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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철학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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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Sep 16. 2022

르상티망이라는 원한

니체읽기

도덕과 윤리에는 크게 2가지의 방식이 있다. 


의무론적 도덕관과 목적론적 도덕관이다. 의무론적 도덕관은 칸트가 말한 '정언명령'으로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해야만 하는 도덕관념'이다. 목적론적 도덕관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덕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에 있어서 니체의 철학에서 도덕이란 자연주의적 도덕관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원리와 윤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 니체의 철학에서 자연은 그 자체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자연의 본성은 힘에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오늘은 선과 악이라는 개념의 도덕을 해체하고 부수는 니체의 철학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과연 니체가 원했던 도덕이란 무엇인가? 함께 토론해보자. 



제 3장 선과 악을 넘어서


신은 죽었다. 물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도덕법칙은 인간의 이성에서 나왔고, 이성은 보편적 가치를 전제하고서 만들어졌다. 플라톤으로 올라가면 그의 형이상학적 세계, 이데아의 세계가 도덕법칙과 보편성을 입증해주는 원인이었다. 니체는 이러한 이데아를 사용하는 형이상학적 방식을 '신'으로 규정하고 신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연은 도덕을 모른다. 자연은 오로지 힘만 있다. 인간만이 도덕을 가지고 있다. 니체에 따르면 절대다수의 약자들이 만들어낸 것이 도덕이라는 것이다. 약자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생각해 낸 안전장치가 바로 도덕이다. 니체는 도덕적 우월감으로 강자들을 무너뜨리려는 전략이 약자들에 의해서 시행된다고 생각했다. 


도덕 감정으로 다양한 것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빈번하게 논의된 것이 바로 '선과 악'의 개념이다. 놀부에게 선과악과 같은 구분이 필요없었다. 무능한 흥부에게는 도덕이 필요했을 것이다. 천상의 권위를 끌어와서 만들어낸 도덕은 인간에 의해서 규격화되어가고 용납되었다. 흡사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었다. 손님이 누구냐와 상관없이 항상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침대 말이다. 니체가 보기에 순결과 불순이라는 기준을 넘어서 강자들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에서 사제근성의 약자들이 선과 악이라는 도덕을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강자는 도덕의 노예가 아니다. 강자는 태생이 정직하고 순진무구하며 관대하기 때문에 잔꾀나 음모같은 술수를 쓰지 않는다. 약자는 속임수에 능하고 간교한데다가 영약하기까지 하다. 그런 약자들은 강자들에게 파고들어서 등뒤에서 비수를 꽂는다. 니체는 약자의 영혼을 즐겨 곁눈질하며, 약자의 정신은 숨을 곳과 샛길 그리고 뒷문을 좋아한다. 약자는 항상 숫자가 넘치기 때문에 강자는 방심하다가 수에 밀려서 무너진다. 


르상티망ressentiment


르상티망은 노예 반란의 원동력이 된다고 말했다. 르상티망은 소모적인 감정이면서 격한 감정이다. 사람을 물어 뜯으면서 적에 대한 복수를 성공해야만 르상티망이 진전된다. 니체가 보기에 약자들은 착함, 겸허, 인내, 용서를 통해서 르상티망을 완성한다. 약자들은 이들 무기로 무장하고 자신들이야 말로 착하고 순종적이며 인내심 많고 용서도 잘한다고 내세우는 한편, 강자들은 악의적이고 건방지고 순종을 모르며 참을성이 없는데다 용서까지 모르는 무자비한 인간들로 몰아 매도한다고 본다. 이런식으로 거짓 덕목을 내세워서라도 구차한 삶을 지켜야 하는 인간들은 가련한 존재들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니체는 노예도덕을 르상티망의 산물을 규정했다. 




민네이션, 생각


어쩌면 이 사회에 대한 분노는 이 사회의 부조리의 지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부조리는 원한을 낳고 원한이 쌓이면 분노가 되고, 분노가 쌓이면 폭동이 되고, 폭동이 쌓이면 혁명이 된다. 그러나 혁명이 아닌 쿠테타가 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포착하는 언론은 쉽게 대중을 폭도로 만들 수 있고, 민주시민을 쿠테타의 전범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가련함과 인간사의 부도덕은 반대급부로써 도덕감정을 만들어내는데 사람들은 이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니체에 의하면 이러한 도덕감정은 그 사회가 어떤 르상티망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원한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대한민국은 일제시대의 원한과 한국전쟁의 원한, 독재에 대한 원한, 518민주화운동의 원한, IMF의 원한, 세월호의 원한 등 너무 많은 부조리들이 만든 원한들이 있다. 아직도 분단체제는 언론과 정치술수에 의해서 이용당하고 있고 세월호 문제는 아직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질질 끌고 있다. 원한의 역사는 결국 인간에 대한 혐오나 인간에 대한 포기를 가져오게 되는데 이러한 사회는 자연스럽게 르상티망에 의한 '묻지마 살인'으로도 이어진다. 묻지마살인은 그 부조리의 원인, 원한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어서 익명적이지만 이미 이 사회가 그러한 문제를 잉태하고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죽어나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을 포기해야만 이 원한 관계가 끝날까? 아니 누구라도 이 원한 관계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는 헤지고 엎어서 부조리를 계속 양산하면서도 양심은 끝없이 추락하고, 어떤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감정의 회복을 위해서 원한을 풀기 위한 화풀이라도 한다. 그런데 그런 문화가 기본적인 사회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과연 어떤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언제쯤 멈출 수 있을까? 이제는 책임이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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