간의 우월함을 제공한 지식이다. 공포란 사물의 본성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이런 공포의 극복을위해 계몽이 자연을 대상화하는 작업이 탈마법화이다.근대 실험철학의 아버지인 베이컨 이래로 근대 과학인 계몽이 추구한 것은 사물의 본성과 인간 오성의 행복한 결합은 가부장적이다. 또한 진리가 아라 실용성이며, 구체적으로는 자연과 인간을 지배하기 위한 실용적인 지식이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법이다. 권력과 인식은 동의어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진리라고 부르는 만족이 아니라 '조작'인 효울적인 처리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 과학은 자연과 인간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이지 힘이다.


기본적인 변증법의 원리


계몽, 탈마법


계몽이 자연을 탈마법화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실체와 질, 활동과 고통, 존재와 현존재를 시대에 맞게 규정하는 것이 베이컨 이후로도 철학사의 관심이었다면, 과학은 이러한 범주들은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계몽은 형이상학의 유산 속에서 예전의 힘들을 다시 발견하면서, 보편 개념의 진리 주장을 미신이라고 몰아 붙인다. 계몽은 애니미즘의 제거를 통해 세계를 탈마법화한다.근대 과학은 선사 시대의 신화적 세계관 뿐만 아니라 플라톤에 의해 등장한 형이상학 속에서도 애니미즘을 발견하여 제거한다. 그 결과 근대 과학에서 형이상학적 개념들은 부정되고, 물활론Hylosoismus의 물질인 자연은 아무런 힘도 없는 탈신비화된 지배의 대상이 된다. 계산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계몽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외부로부터의 억압이나 간섭이 없다면 계몽은 중단 없이 발전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의 권리에 대한 계몽의 관념도 예전의 보편 개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계몽은 계산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따라 미신들을 없애간다. 저자는 계몽이 중단없이 발전한다면 그러한 척도에 따라 인간의 권리에 대한 관념조차 폐기시킬 것이라고 예측한다. 하지만 계몽이 신화에 의지한 저항을 통해서는 제어될 수 없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억압이나 간섭이 필요함을 지적한다.



신화, 계몽


옛날부터 계몽은 신화의 근본 원리를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us인 주관적인 것을 자연에 투사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계몽에 따르면 많은 신화적 형상들은  주체로 환원되는 것이다. 계몽은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아예 존재나 사건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계몽의 이상은 체계이다. 계몽은 주관적인 설명 원리를 가지고 있는 신화와는 달리 모든 것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체계를 추구한다. 계몽은 사물들의 질을 박탈하고 숫자로 환원하여 비교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이로써 사회는 등가 원칙의 지배를 받게 된다.그 결과로 줄기차게 고수되고 있는 것은 신들과 질의 파괴이다.


포세이돈과 오딧세우스


신화, 계몽의 산물


그러나 계몽의 제물이 된 '신화' 자체도 이미 계몽의 산물이었다.신화는 보고하고 이름붙이고 근원을 말하지만 이로써 기술하고 확장하고 설명하는 것으로 일찍이 보고에서 출발하여 가르침이 되었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이제 더 이상 직접 원초적인 힘들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다. 헬리오스와 에오스는 이미 알레고리적인 기능으로 넘어가는 것들이다. 신화적 세계관이 발전함에 따라 신들은 훗날 베이컨이 주목한 '훈육의 힘'이 스며든 힘 그 자체가 아니라 힘을 설명하는 도구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신화는 계몽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신앞에서는 온전히 무릎을 꿇는 자만이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체의 각성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모든 관계의 원리인 힘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일적 이성을 세우는 대신 신과 인간을 분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판단을 받는다.



계몽, 인식론


신화는 계몽으로 넘어가며 자연은 단순히 객체의 지위로 떨어진다. 즉자적인 사물은 인간을 위한 사물이 왼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언제나 동일한 것, 즉 지배의 대상이라는 데에 그 본질이 있다.



계몽, 신화로의 회귀


신화가 이미 계몽을 수행하는 것처럼 계몽은 매 단계마다 더욱더 깊이 신화 속으로 빠져들이간다.계몽은 심판자임에도 불구하고 신화적인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마력적인 환상이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더욱더 사정없이 반복은 법칙성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을 순환 고리 속에 붙잡아 맨다. 모든 사건을 반봅이라고 설명하는 '내재성의 원리'는 신화적인 상상력에 반대하는 계몽이 내세우는 원리지만 이 원리는 바로 신화 자신의 원리인 것이다.



사회 지배, 개념 영역 지배


추상화의 전제가 되는 주체와 객체사이의 거리는,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통해 얻는 사물에 대한 거리에서 생겨난다. 신들 위에 있는 최고의 신이라는 관념은 무장한 귀족의 우두머리인 왕이 피정복잗르을 지배하고 의사, 예언자, 수공업자, 상인은 중개 역할을 담당하는 이러한 시민 시대와 함께 생겨난다. 개념 영역에 있어서 지배는 실제적인 지배의 토대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예술과 계몽을 고민한 아도르노


마나, 유사성


알려지지 않은 것, 낯선 것은 모두 원초적이고 분화되지 않은 것이다. 사물의 이미 알려진 속성 외에 사물 속에 있는 그 이상의 무엇이다. 개개의 사물과 구별되는 뒤엉킨 자연 전체이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경험할 때 나오는 공포의 외침이 그것의 이름이 된다. 이 불안을 표현하는 것은 곧 그것을 해명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언어는 어떤 것이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와는 다른 어떤 것, 동일적이면서 동시에 비동일적인 것이란느 모순을 표현한다. 사람들은 개념을 그것에 의해 파악되는 특징의 통일체로 정의하지만, 개념은 오히려 처음부터 변증법적 사유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증법은 무기력할 수 밖에 없다. 형식적 개념과 내용적 사물은 비동일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 사물 자체에 이를 수 없는 개념어는 공포의 동어반복이 될 수 밖에 없다. 자연세계의 분화되지 않은 뒤엉킴은 인간에게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인류는 마나의 형태로 경험하던 뒤엉킨 자연 전체를 언어로 개념화하여 구분지음으로써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개념화를 통해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좌절될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개념이 비개념적인 것을 가리키는 과정에서 개념의 보편성으로 인해 가리키는 대상과 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변증법의 기본모델이 만들어지면 어디든 적용할 수 있다


포비에르바하, 유적존재


인간은 Gattungswesen 이라는 유적 존재로서의 본질을 다룬다.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책에서 이러한 유적존재들의 성장에 대해서 말한다. 만약 여기에 '투사'라는 개념을 가지고 오면 우리가 유적존재라는 것을 사회에 투사하여 새로운 집단을 만들 수 있따는 것이다. 또한 신의 존재를 '인간의 투영'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만들어진 존재라고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회는 유적존재로 원래 존재한게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사회에 투사한거라고도 보는 것이다.



보편성, 예술


아도르노는 자신의 미학에서 예술은 보편성에 닿아야 한다고 말한다.어떤 작품이 만약 하나의 보편성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영원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 경우에는 벤냐민이 말한 것처럼 '아우라'가 흐르는 작품이 될 것이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성 안에서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계몽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사이렌, 아름다움


오디세우스에 신화에서 나오는 '사이렌'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이렌은 스스로가 아름다워서 매료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이 갖히게 만든다고 한다. 계몽의 변증법에서는 이러한 '사이렌'의 노래가 바로 대중음악과 문화 산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사이렌'의 노래를 그대로 듣고 과거에 빠져 있으면 암초 부딪혀  배가 침몰한다는 것이다. 이 신화를 통해서 '인간이 과연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에 다다르게 된다. 사이렌에게 다가가면서 오디에우스는 자신을 묶고 다른 이들에게는 귀마개를 준다. 자기 자신을 파괴시키면서 혹은 인생의 중요한 기회들을 걸면서 모험을 하는 사람들은 자본가, 혹은 리더들이다.


어딧세우스와 사이렌의 신화



예술, 신화


예술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대부분 예술은 파토스적인 것이지, 로고스적이지는 않다. 다시 말하면 지성의 힘이라기 보다는 정서와 감정의 힘이라는 것이다. 예술을 만들어내는 시원은 계몽이라기 보다는 사실은 신화라고 볼 수 있다.과거의 어떤 기억들이나 전해져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영감을 주고, 그것이 새로운 양식을 만나서 예술의 옷을 입는다. 예술이 가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기억의 재생만이 아니라, 새로운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그러나 예술의 기능으로 전락하거나 수단으로 폄하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목적이 되고 본질이 되는 것을 말할 수 있다.단지 음악을 느끼고, 단지 그림을 즐기는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신화를 넘어서 인간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여기서 아도르노가 이야기하는 탈주술이라는 것을 신화와 분리해내는 작업드리 바로 계몽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므로 예술은 다시 신화로 돌아가는 길인 반면, 계몽은 현실로 돌아오는 길인 것이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역사론


계몽, 변증법


계몽은 개별적인 것을 굴복시킴으로써 무엇인지도 모르는 전체가 사물에 대한 지배를 넘어 인간의 존재와 의식에 제멋대로 보복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진정한 혁ㅁ여적 실천은 사회가 사유를 경직시키는 수단인 의식 부재 앞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 이론에 달려 있다. 지배하는 과학에 의해 오인된 근원으로서의 자연이 기억될 때, 계몽은 완성되고 스스로를 지양한다. 계몽의 계몽 가능성은 앞으로 나아감에 대한 강박 자체가 철폐될 때 시작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아픙로 나아감에 대한 강박은 헤겔적 변증법을 의미한다. 저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계몽이 자기파괴의 과정을 멈추었기 때문에 신화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지양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때 사용되는 것이 저자들의 변증법이다.즉 These와 Anti-these가 양립하면서 서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반드시 합으로서의 Synthese를 도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계몽도 마찬가지이다. 근원으로서의 자연이 기억됨과 동시에 계몽이 양립할 때 비로소 계몽은 진보에 대한 정신작용으로서의 그 본재적인 역할을 다 할 수 있게 된다.



민네이션, 생각


오히려 고차원적으로 하나로 정해진 '계몽'은 계몽이 아니라 독재이다. 하나로 정해진 것들은 진리가 아니라 질적으로 미성숙한 혹은 역계몽의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부정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진리는 계속해서 흘러간다는 살아 있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이러한 개념이 만약 고여 있거나 순응하거나 어딘가에 정착하면 그것은 계몽이 아니라고 말한다. 부정하는 힘에서 부터 진리가 기능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증주의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부정하는 힘은 계몽을 지켜주면서 진리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과정


민네이션, 계몽


아도르노가 말하는 '부정하는 힘'으로써의 계몽은 사실 헤겔 변증법의 오마주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은 정으로써의 관념과 반으로써의 실재 그리고 이것들의 상호작용으로서 절대진리가 나온다는 것이다.그런의미에서는 헤겔은 낭만주의였으나 아도르노는 오히려 헤겔의 낭만주의적인 방식을 비판하면서 실재론을 실증주의로 규정하여 제거하고 관념의 상승작용을 최우선으로 치는 것이다. 이리하여 헤겔의 변증법이 오늘날에는 정-반-합'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전락한게 아닐까?한다.



민네이션, 메타인지


사실 부정하는 힘은 한단계 바깥으로 나오는 힘이면서 이것은 메타인지라고 할 수 있다.계몽의 핵심은 바로 메타인지를 통해서 더 깊은 혹은 더 큰 개념으로 이성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메타인지를 통해서 깊게 들어가거나 높게 올라가거나 확장되는 것에 따라서 계몽은 그 자체로 계몽화되어서 확장된다.이러한 메타인지가 늘어나게 되면 독창적으로 부정하면서 변증법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계몽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들뢰즈는 실재계 속으로 더 들어가서 메타인지를 늘리고, 반대로 아도르노와 비판학파는 관념계 속으로 더 들어가서 메타인지를 늘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계몽의 끝자락에서 계몽을 뒤집는다는 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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