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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an 11. 2018

존재와 연역

알랭바디우 존재와 사건_철학아카데미

20180111_철학아카데미

알랭바디우_존재와 사건_홍기숙

성찰 24_존재론적 충실성의 조작자로서의 연역



들어가기


성찰 18을 잠시 보자. 자연적 상황의 존재론적, 수학적 기본꼴은 성찰 12에서 보는 것처럼 서수이다. 그러면 사건적 자리인 공백의 가장자리, 정초적 자리의 존재론적 기본꼴은 어떤 것이 될까? 이 문제에 대한 검토는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놀라운 결과포 이어진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순수 다수, 존재로서의 존재의 모든 사유 가능한 사례는 역사적이지만 공백의 이름, 기호가 역사적 상황으로 '셈해지는 것'을 허용한다는 조건에서 그렇다. 사건은 금지되며 존재론은 그것을 '존재로서의 존재가 아닌 것'으로 거부한다. 우리는 다시 한번 공백은 공제적으로 모순적 명명들을 지탱한다는 것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모든 공리는 실제로 모든 순수다수는 역사적이며 또는 최소한 하나의 자리를 포함한다고 말한다.



수학, 사건


수학은 사건에 대해서 말이 없지만, 사실은 사건에 징후를 포함하고 있다. 사건에 대한 수학적 개념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수학적 개념이 없으면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수학적인 도움이 전혀 필요 없다. 그러나 수학적인 방식으로 사건은 기록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수학의 역사성은 사언과 개입의 시간적 기초 기능이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바디우와 지젝은 친할 수 밖에 없다


수학자, 위협


수학자란 다름 아니라 수학적 상황 내부의 자리의 가장 자리들에서 위험 천만하게도 공백이 호출됨으로써 일자에게 큰 위험이 초래될 때 개입하는 사람이다. 만약 어떠한 존재론적 진술도, 어떠한 정리도 사건과 관련되지 않거나 사건의 결과의 인접성을 평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자. 존재론은 엄격히 말하자면 충실성에 대해서 어떤 것도 입법화하지 않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론의 전체적인 역사적 전개 동안 내내 사건과 정리들이 존재했다. 그 결과 그에 따라 이것은 현시의 현시인 존재론은 자체가 오직 시간 속에서만 상황으로 현시된다.새로운 명제들은 그러한 현시를 시기와하는 것이다.물론 수학적 텍스트는 내재적으로 평등주의적이다. 명제들을 명제-사건이나 발견에 대한 인접성이나 접속의 정도에 따라 범주화하지 않는다.명제들은 참이거나 거짓이며, 증명되거나 반증되면, 모든 명제는 궁극적으로 순수다수이다.따라서 존재로서의 존재의 '존재한다'가 실현되는 형식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래도 역시 수학저작의 편집자들이 항상 중요도(기본 정리, 단순정리, 명제, 보조정리)에 따라 명제들을 범주화하거나 종종 어떤 명제가 제출된 날짜가 제시한 수학자 등을 이용해 그러한 명제를 명명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은 분명 증상이다.


바디우는 한마디로 무서운 사람이다. 보편성을 불러내기 위해서 형이상학을 다시 정의한다.


바디우, 존재론


바디우가 정식화하고 싶은 명제는 다음과 같다. 매순간 존재론의 외재적 사건성에 대한 충실성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은 연역, 증명에 대한 요구, 정합성의 원리, 상호 관련의 규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중적인 정언명령이 나타나게 디는데, 새로운 정리는 상황과 정합성을 입증하고 그로부터 끌어낸 후과들은 자체가 명백한 법칙들에 의해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건이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은 공백에서 등장하는 사건이 사실은 연역적으로 이미 존재한 장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연역된 이론과 학설들 사이에서 사건이 발생하면 이것은 존재론과 연결되어서 명제나 공리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이미 현실을 바로바라는 내내 연역적으로 규정된 규칙과 법칙들이 인지되고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인지된 현실에서 사건이 등장하면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론의 차원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존재하는 형이상학의 공간에서는 공백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이론과 법칙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바디우는 연역의 공간을 하나하나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연역법들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도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연역의 공간들을 증명해내면서 공백 속에서 무수히 녹아져 있는 연역된 이론과 법칙들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나 연역법으로 드러나는 이론, 명제, 공리는 '순수 다자'에서 온 것들이다.




귀류법, 바디우


어떤 사람이 별 생각없이 A가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A가 아닌 것이 참이라는 것을 상정하고 그러한 가정에서 결론을 맺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오직 거기에서의 참은 A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귀류법이라는 기본꼴은 얼핏보면 가설적 추론과 동일하다. 귀류법을 통해서 드러나는 오직 하나의 명제 A도 사실은 '일자'라는 동일자가 아니라 '순수다수'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바디우는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다. 형이상학의 영역에서는 한가지로 대변되는 것은 없다는 것이며, 순수한 다자들의 가능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연연적 충실성, 삼중규정


연역이 존재론적 충실성의 기준이라는 것만큼은 선험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 일단 이 명제들이모두 현시 일관과 관련되고, 다수를 오직 순수 다수성 속에서 바라본다면 새로운 명제들과 이미 확정된 명제들 사이의 '인접성'에 대해 둘 사이의 등가성을 확인하는 규칙 말고 다른 어떤 규칙도 사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명제가 순수다수가 존재한다고 긍정할 때 이 존재는 존재의 원천의 존재이므로 존재가 긍정되거나 연역된 그러한 자원들의 또 다른 것의 비존재를 대가로만 확보될 수있음은 확실하다.  존재로서의 존재는 존재-론적 담론에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대가로 증식되지 않는다. 그것은 죽음뿐만 아니라 삶에도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수 다수들의 현시적 원천전체에 걸쳐 고루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만약 모든 다른 다수의 존재와 등가적인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다수의 존재같은 것은 전혀 선언될 수 없을 것이다.


연역이라는 입장에서 베르그송의 지각은 형이상학의 오마주인 형이하학의 진화스텝이다. 길항적으로 마주보는.


민네이션, 생각


형이상학과 형이학이 만나는 지점이 사건인데,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이 진리를 불러오는 자리는 형이상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현실에서 진리의 자취는 숫자로 혹은 연역으로 남아 있게 된다. 그것은 명제가 되기도 하고 이론이 되기도 한다.진리는 한번만 반짝이며 등장하고, 사건은 그 당시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은 항상 형이상학에서 연역적으로 등장하여 형이하학에 숫자로 남겨진다. 진리는 지나가고 남는 것은 사건을 기억하는 숫자인 것이다. 바디우는 형이상학의 입장에서 기술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형이상학 안에서 순수한 다수가 현실에 진리의 일정한 양식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드러날 때는 순수한 다자 중에 하나가 나오는 것이지 동일자인 하나가 예전과 지금도 똑같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형이상학 안에서 현실에 접근한 진리가 있고, 동일자 하나NOUS에 접근하는 진리가 있다. 바디우는 현실에 근접한 다수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민네이션, 형이상학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현실을 날아다니지만 관념의 세계에서는 모든 곳에 존재하면서 어떤 곳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실체라고 부르는 영역에서는 단지 부엉이이지만 관념의 세계에서는 미네르바라는 어떤 것도 연결되지 않은 신화적 존재와 연결되는 것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관념의 세계에서 날개짓을 하고 이것은 현실을 박차고 높이 올라간다. 절대단수가 있는 영역까지는 가지 않고 이것은 오히려 이카루스의 날개와 같다. 왜냐하면 그 지점에 도착하면 모든 것들이 하나로 통일되면서 관념의 세계가 사라짐으로. 그래서 다수가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는 영역까지만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아다닌다. 그리고 이 부엉이는 시간의 존재의 안에서 어떤 흔적과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부엉이는 한 사람의 관념에서 빠져나와서 이성의 공간이 만들어진 모든 존재들의 공백들을 날아다닌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가정이나 이론, 학설이나 정보로 존재하고 어떤 인간의 생각 속에서는 기억이나 추억 혹은 예상이나 기대가 된다. 이러한 관념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부엉이는 오직 부엉이라는 실체와 1:1로 교차한다. 그래서 이것은 다시 수학과 논리의 영역으로, 증명의 세계로 도래한다. 그러나 바디우에게서 배우는 것처럼 이것은 공백을 포함하고 있고 이것은 사건의 징후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사건 그자체는 아니다.



민네이션, 형이상학


바디우는 철저하게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보편성을 말한다. 보편성에서 존재의 등장을 예견해 놓고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 연결시켜서 존재론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존재-사건이 연결되는 순간이 바로 '진리'가 현시되는 시점이다. 나의 고민은 결국 '유기체'라는 현실에서 현시되는 이야기가 정해진 것인가 아니면 만들어지는 것인가? 무게는 매우 깊고, 진중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플라톤의 망령을 불러 오지 않겠는가? 그래서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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