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May 05. 2023

요즘에 나는 어떻게 살까

휴일에 잠시 나를 뒤돌아보기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국립보건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존경하던 박사님들은 매일 점심마다 족구를 하고 계셨다. 그 만큼의 학력과 연구성과이면 어디서도 더 있는 것처럼 살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왜 그랬을까? 이런 생각을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내가 이제 그 박사님들의 나이가 되어서 나 역시 박사논문을 쓰고 있다. 그 박사님들 중에 한 분은 '하루에 5분만 자신이 걸어온 길을 생각해 보면 하루가 더 깊어질 것야'라고 하셨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누구나 그렇지만 자라면서 기억 속에 박혀 있는 생각들이 어느새 풍성한 나무가 되어 있는 것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 때 그 이야기, 하루 5분의 인생에 대한 해석의 필요성은 지금도 여전히 나에게 뿌리로부터 가지까지 '내가 잘 살고 있나?'라는 질문들을 던져준다.


이제야 알았지만 풍성한 삶의 비밀은 '자기인식'을
매일 조금씩이라도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돌아온 길을 다시 복기해보고,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이 미숙했으며, 무엇이 좋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 말이다. 최근에야 그래도 문제없이 일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10년전에는 '민블리'로 불렸다. 말그대로 블리블리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민'이 아니라 블랙리스트에 오른 '민'이었다. 매번 기안을 올리는 것마다 반려를 당해서 매번 고생했던 때가 떠오른다. 나는 남들보다 민감하기도 하지만, 남들보다 적응도 느리다. 그 이유는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좋은 선생님들이 없는 이상 나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러니깐 실수를 복기하지 않으면 나는 여전히 사회 속에서 무시당하는 게 일상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잘 걸어가고 있는지 길을 제시해주는 책들을 만난다


무언가를 비춰주는 등불이 필요한 것처럼, 어떤때는 '사랑'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를 비춰주고, 어떤때는 '내가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이 나를 밝혀주었다. 때로는 '나는 개방적인가? 권위적이지는 않은가?'라는 질문이 나를 멈추게도 했다. 요즘들어 생각해보니 이런 질문들을 자유자재로 던지면서 중심을 잃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어른'인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본다. 인생에서 진정한 어른을 만나기는 쉽지 않지만, 그러한 어른들을 만나면 언제라도 내 마음을 활짝 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언젠가 나도 그런 어른이 되어서 사람들이 한숨을 한가득 품고 와도 언제라도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같이 웃고 울어줄 수 있는 어른이 되겠지?


요즘에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까? 생각해보니깐 나는 자주 슬픈 감정을 느끼고 살고 있는 것 같다. 시대의 아픔을 느끼는 새벽녁쯤에는 잠을 잘 수도 없고 잠에서 깰수도 없다. 몽롱한 이 기분은 꼭 안개속에서 걷고 있는데 아무것도 안 보이는 느낌이다. 그래서 요즘들어서 기형도 시인의 시를 그렇게 자주 읖조리나 보다. 1980년대 독재가 한창이던 시기의 안개와 요즘들어 잦아진 안개의 정체는 다르긴 하다. 나도 우울하고 복잡한 청소년기를 지나서 암울한 청년기를 지나왔지만, 내가 지나왔던 길보다 요즘 청년들이 지나다니는 길은 안개가 더 뿌옇고 새까만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청년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끼는 아침서리를 볼 때면 좌절감을 느낀다.


삶의 안락함을 먼저 찾은 이들은 '이건 어쩔 수 없어'라며 자기 자신도 간수하기 힘든 세상에 누구를 돌보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아무런 삶의 질문이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에서 태어난 이들의 삶은 온통 즐거움과 재미 그리고 가끔식의 지루함 뿐인데, 50만명이 넘는 청년들의 삶은 언제나 지옥같은 외로움과 고통의 연속이다. 오래전에 쉰들러리스트를 본 적이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쉰들러는 자신이 가진 반지를 보면서, 금이빨을 보이면서 이것들을 팔았다면 몇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가를 살리려고 마음을 먹으면 우리는 진정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그 마음을 먹기까지 힘들지만 말이다. 나도 이제는 있지도 않은 반지라도 팔아서, 내 시간이라도 팔아서, 내 몸이라도 바쳐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 어떻게 해야할지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모든 사람과 모든 기회를 동원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73rY6ol1hcY


나는 청년때는 세상의 수 많은 비참함에 대해서 '아직 새벽이 오지 않았고 내 인생에서 일할 때는 아니기에,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한다'라고 말했다. 나름대로의 변명이면서 전략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젠느 해가 정오를 지나서 가장 뜨거운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다. 물론 내 인생에서 말이다. 이제는 무엇인가를 해야한다. 무엇이라도 해야한다. 청년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야한다. 이런 생각을 하니깐, 지금까지 공부했던 것들일 한가지 숫자로 정렬된다. 해야할 것들이 또렷해지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나는 이제부터 더 달려야겠다. 요즘 이런 생각으로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한다. '청년빈곤, 청년우울증, 청년자살'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함께할 사람이 있을까?


고민없이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할까? 고민이 있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인생이 흥청망청으로 시간을, 돈을, 관계를 허비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있는데 이것들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살아가면서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방치하거나 간과하는 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기생충을 유희로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난다


누군가 신이 있다고 말할려면 이러한 현실에 신은 어떻게 대답하고 있냐고 반문할 것이다. 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질문을 가지고 중세로 넘어갔다. 둔스 스코투스라는 학자를 만났다. 이 사람은 유명론자라고 알려져 있다. 중세시대에 유명론자라고 하면 '보편자'인 신은 어떤 인격체가 아니라 스타워즈의 '포스'와 같이 신비한 비인격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둔스 스코투스는 '보편자는 보이지 않지만, 개별자를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러니깐 보편자를 우리는 볼 수 없지만, 서로를 보면서 그 안에 보편자를 볼 수 있다는 논리이다. 신앙이라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비참에 대해서 보편자인 하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어쩌면 개별자인 우리들을 통해서가 아닌가? 나는 그런 세대에 태어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외에도 중세의 뿌리를 찾아서 여행하는 중이다.

왜냐하면 현대의 문제들의 원인이 거기 있는 것 같으니깐 말이다. 윌리엄 오캄이라던지, 쿠자누스라던지, 혹은 아퀴나스라던지 더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까지간다. 물론 언제나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이런것을 공부하라고 말이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쫓다가 보면 나는 거기까지 가고 있는 나를 만난다. 호흡을 가다듬고 역사의 가느다란 등줄기를 밟고서 원인의 원인의 원인을 찾아 나선다. 아무도 볼 수 없었던 순간을 만나기까지. 나는 그래서 구도자인 것 같다.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찾다가 보면, 이런 길을 가고 있는 친구들을 만날 때가 있다. 얼마나 즐겁고 감사하고 마음에 위안이 되는지.



이런 생각도 한다. 결혼한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고통이 있고, 즐거움이 있듯이.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의 기쁨이 있고 고통이 있다. 인간의 모든 것이 '쌍'으로 존재한다면, 인간존재도 쌍으로 존재한다면. 그 쌍을 만나지 못하거나 함께하지 못하는 이들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정상인 사람들 속에서 비정상으로 사는 것과 비정상인 사람들 속에서 정상으로 사는 것이 어떻게 다를까? 이런 고민들을 던져본다. 주변에 자의든 타의든 결혼을 하지 못하는 이들을 만난다. 마음에 맞는 사람을 못만난 사람부터, 경제력이 안되서 결혼을 못하는 사람, 결혼 후에 후회하고 다시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 결혼에 대한 생각을 아예 접은 사람,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사람. 나는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자신을 벗어나는 의식을 가진 이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언제나 자기자신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나이가 들면서 노년을 외롭게 보내는 사람들을 만난다. 나도 저렇게될까? 누군가가 걸어간 길을 들춰보면서 내가 걸어온 길을 들춰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러다가 역사상 위대하 인물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다. 위대한 철하자는 모두 독신이 아니었던가? 위대한 성인들은 아예 '쌍'으로 존재하는 세상에서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사실 나의 문제는 너무 다른 편에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한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집중하기 시작하더니 만나는 사람에게 '몰입'하게 된 결과 집착하거나 혹은 이제 다 파악했으니 그러려니 하는 것.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 볼까라는 생각을 한다. 무한의 신비를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하나? 아니면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나?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지금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한다. 책을 보고 공부를 하고 세상을 어떻게 바꿀까를 망상이 아닌 현실로 그러내는 일. 언젠간 만나겠지, 아니면 말고. 믿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말하기는 한다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실꺼야'라면서.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나는 여전히 한계에 한계를 맞이하고 있다. 그 어딘가에 있는 희망을 오늘로 가져오는 일은 언제나 한계와 마주하는 일이다. 친한 후배들이 자주 말한다. '형이 그렇게 고민해서 그래서 도대체 한게 무엇이 있냐고?'말이다. 나는 그 때마다 '그릇이 너무 커서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라고 말했다. 이제는 변명을 그만하고 그 그릇으로 무엇을 담아야 하지 않을까? 사회에 참여하고, 최대한 많은 이들을 만나고 또 격려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떤 방식으로라도.


초심으로 돌아가자! 가장 기본으로!


매거진의 이전글 고작 그 정도의 어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