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_철학아카데미
20180110_철학아카데미
계몽의 변증법_아도르노_임경석
서문, 시작
들어가기
1947년 서문Vorrede와 1969년 신판Neuausgabe의 그에 대한 요약을 오늘 공부할 것이다. 1944년 완결되고 1947년 6월에 출판된 이 책의 서론1947에서 공동 저자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arung이란 저서의 제목에 철학적 단편들Philosophische Fragmente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철학적 단편들'이라는 용어는 사실 그리스철학시기에 탈레스나 데모크리토스 같은 학자들이 사용하던 방식이다. 전쟁중에 글을 쓰면서 논리전개나 큰구조를 생각하기 어려웠던 점을 감안한다면, 철학적인 단편들은 초벌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부분은 독자들에게 주어진 숙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단편들이 무작정 나열식이 아니다. 나열에도 어떤 연결성이 존재한다. 이에 이 책의 제목에서 사용된 변증법과 계몽의 개념적 의미는 무엇이며, 부제에서 사용된 단편이란 표현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지 생각해보자.
계몽, 변증법
계몽의 변증법에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서로 단편들을 가져다 놓았다. 아노르노의 경우 어머니는 프리마돈나였고, 음악과 미적인 관심이 높았다. 그래서 아노르노에게는 철학들의 구조가 미학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왜 변증법인가?라는 것이다.
아도르노, 질문
저자들이 이 책을 헌정한 폴록Friedrich Pollock이란 인물은 누구인가?저자들은 "왜 인류가 진정한 인간적인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상태에로 함물되었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데, 이 문장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야만적 상태는 어떤 것이 있는가?''진정한 인간이란 상태'는 어떤것을 말하는가? 계몽의 변증법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쓰여졌다. 진정한 인간이란 '나는 누구인가'를 포기하는 순간 야만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비판하는 능력이 정지하는 순간 계몽은 사라지고 인간을 인간이 아닌길로 이동시킨다. 프랑크프르트 학파가 이야기하는 가장 큰 부분은 바로 '내면의 계몽성'을 포기하는 순간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성의 힘인 '부정하는 힘'이 내면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계몽주의, 국가
계몽주의는 국가별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프랑스 같은 경우 스피노자와 같이 '백과사전식 계몽주의'를 진행했던 것이다. 개념어사전을 만들고 이것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과정을 통해서 계몽을 하는 것이다. 독일의 칸트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서 개념의 분할을 다루지만 조금 다른 부분은 '이성의 능력'이 더 강화되어서 계몽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인간성이 내제되어 있다고 말한다. 계몽주의가 발전하면 '신의 존재 증명'까지 가게 된다. 이성이 어디까지 신을 증명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고, 이러한 양상은 바하나 사드처럼 신을 부정하고 실재계를 완전하게 놓은 것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18세기, 계몽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이 비판으로서의 힘을 상실한 순간에 그 저항의 대상들과 손을 잡게 된 것처럼, 오늘날의 사회적 문제들과 관련해 사상은 '긍정하는 힘'이기보다는 '부정하는 힘으로서의 비판'으로 진리를 보존해야 한다. 저자들은 모든 분야에서 내외적 검열은 '이론적 상상력'을 차단하고 '정치적 광기'를 준비하며, 결국에 저항의 소단을 상실할 위험에 처하게 됨을 직시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68혁명 때 슬로건이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는 것이었다. 저자들의 이론이 담겨 있는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저자들의 과제는 '계몽의 부단한 자기파괴die ratlose Selbstzerstorung der Aufklarung'의 과정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역설하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한 사회에서 자유란 계몽하는 사유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 대한 어떤 의심 -그리고 이 점에 우리의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가 놓여 있음-도 품지 않는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뒤엉켜 있는 사회의 구체적인 역사적 형태나 제도뿐만 아니라 바로 이런 사유의 개념은 이미 오늘날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 퇴보의 싹을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고 믿는다. 계몽이 이런 퇴행적 계기를 반성하지 못한다면, 계몽은 그 자신의 운명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봉인하게 될 것이다.""계몽이 신화로 퇴보하게 된 원인을 이런 퇴보를 위해 고안된 민족주의적, 이교도적 또는 그 밖의 다른 현대적 주술적인 것들에서 찾는 대신에, 진리에 대한 공포에서 경직된 계몽 그 자체에서 찾으려 한다"
투명성, 사유
비판학자들이 보기에는 잘못된 투명성이 신화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다. 투명성이라는 것은 인간을 그대로 보고, 보여지는 것 자체로만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비판은 내가 위기의식을 느낄 때 하는 것이다. 위기와 위기가 아닌 상황을 이야기하려면 기준이 필요하다. 그러나 신화는 위기의식을 덮어놓고 그 위기를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넘겨버린다. 비판critic은 위기라는 어원에서 왔다. 계몽주의 철학이 안주했을 때, 부정적인 힘을 통해서 다시 상승하는 것을 부정의 변증법, 계몽의 변증법이라고 불렀다.
비판학파, 질문
저자들이 보는 '경제적 생산력'의 이중적 의미와 '경제적 힘들'의 의미는 전통적인 맑스의 해석과 어떤 점에서 구분될 수 있는가? "정신의 진정한 업무는 물상화의 부정이다"'진보가 퇴보로 뒤집어 진다'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면서, 본 서론은 '계몽의 변증법'이 다루려는 단편들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잘 요약설명하고 있다. 첫 논문 '계몽의 개념'의 핵심은 '신화는 이미 계몽이다'라는 점과 더불어 '계몽은 신화로 뒤집어 진다.'는 두개의 진실로 요약된다. 이 두 진실은 다시금 두 개의 '부연 설명들'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된다.
첫번째 부연설명, 작품
'첫번째 부연설명'은 시민적, 서구적 문명의 최초 증인인 오디세우스를 중심으로 신화와 계몽의 변증법을 추적하고 있다. 이 때 그 중심 개념은 '희생'Opfer와 단념Entsagung 인데 이를 통해 '신화적인 자연'과 '계몽된 자연'의 지배 간에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성, 자유, 시민과 같은 개념들이 고대인인 오디세우스에게 출현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오디세우스의 계몽주적 주체로서의 형성과정을 묘사한 작품인 '오디세우스'에는 많은 신화적 인물과 에피소드들이 출현한다. 사이렌, 키르케, 거인 폴리페모수에게 자신을 '아무도 아니다'로 소개한다.
두번째 부연설명, 작품
'두번째 부연 설명'은 계몽의 무자비한 완성자인 칸트와 사드, 그리고 니체를 다루고 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모든 자연을 '주체철학'에 복종시키려는 경향을 고발하려는 의도이다. 사드 백장의 소설 속 인물인 폭력과 섹스의 찬양자 줄리엣이 여기서 주인공이다. 악의 근원은 합리성의 구조 자 그 자체에 내재해 있음이 강조된다.
문화산업, 대중기만으로서 계몽
대중기만으로서의 계몽이란 장은 '계몽이 어떻게 이데올로기로 퇴보하게 되는지'를 영화와 라디오란 매체를 통해서 보여준다. 저자들과 발터 벤자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나타난 대중문화에 대한 상이한 입장을 비교해 보자. 영국의 문화연구에서 드러난 엘리트주의적 문화해석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엘리트주의자는 대중문화의 조작가능성과 저급성(타율성)을 강조한다. 관리되는 사회의 문화사업을 이끌어 낸다. 대중주의자는 대중문화의 해방적 요소와 보편성(자율성)을 강조한다. 다원주의사회와 다중의 민주주의적 참여가능성에 주목한다. 이 저서의 저자들이 과연 대중문화의 담론에서 종종 인용되는 것처럼 어떤 엘리트주의잗르인가? 저자들이 비판의 대상은 '대중문화'가 아닌 '문화산업'임을 명심하자. 그렇다면 후자의 특징은 무엇일까? 문화산업론이 지니는 현재성은 무엇일까? 이윤이나 경제적 논리에서 벗어나 보호되어야 할 문화(자격과 기준)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마치 로트와 같은 등장하는 문화산업이 추구하는 새로움의 배제로서의 사이비-새로움에 대하여를 참고해야 한다.
반유대주의의 요소들, 계몽의 한계
계몽의 한계는 계몽된 문명이 실제 현실에서 어떻게 야만상태로 회귀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데오진크라지idosyncracy는 과민거부, 특이체질, 성벽을 이야기한다. 잘못된 투사falsche projection은 자기체념self-entsangung을 내포하고 있다.
스케치와 구상들, 작품
스케치와 구상들은 향후 작업인 '우리는 야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란 질문과 변증법적 인류학에 관계한다.
신판을 위하여, 계몽의 변증법
왜 '계몽의 변증법'은 1947년 네덜란드의 쾌리도출판사에서 출간되었는가? 쾌리도출판사는 당시 독일에서는 유대인들이 출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네덜란드로 피신하여서 만든 출판사이다. 아쉽게도 쾌리도라는 유대인은 44년에 나치에 붙잡혀서 죽게 된다. 이후에 동업자인 한 사람이 계속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주로 나오는 출판사이다. 판괴되는 세계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화는 항상 어두우면서 동시에 밝히는 것이다'의 의미는 무엇인가? 계몽과 진리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현대인의 자연으로부터의 분리가 의미하는 바와 물질적 생산력의 증대 속에서 드러나는 정신의 빈곤을 고민해 보자. 진보의 표상인 행복의 재화들이 다름 아닌 퇴보, 즉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현실에서 이 단편들은 출발한다.
민네이션, 생각
단편들은 그냥 떠오르는 것을 적어놓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알랭바디우에 의하면 순간 번쩍하고 등장한 진리를 포착한 것일수도 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러한 진리들의 단편들이 변증법적으로 연결되도록 일련의 방향을 그려놓았다. 내면에서 생겨나는 비판적인 의식이 현실을 비판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나를 유지시켜주면서 문명을 유지시켜주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베르그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계몽의 변증법은 현실에서 이상이나 관념을 다시 부활시키는 관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헤겔에 의해서 멈춰진 변증법이 다시 비판학파에 의해서 재시작이 되는 것이다. 인류는 계몽을 통해서 발전하고 그것이 인간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부정하는 힘을 통해서 물질과 이상의 분할에서부터 물질 내부의 분할과 문제의 분할까지 진행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하기를 통해서 새로운 통합이 일어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대안이 필요하다. 비판 이후에는 긍정하는 힘을 통한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민네이션, 인간
나는 어떤 인간의 상황을 그리면서 살고 있을까?나는 어떤 인간이고 인간들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가?질문이 많아지는 밤이다. 정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비판학파처럼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맞을까? 인간의 죄문제를 부정하고 인간 자체는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를 바라볼 때 죄악의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나는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이 주는 긍정성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식의 고민이 바로 비판학파의 특징이다. 보통 실존주의는 '팩트'에 근거해서 긍정성을 가지는 것이다. 신의 존재가 팩트이면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되는 것이고 팩트가 아니면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되는 것이다.
민네이션, 계몽
계몽은 시작에서부터 현재까지 많은 개념의 변천을 겪어왔다. 코젝렉의 논의처럼 '개념사'는 항상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도르노의 시기에 이야기하는 계몽과 지금의 계몽은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아도르노가 생각하는 계몽은 결국 '이성의 힘'이고 그 중에서도 '비판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비판하는 힘은 헤겔과 같이 부정하는 것들을 통해서 진리를 파악하는 변증법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논리에서처럼 다시 이성으로, 관념으로 돌아가는 길은 사실은 현실을 부정하는 길이기도 할 수 있다.계속 지켜보고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