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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Sep 04. 2022

허무주의를 넘어 자유의 정신으로 _니체

니체_정동호_5장, 6장_책읽으며 드리는 예배

함께 스터디를 하고 있다. 이번달에는 니체를 읽고 있다. 많은 부분 고민할 부분들이 있지만 니체가 말하는 도덕의 문제와 사회의 침체는 일리가 있다. 특히 사회계약이 가지고 있는 단점들도 200년이 넘어서야 보이기 시작하는데, 루소는 그 당시에 바로 보고 있었다.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 힘에의 의지라는 말, 금발의 야수들에 대한 고민들을 시작해보고 논의하는 사이에 조금 더 니체에 다가갈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보자. 위버멘쉬와 짜라투스트라 그리고 자연의 본성에 대해서 니체가 이해한 것들을.


https://brunch.co.kr/@minnation/3102


제 5장 가치의 전도


가치전도의 역사가 바로 가치 변천의 역사였다.


인간은 항상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로 사회를 구성했다. 니체가 넘어야 하는 것은 기존의 가치들이었다. 그 가치들은 '허무주의'와 생에 적대적인 가치였다. 이러한 가치를 넘어서 건강하고 건전한 가치를 세우는게 니체의 임무였다. 니체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세우기 위해서 소크라테스 이후 흔들릴 수 없었던 형이상학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를 무너뜨린다. 니체가 보기에 원래 가치는 '자연적 가치'였다. 자연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가치를 소크라테스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형이상학과 도덕적인 윤리기준으로 바꾸어 버렸다. 따라서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세워놓은 가치를 전도하기 위해서 소크라테스 이전으로 돌아간다.



니체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를 통해서 가치의 전도가 시대적 사명임을 깨닫고 스스로를 연금술사가 되어서 새로운 가치의 전도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변화할 것을 다짐한다. 1884년 '영원회귀 철학'을 구상할 무렵 "모든 가치의 전도를 위한 하나의 시도"라고 말하면서 결국 4권의 책을 낸다. 가치전도 시리즈는 '안티크리스트', '자유로운 정신', '비도덕주의자', 디오니소스'였다. 니체가 생각하기에 인간이 거짓된 가치에서 벗어나면 자유로운 정신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역사적 안목과 전사적 의지와 결단, 주변의 냉소에 맞서야 하지만 니체는 가치전도를 통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니체가 말한 '자유로운 정신의 십계명'은 다음과 같다.


자유로운 가치의 십계명_니체

1. 민족들을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말 것
2. 정치에 나가지 말 것
3. 부유해지지도 그렇다고 거지가 되지도 말 것
4. 유명하거나 영향력있는 사람을 멀리할 것
5. 아내는 다른 민족에서 취할 것
6. 자식은 친구에게 맡겨 교육할 것
7. 교회 예식에 복종하지 말 것
8. 지난날의 과오를 후회하는 대신 옳은 일에 더 힘쓸 것
9. 진리를 말하는 일이라면 추방조차 마다하지 않을 것
10. 세계가 내게, 네가 세계에 맞서 무엇을 하게 되든 마음 쓰지 말 것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으로 신과 연결된 가치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곧 세계의 파괴를 의미하기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새로운 존재의미를 찾고 새로운 가치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면 신의 자리에 누가 서게 되는가? 그것은 니체가 말하는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위버멘쉬이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모든 신은 죽었다, 우리는 이제 위버멘쉬가 등장하기를 바란다. 일직이 사람들은 먼 바다를 바라보며 신을 이야기했었지. 그러나 나 너희를 가르쳐 이제부터 위버멘쉬를 이야기하도록 했다"라고 전한다. 위버멘쉬의 정신은 '자연의 가치, 대지의 가치'에서 비롯되었다.


이 대지에 충실할 것이며 이 세계 저편에 대한 희망을 설파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그런 자들은 본인이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독을 타는 자들이다


우리 내면의 타고난 본성이 자연이다. 학습 이전에 생득적으로 타고난 성향이 있다. 본능은 지성이나 지능과 대립되는 것, 혹은 도덕과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본능에 충실해야 한다. 자연의 거울에 도덕의 역사를 비추어 보면 인간이 자연을 왜곡한 역사가 드러난다. 관능적 쾌락은 무절제와 무궤도한 방종으로 여겨져왔지만 특히 성적 쾌락의 경우에는 생에 대한 긍정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으로 보았다. 관능적 쾌락은 도덕과 무관한데, 도덕적인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모든 관능적 쾌락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적 쾌락은 정직하고 순수하며 힘이 넘친다고 말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배욕구는 배타적 욕구로 받아들여져 왔지만 니체에게 지배욕이란 '힘을 소유하려는 의지'로 자연이 이미 그 욕구를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그러니깐 자연을 따라야 하는데, 자연 자체가 힘을 소유하고 힘에 의해서 돌아가기 때문에 위버멘쉬는 힘에 의지를 가지고 신성한 지배욕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기심은 반사회적이며 반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졌지만 반대로 이타심같은 경우가 오히려 자연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자연이 가진 힘에의 의지를 거스르는 것이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이기심에 의해서 힘찬영혼으로 고상하고 아름답고 생기있는 신체로 솟아오르게 되며 자기향략은 경멸스러운 것을 몰아내고 성스러워진다고 말한다.


허무주의의 극복은 결국 자연적 가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로써 니체는 가치의 전도에 대한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했고 자연의 가치는 성적쾌락과 관능적 쾌락, 힘에의 의지를 통한 이기심의 신성함, 지배욕을 주장했다. 이렇게 이야기함으로써 '모든 것이 헛되다,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소심한 불신, 쉽게 영합하는 겸허'라는 허무주의를 넘어 새로운 가치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반자연적 가치로 둘러쌓인 세상에서 자연적 가치로 전도시킴으로써 니체는 원래의 자연적 가치를 회복하고 젖고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대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설파한다. 위버멘쉬는 자연에서 솟아나는 힘으로 똘똘뭉친 새로운 인간이었다.




제 6장 자연으로 돌아가라


자연에 대한 태도는 역사상 두줄기로 나누어져 왔다. 자연에 동화되는 것과 자연으로 부터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주장말이다. 근대에 와서는 사회계약론으로 유명한 홉스와 루소는 견해를 달리한다. 홉스는 통제 불가능한 무정부적 자연상태에서 벗어나서 인간이 서로 계약을 맺음으로써 안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자연적 가치에 대한 폄훼와 함께 인간이 자연적인 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서로를 죽고 죽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루소는 퇴폐적인 문명을 밀어내고 순수한 자연으로 돌아가 '허영'이 기뜰지 않은 순수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 불평등의 기원은 인간적 가치에서 나온다. 니체 역시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니체는 홉스와 루소를 모두 받아들였다. 자연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으며 미화의 존재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가 지배하는 곳이었으며 매정했다. 그렇다고 홉스식의 사회도 아니다.


물론 니체는 루소를 주목하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플라톤과 루소를 거론하기도 한다. 특히 '반시대적 고찰'에서는 인간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면서 '루소형 인간, 괴테형 인간, 쇼펜하우어형 인간'으로 구분한다. 여기에서 루소형 인간은 '무자비한 부에 억압당하고 짓눌린 인간, 교회의 사제들과 불량한 교육에 타락한 인간, 광대같은 풍슴에 의해 수치심을 느끼는 인간, 곤경에 빠져 신성한 자연을 비웃는 인간'으로 묘사한다. 루소형 인간은 인간의 고양된 정신이 저절로 될 것으로 예상하면서 인간 본성의 선함을 믿고 모든 책임을 문화로 돌리는 미신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루소는 사회의 부패와 타락을 문화의 혐오스러운 산물로 보았고 인간은 그에 하부적인 요소로 보았다. 결국 원인도 대안도 틀린 답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의 실패 이유도 루소에서 찾을 수 있었다.


니체는 루소는 자연을 미화함으로써, 홉스는 자연으로 벗어나야할 것으로
여김으로써 자연을 왜곡했다고 비판한다.


니체는 홉스도 비판한다. 홉스는 흄이나 로크와 함께 '철학자'라는 말의 의미와 가치를 끌어내렸다. 영국철학자들은 하나같이 철학이라는 이상을 손상시켰다. 특히 홉스는 자연을 벗어나야 하기 때문에 자연을 왜곡했다. 그러나 자연에 대해서 홉스식의 대안도 아니고, 루소식의 대안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니체는 그들의 신화에 빠지지 않고 자연을 정의하는 방식으로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칼리클레스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플래톤의 대화론에 나오는 그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상태인 피직스를 찬양하며  제도와 인위적인 노모스를 파기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우리는 니체가 말하는 자연이 그동안의 논의들과 어떤 부분이 맞고 어떤 부분이 다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1. 칼리클레스의 '힘이 지배하는 자연'


고대 그리스에서는 '보편성' 논쟁이 한창이었다. 인간이 스스로 보편성을 찾고 만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은 '노모스'로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 보편성을 이미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피지스'에 대한 논의가 바로 그것이다. 자연의 법이 바로 보편이라고 보는 이들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노모스를 이해관계에 따라 만들어내는 거짓으로 보았다. 칼리클레스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의견에 반발하며 노모스는 처음부터 반자연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고르기아스'에서 자연에서는 힘의 지배가 자연스러운 것이고 곧 이것이 법이라고 주장한다. 니체가 칼리클레스의 영향을 받았는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칼리클레스의 주장은 니체의 주장과 흡사하다.


2. 홉스의 무자비한 자연


홉스에게 자연은 거칠고 무바지했다. 종교전쟁과 내란으로 인해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이 얼마나 세상을 파탄으로 이끄는지를 뼈저리게 느낀 그는 불안과 혼란을 피해 안정된 삶을 갈구했다. 따라서 안정된 삶이라는 이상을 이루려면 사회질서와 평화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확실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홉스는 사회질서와 평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강력한 통치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통치권 확립을 위해서 귀족정이든 민주주의든 가장 효율적인 것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홉스시대에는 군주제가 가장 유력한 안정성을 주었기 때문에 홉스도 군주제를 받아들인다. 통치권이 없는 세상은 사회적 규제와 통제가 없는 자연상태이다. 비극적인 상황은 바로 이때 등장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통치권이 무너진다면, 어떻게 대비해야할까라는 생각으로 홉스는 자연상태로 돌아가지 않는 국가모델을 구상한다. 국가는 곧 인간이 만든 리바이어던이며 이것은 통치권을 영속시키며 어떤 군주, 귀족, 데모스들이 와도 유지되어야 했다. 자연상태는 절대 안된다.



3. 루소의 아름다운 자연


루소는 문명사회의 퇴폐와 혐오에서 생각을 시작한다. 영혼이 안식을 취하며 소망을 얻게 되는 것은 문명을 떠난 목가적 자연이었다. 특히나 궁전문화로 대표되는 대중문화는 허영과 위선으로 가득했다. 루소는 자연을 무한히 동경했다. 문명 이전의 인간은 사랑을 일깨우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성이 충만한 존재였다. 이러한 문명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이성이었고, 이성무용론은 반대로 무지에 대한 예찬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반대급부로서 자연은 당연히 아름답고, 여유롭고, 조용했다. 루소는 '고매한 미개인'이라는 글에서 이상적인 인간이 가진 무지를 예찬했고 자연 속의 인간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루소의 자연예찬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환상에 불과하다는 반박을 당하기도 한다.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일반의지의 보편성으로


루소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인간이 깨끗하고 순수한 상태로 유지될 수 있는 자연상태를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 자연상태의 관점에서 사회를 재구성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러한 고민으로 루소는 일반의지를 설파한다. 자연적 가치는 일반의지 속에서 구현되기 때문에 공통이익의 총체인 일반의지는 보편성을 담지하기 때문에 모두가 추구해야할 도덕적 표준이 된다. 이렇게 일반의지가 확립된다면 자연적 가치를 보장해주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일반의지의 구현은 곧 자연적 질서의 구현이자 보편성의 구현이기 때문에 일반의지의 확립이 된다면, 일반으로 만든 국가도 역시 보편적이며 자연의 질서를 따라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홉스의 귀족적이나 군주정보다는 오히려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인 것도 일반의지의 보편성 때문이다.



4. 니체의 있는 그대로의 자연


홉스는 자연을 최악의 것으로, 루소는 최선의 것으로 그렸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인간의 관점에서 투영한 것이다. 니체는 형이상학적으로 왜곡된 자연에 대한 이해를 거부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자연은 싸움터이고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자신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투쟁을 하고 있다. 자연은 관용을 모른다. 무자비하고 가혹하기까지 하다. 여기까지는 홉스가 옳았다. 그러나 자연은 도한 풍요롭고 활력이 넘친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맞지만 루소방식의 아름다운 자연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 자연이다. 도덕이전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5. 자연으로 돌아가라!


자연으로 돌아가자라는 기획에서 루소와 다른 니체의 기획은 수평이동, 장소 이동이 아니라 수직이동이다. 상승과 하강이 있는 진보의 관점에서의 상승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의 본성에 따라서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올라가려는 욕구는 '나폴레옹'과 같은 역사 속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하면서 위로 올라갈려고 했떤 사람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위로 올라갈 것인가? 그것은 힘을 자연의 지배원리로 추구하면서 올라가는 것이다. 고매한 미개인이 아니라 금발의 야수가 되는 것이다. 금발의 야수는 '우상의 황혼'에서 '인류를 개선하는 사람들'로 등장한다. 금발의 야수는 셀 수 없이 많았고, 세상을 한 때 지배했으나 문명에 동화되면서 그 야수성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어느시대이든 사람들은 개선을 꿈꾼다


어느 시대든지 사람들이 꿈꾼 것은 개선된 미래였으며 미래를 개선하려면 먼저 사람이 개선되어야 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타난산 성품인 자연을 크게 키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수성을 가진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교는 걸어갔다. 인간을 도덕적으로 순화시켜 온 것이다. 인간의 자연인 야성을 잠재운 것이다. 교회는 금발의 야수들을 잠재웠고 게르만족은 니체의 의한면 그렇게 개선되었다. 건강한 금발의 야수들이 병들게 되었고 개선이 아닌 개악의 결과로 야수들은 사라지고 자연의 본성도 사라지게 되었다.



금발의 야수는 게르만민족을 지칭하지는 않았다. 금발의 야수는 고매한 종족들로서 가는 곳마다 야만인이라는 개념을 남겨두는 자들이기도 했다. 금발의 야수는 칼리클레스가 노모스에 의해 강자 길들이기를 문제 삼으면서 강자로 제시한 사자를 말한다. 힘의 세계인 자연으로 올라감으로써 니체가 요구하는 자연으로의 북귀가 완성된다. 인간이 자연적인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적으로 되는 것이었다. 자연의 본성인 야수성에 눈을 뜨고 변화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금발의 야수인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서 허무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힘에의 의지가 발현되는 인간에게서는 독수리의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사자의 포효가 들린다.


진격의 거인들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금발의 야수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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