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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01. 2023

고작 그 정도의 어른

어른이라면 이래야할까?

1. 들어가기

언제쯤 어른이 될까?


초등학교 1학년때 초등학교 6학년 형들은 키도 크고 얼굴도 크고 다리도 길었다. 말도 어른같이 하고, 달리기도 잘하고 축구도 잘했다. 그래서 언제나는  '언제쯤 어른이 될까? 저 형들만큼만 자라도 나는 어른이라고 생각할텐데'라며 연신 나의 작음 몸을 탓하고 지냈다. 그리고 나서 정작 6학년이 되었을 때는 다시 중학생이 된 형들을 바라보면서 '언제 어른이 되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냈다. 내게 어른이란 무척이나 고매하고 훌륭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존재 같았다. 그래서 어른들을 향한 끝없는 존경의 눈빛이 있었고, 사람들은 이런 나의 태도를 보면서 자신이 어른이라는 것을 흡족해 하는 듯했다.


그런데 막상 어른이라는 나이에 도달해보니 별반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주변에 나이가 찬 친구들을 보아도 그렇게 어른 같아 보이지 않았다. 마치 파랑새를 꿈꾸면서 쫓아갈 때는 언제나 무지개가 보이지만, 파랑새를 묻어 놓은 무지개다리에 서면 아무것도 안보이는 것과 같았다. 나에게 파랑새는 '어른'이었는데 어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어른을 만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만 매우 훌륭한 삶을 살아내서 나도 어른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피어 올랐다. 그렇게 중학교 3년학년이 되고 고득학교 2학년이 되고, 대학교 4학년이 되었다.


고작 이정도의 어른이라니


그렇게 기대하던 어른을 만났는데, 어른은 없고 어른아이만 가득했던 사람들. 아직도 자신의 욕구가 다른 사람의 욕구보다 중요하고, 자신을 벗어나서 생각할 줄도 모르고, 역사의 큰 줄기 안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또 이 시대와 민족을 생각하는 그런 어른은 주변에 별로 없었다. 교수님들이나 유명한 사람들이야 특별한 경우니깐 제쳐두고서라도. (사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교수님들도 인간이고 지식을 빼고나면 진정한 어른이었을까?라는 의문점들이 듬성듬성 솟아난다) 그래서 고작 이 정도의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서 여러가지 고민을 했다. 무엇이 한 인간을 어른으로 만들게 하고, 무엇이 한 소년을 한 사람의 지혜로운 어른으로 성장하게 만들까? 초등학교 때부터니깐 한 30년은 했던 것 같다. 이런 고민.



2. 객관과 주관사이를 오고가는


자기를 이해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지도가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기획한 것으로 지도를 만들기도 하지만 걸어가면서 다가오는 다양한 사건들에 반응하면서 지도를 만들기도 한다. 물론그 지도를 수정도 하고 없는 지역은 만들기도 한다. 마치 게놈지도가 완성되어서 인간의 미래가 예상된 것처럼, 자기이해의 지도가 완성되면 세상에 대해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객관과 주관은 한끝차이이긴 하다. 내가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서 결정하는 것과 오롯이 내가 가진 것으로만 선택하는 것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칸트가 '목적의 왕국'을 설명하면서 우리의 선택은 누군가가 지금 이 순간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신중하게 해야 한다라는 것과 같다. 객관은 스스로 객관을 추구하지 않은 이상 넓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니깐 '주관'이 '객관'을 항상 잠식해 간다.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우리는 우리의 주관적인 경험을 객관적인 세계의 해석보다 앞에 놓는다. 그리고 흔히 그런 것을 어른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니 고작 그 정도의 어른이 되는 것이다.


나를 그 상황에서 꺼내서 객관적인 관점으로 꺼낼 수 있는 인간,
우리는 그 인간을 어른이라고 부른다.


우리 사회에서 어른이 없어지는 거은 객관적인 관점으로 꺼내는 능력이 부족한게 아니라, 주관적인 관점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왔기 때문이다. 윗사람이라고 하는 계층이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면 예스맨이 되어서 모든지 했던 시절, 책임도 전가할 수 있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아도 되고. 그냥 시키는대로 하는 동안 시간은 어른을 요청했지만,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어른은 만날 수 없는 시간이 된다. 이러한 사람들이 어른이라는 기간을 건너뛰어서 바로 노인이 되면 지금과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한번도 어른이었던 적이 없는 사람은 한번도 '노'라고 말한 적이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한번도 어른이었던 적이 없는 사람은 객관적인 관점을 가져보지 못했기에 다른 이의 관점이 자기관점인 양 살아가는 이식된 주관을 가지고 살아간다.


신카이마코토는 정말 어른이다


어른이란 정말 이런걸까? 그럼 어른이라면 어떻게 해야할까? 앞에서 설명한 때로 사실은 주관과 객관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람이다. 자신을 그 상황에서 꺼내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으면서 자신이 다시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서 주관으로 밀고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니깐 주관을 상황속으로 가지고 가서 밀어붙이는 힘은 '신념'이 되고 상황에서 나와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이해'가 된다. 주관과 객관사이, 신념과 이해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정신의 크기 큰 사람. 그런 사람이 어른이 아닐까?




3. 현상과 해석 사이를 오고가는


음악을 들으면 그 순간에는 반응만 하게 되지만, 음악이 끝난 후부터 시작된다. 음악의 후폭풍이. 모든 것은 사실 이렇다. 그 누구도 느끼는 즉시 해석하는 사람은 없다. 일단은 현상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것들을 해석한다. 그러니깐, 인간은 누구나 해석을 하면서 산다. 세상을 해석하고, 경제를 해석하고, 정치를 해석하고, 내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제스처를 해석한다. 문제는 세상을 제대로 보는 법을 못 배우고, 제대로 해석하는 법을 못 배우면 같은 현상을 살았지만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해석의 수준에서도 떨어지지만 이상하게 현상을 오해해서 해석하는 사람들을 '편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웃낀건 대부분의 '그정도의 어른'들은 자신이 가진 '편향'을 자신의 신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른은 어떻게 해석할까?

어쩌면 현상과 해석 사이를 줄이면서 이것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닐까? 무엇인가를 깊은 해석한다는 것은 자신이 그 속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시간과 공간을 더 큰 차원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 속에 있으면서, 그러니깐 그 현상 속에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해석하는 부지런함을 가진 사람들을 우리는 '상황판단'이 빠르다고 말한다. 현상과 해석을 오가는 어른이라면 판단력을 가지고 잘못된 해석에 흔들리지 않고 무한한 현상을 놓치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한번에 되지가 않는다. 살아오면서 자신이 성장해가는 현상을 느끼고 그것에 매번 해석을 하는 수고로움이 쌓여야 한다. 보통은 글을 쓰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해석을 합리화 시키고 깊이있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스스로 해석만 하는 사람은 해석이 무디어지면서 항상 하던대로 해석하게 된다. 이러한 해석의 틀이 고정관념인데, 이러한 고정관념은 아무리 다채로운 현상이라도 하나의 관점으로 해석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불안'이라는 책에서 알랭드보통은 '속물근성'을 가진 사람을 '하나의 관점으로만 해석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사람을 볼 때 '돈'으로만 본다거나 정치를 볼 때 '권력'으로만 본다거나, 이성을 바라볼 때 '외모'로만 본다는 것이 그 예이다. 알랜드 보통은 속물근성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불안'에 빠진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은 스스로 만든 기준으로 계속해서 누군가가 자신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을 못참고 뺏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 바로 이러한 불안을 가진 '속물근성' 때문이며, 이것의 근원은 해석을 다양하게 할 수 없는 능력이다. 그 능력이 사라진 것은 해석의 부지런함을 연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현상과 해석을 자유롭게 오고가는 어른이 되지만, 어떤 이는 하나의 해석으로 다양한 현상에 선을 그어 버린다. 젊음을 질투하는 사람이나,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이나, 어디가면 누가 자신의 자리를 챙겨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이정도 쯤이면 이 정도 대접을 받아야지'라고 생각하는 어른인천 하는 이들은 모두 '고작 그 정도의 어른'이다. 오히려 어른은 하나의 현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젊음을 찬미하고 존중하며, 다른이들을 칭찬하기에 바쁘고, 어디에 가면 다른 이들의 자리를 챙겨주기에 바쁜 살마이다. 내가 대접받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누군가를 대접하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이 어른이다. 이 세상에 '고작 그 정도의 얼른'들이 넘쳐나는 까닭에 세상을 잘 나아지지 않는다. 한가지의 해석법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모이면 권위주의가 되고 권위주의가 쌓이면 독재가 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으니 세상이 바뀔리가 있나?


0. 고작 그정도 아니면


가끔가다 진짜 어른을 만난다. 아니 진짜 인간을 만난다. 발달의 어느정도에서 서성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하나의 목소리에 담아거 살아내는 사람. 가끔 눈에도 빛이나고 목소리에도 빛이나는 사람. 우리사회는 너무 하향 평균화되어 있다. 마치 모든 인간은 그렇게 유치하고 허무하다는 듯이. 그런게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나와 너‘의 관계를 이어가는 어른을 만나면 잠시 그 자리에 멈추게 된다.


내게는 기형도 시인이 그랬고, 베르톨트브뢰히트가 그랬고, 스웨덴의 비그포르스가 그랬도, 노무현이 그랬다. 인생에서는 누구나 롤모델이 필요하다. 나는 조금 더 깊은 발자국을 남기고, 무게감 있게 살아가고 싶다. 될수 있는한 인간의 아름다움을 향유하고 함께 가슴뛰는 내일을 만들어가는 어른이 되고 싶다. 오늘의 이야기는 사실 나에 대한 자각이다. 계속해서 이런 시간을 가져야겠다. 낭만이 흐르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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