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송철학 _철학아카데미
20180112_철학아카데미
베르그송 철학_류종렬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머릿말
들어가기, 베르그송 도식
지난시간까지 우리는 서양철학사의 3층 구조를 알아보았다. 플라톤의 세계(3층), 스피노자의 실재론(2층), 생물학의 세계(1층)가 바로 그것이다. 서양철학은 항상 3층 세계와 1층 세계의 오마주였다고 할 수 있다. 3층은 로고스의 철학이고 2층은 에토스이다.
3층에서 2층으로 내려오면 이제 2가지의 생각방법론, 혹은 인식론이 등장하는데 바로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성찰이었다. 데카르트에 대한 독해를 하면서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서 다시 2층을 투사하는 방법이 나온다. 바로 여기서 에티카를 쓴 스피노자의 철학이 나온다.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지속과 연결'의 개념은 1층에서 2층으로 투사할 경우 이 것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2층이라는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1층의 한 점에서 분기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3층 철학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하고 3층에서 2층인 실재로 내려오는 분기점에 브르노가 있다.
칸트는 3층을 포기하고 1차로 빠지면서 순수이성이라는 오감의 기능을 강조하는데 반해서 2차에서 3차로 변증법적 상승을 하는 헤겔을 볼 수가 있다. 1850년 이후에는 생물학과 과학의 발달로 인해서 1층의 질료중심으로 정체성을 가진 철학이 발전한다. 형상형이상학자는 3층에, 질료형이상학자는 1층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3층과 1층의 오마주를 들뢰즈는 전회라고 불렀다. 그러니깐 3층에서는 관념에서 현실이 발생한다고 생각했고, 1층에서는 물질에서 현실이 발생했다고 여겼다.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물질에서 현상화되는 것이 바로 현실의 여러가지 윤리적인 존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3층의 가장 위에 '일자'라고 부르는 nous가 있기도 하지만, 반대로 1층 아래 지하에 '일자' nous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존재의 욕망'인 코나투스는 바로 1층에서부터 계속 2층으로 현상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헤겔은 2층에서 3층으로 계속 정신이 자기구조를 만들어간다는 '정신현상학'을 썼다.
오늘은 베르그송의 철학의 가장 처음으로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을 공부할 것이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목차
머릿말제1장 심리상태들의 강도에 관하여
제2장 의식상태들의 다수성에 관하여 : 지속의 관념
제3장 의식상태들의 조직화에 관하여 : 자유
결론
해제 : 베르크송의 생애와 철학, 그리고 '시론'
베르그송 연보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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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방법 : 2장을 먼저 보고 1장과 3장을 함께 볼 것이다.
머릿말, 1988년 2월 앙리 베르그송
우리는 반드시 말을 통해 의사를 표현하며, 우리의 사유는 대부분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달리말해서, 언어는 물질적 대상들 사이에서와 같은 선명하고도 명확한 구별, 즉 불연속성을 우리의 관념들 사이에도 확립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대상과 관념을 동일시하는 것이 실제의 삶에서는 유용한 것이며, 대부분의 과학에서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몇몇 철학적 문제들이 일으키는 극복할 수 없는 난관들은 전혀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현상들을 공간 위에 병치시키려고 고집하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떤 거친 이미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질 때, 그 거친 이미지들을 빼버리고 나면 때로는 논쟁이 끝나는 것은 아닐까?하는 것을 자문해 볼 수 있다.
비연장적인 것을 연장적인 것으로, 질을 양으로 부당하게 번역함으로써, 제기도니 문제의 바로 한 가운데 모순을 자리잡게 했을 때, 제시된 해답들 속에서 그 모순을 다시 발견하는 것이 놀라운 일일까? 여러 문제들 중에 우리는 형이상학과 심리학에 공통적인 문제, 즉 자유의 문제를 선택했다. 우리가 확립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결정론자들과 그 반대자들 사이의 모든 논쟁은 이미 그 전제 속에, 지속과 연장성, 계기와 동시성, 질과 양 사이의 혼동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혼동이 일단 걷히기만 하면, 아마도 자유로 반대하여 제기되는 반론들과 자유에 대해 사람들이 내리는 정의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의 문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우리 작업의 세번째 부분의 일이다. 강도와 지속의 개념을 연구하는 처음의 두 장은 제 3장에 대한 입문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씌였다.
공간, 의식
공간 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실체로 존재하는 의식은 어떤 대상을 의식하지 않고, 혹은 매개하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베르그송은 머릿말에서 이러한 공간 속에 존재하는 의식이 어떤 매개체 없이 바로 주어진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인간본성, 세가지 자아
- 심리존재
첫번째는 심리존재의 성립에 관한 것이다. 구체적이고 살아 있는 이 존재는 변화하며 연속적이고 비가역적 존재이다. 이 존재는 순수지속이며, 변화를 지속하고 현재 속에 과거를 보존하면서 성립하는 실재성이다. 이 실재성이 곧 온의식이며, '대양'에 비유된다. 의식이라고도 부르는 이 심리적 존재가 존재론의 근원이다.
이 존재는 플로티누스처럼 은유적으로 태양이라고 부를 수 있고, 스피노자처럼 자연 즉 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베르그송은 물체의 총체인 우주도 실재성이며 비가역적이고 지속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주의 생성 변전도 되돌릴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이 변전하는 존재의 현존은 우주에서든 의식있는 존재에서든 이질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변화하고 운동하면서 존속한다. 우리는 우주 전체의 변화를 단번에 알 수 없지만, 우리 자신의 의식의 내부에 성찰하면서 존속한다. 우리는 우주 전체의 변화를 단번에 알 수 없지만, 우리 자신의 이식의 내부를 성찰하면서 유추할 수 있다.
- 발전 자아
둘째는 발전자아의 성립에 관한 것이다. 존재의 현전은 시간 지속에서 생성과 진화 과정을 통하여 드러난다. 베르그송은 위의 존재론적 해명의 불충분함을 해소하기 위해 기억과 생명을 공연적으로 간주하고, '온의식'에서 출발한다. 온의식은 자신에 의한 자기 생산의 과정을 걷는다. 우주 발생론과 맞먹을 진화과정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두 가지 인식의 두 방식, 즉 직관과 지성에서 나온다. 이것은 생명현상의 긴 진화과정에서는 본능과 지성이다. 모든 생명체의 본능은 신체 자체의 무매개적 인식이며, 지성은 사물을 대상화하여 물체를 도구적으로 측정하는 인식이다. 인간에게서는 무매개적이고 직접적인 인식인 본능은 삶의 행동에 편리한 지성의 도구적 인식 때문에 뒤로 밀려나 있다. 그래서 지성이 중심으로 보이고 본능은 지성을 둘러싼 성운처럼 지성의 인식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지성이 사물에 대한 실험에서 자신인 개체적 자아의 이익을 벗어나서 전체를 조망하게 되면, 지성을 관류하는 다른 인식 즉 직관이 있음을 알게 된다. 생명의 진화과정에서 본능과 지성은 분화하였으나, 같은 근원적 충력에서 나왔기 때문에 상보적이다.동물 진화과정에서 본능의 인식을 발달시킨 막시류와는 다른 끝에 있는 인가의 지성은 표상화의 방식을 극대화하는 능력이고, 외적대상을 다루는 능력이다.본능은 생명의 인식 기능인 신체와 연관하여 역동적으로 확장하는 '사유의 한 질서'이고, 지성은 대상에 대한 도구적 인식 기능으로서 물체를 분절화하여 기계적으로 조작하는 '사유의 다른 한 질서'이다.
- 실천적 자아
세번째는 실천적자아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진화의 한쪽 극한에 있는 인간이 왜 원만한 인류공동체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자연에 대해서는 자기 생존을 위해 사회형상에서 금지를 만들었으며, 사회에서는 생명의 보존과 관습의 유지를 위하여 공동체의 이념을 닫힌 신앙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의식이 발전하면서 두 개의 방해 요인을 뚫으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기존의 저항을 극복한 자들은 도덕적 영웅이며, 종교적 신비가이다.이 후자는 극히 소수였지만 도덕 영웅만큼 많은 사람들을 따르게 하는 감동의 힘이 있다.
제 2장 의식상태들의 다수성에 관하여, 지속의 관념
수는 일반적으로 단위unite들의 집합,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해서 하나와 여럿의 종합으로 정의된다.왜냐하면 모든 수는 정신esprit의 단순한 직관에 의해 표상되고 하나의 이름이 주어지므로 하나의 수이지만, 그러한 단일성unite은 합계somme의 단일성이며, 그것은 개별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다수의 부분들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당분간 그 단일성과 다수성의 개념을 깊이 다루지 말고, 수의 관념이 또한 어떤 다른 것의 표상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지를 자문해 보자.
unite, 단일성
수의 개념에서볼 때 사실은 3,2,1층 모두 숫자로 표현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단일성'의 개념이 사용되었다.흐름의 개념에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서도, 하나라는 숫자로 치환되지 않는다.그러나 단일성이라는 것으로 볼 때 모든 것은 다 단일하다.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방식은 단일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층부의 단일성으로 돌아가는 방식을 오이디프스라고 말했고, 심층부로 돌아가는 방식을 앙티오이디프스라고 들뢰즈는 말했다.그러나 들뢰즈의 '배치와 지속'의 개념은 사실 베르그송에서부터 많이 빌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어철학, 분석철학
언어철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대응론과 정합이론이 있다. 대응론은 지시하는 것은 오직 1:1로 대응한다는 것을 말한다. 정합이론은 1:1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지시의 영역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게 하기로 하자라고 하는 가정법이라고 할 수 있다. 1884년에 프뢰게는 언어는 문장이기 때문에 한사물이나 사건과 대응한다고 생각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수학도 언어철학처럼 실제에 수학이 대응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재밌는 이야기지만 루트2의 문제를 2000년동안 풀지 못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와 뉴턴은 이것을 '벡터'개념으로 풀어낸다. 중요한 것은 3층과 2층 사이에서 수의 개념과 1층과 2층 사이에서의 수의 개념은 다루다는 것이다.
민네이션, 공백
이 부분에서 알랭바디우가 말하는 '일자는 없고 순수다자만 존재한다'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3층 위의 1자는 존재하지 않지만 3층과 2층 사이에서 순수다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바디우가 이야기한 '공백'도 어떻게 보면 베르그송의 오마주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2층과 1층 사이에서의 공백이 베르그송이라면 2층과 3층 사이에 공백이 바디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바디우의 성찰 24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충만한 연역들이 공백 사이에 이미 준비를 하고 있고 이것이 존재하는 방식은 연역을 통해서만 그렇다.
민네이션, 혁명
베르그송 도식에서 보면 사회혁명은 3층에서 2층으로 내려오게 만드는 과정이다. 과학혁명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회혁명은 3층과 2층 사이에 존재하고 그 파급력과 영향력에 따라서 혁명의 위치가 정해진다. 프랑스에서 3층에서 2층으로 내려오는 계기가 많았던 이유는 '프랑스혁명'으로 인해서 3층을 유지하던 왕권과 교황권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이나 독일 같은 경우에는 3층을 굳건히 지키는 왕권이 존재했기 때문에 겨우 2층에 내려와도 1층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다시 헤겔과 같이 3층으로 올라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역사에서 87혁명, 촛불혁명은 어떤 층에 있는 것인가?
민네이션, 자아
3층의 도식에서 이제 자아'를 증명해 낼 수 있다. 로고스에 의한 자아인지 아니면 에토스에 의한 자아인지, 혹은 1층에 존재하는 파토스에 의한 자아인지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3층은 로고스, 2층은 에토스, 1층은 파토스이다. 이 3층 구조에 어떤 개념이 등장하면, 어디에 위치하는가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개념이 된다.그리고 방향성이 어떻게 '지속'되는가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층으로 내려올 수록 당위가 없어지고 존재자체로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3층으로 올라갈 수록 자유는 사라지고 동일률이나 일자에 의한 비자유가 만연해진다고 볼 수 있다.
민네이션, 사랑
이제 이 3층 도식을 뒤집어 보자. 아니 섞어보자. 1,2,3층을 구성된게 아니라 '퀀텀'과 같이 양자역학적으로 모든 차원이 하나의 현실에서 뒤섞여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그 모든 것들이 인간안에서만 일어나는 '파토스-로고스-에토스'의 통합적인 존재플랫폼이라고 볼 수 있다.그렇다면 사람은 존재하는 방식이 1,2,3층이 한꺼번에 존재하고 구분은 했지만 이것은 사실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뇌를 생각해보자. 뇌를 구성하는 것은 '뉴런'이다. '뉴런'은 1층에 있지만 뉴런들이 모이면서 기능을 하게 되면 2층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미지와 기억을 통해서 현실을 해석하기 시작하면 이제 거기서 3층에서할 수 있는 '상상'을 할 수 있게 된다. 발생학적으로 또는 초기독일의 낭만주의자들처럼 '생기론적 범신론'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생기론은 1층에서 올라오는 것이고, 범신론은 3층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에게는 결국 2층에서 통합려고는 노력을 볼 수 있다.나는 이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중기, 후기로 갈수록 헤겔 이후에 다시 낭만주의는 3층으로 올라가려고 한다.그러나 우리는 '사회혁명'을 통해서 3층에서 2층으로 다시 1층으로 내려온 다면 이것을 2층에서 통합시켜서 퀀텀적인, 양자역학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여기서 나는 '사랑'이라는 것 때문에 통합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없는 존재는 의도적으로 두가지 중에 한가지를 버리게 되는데 자연과 관념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작업들이 철학자들의 논리라면 현실을 모두 받아내면서 그대로 실제를 이끌어가는 책임을 지는 것은 오직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현실에서 통합을 이루어 낸다. 사랑의 계보학에서 이 이야기는 더 해보기로 한다. 사랑의 계보학은 전통적으로 책임과 희생을 통해서 어떻게 관념과 자연을 연결시키고 변화를 만들어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