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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l 24. 2022

마커스보그와 구원 그리고 성서

그리스도교를 신앙을 말한다_3장 구원, 4장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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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으며 드리는 예배에서 처음 마커스 보그를 읽으면서 '역사적 예수 논쟁'에 대해서 처음 듣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존재한 예수님이 어떤 존재였는가에서 시작해서, 예수님의 말씀이나 성경의 말씀이 어떤 상징을 가지고 있는가를 고민하는 논쟁이다. 마커스 보그가 던진 질문들은 고민해볼만하다. 예를 들면, '성경문자주의는 정말 맞는가? 성경은 권위에 있어서 계시의 책인가 아니면 인간의 산물인가?' 이런 질문들 말이다. 쉽지 않은 주제이고 최근 기독교가 고전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 질문이다. 


과학적인 세계관이 지배적이 되면서 '보는 것'이나 '증명가능한 것'이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그래서 종교는 미신이 되고, 미신이 된 종교에서 말하는 이야기들은 '주술적인'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도 일부에게만 공유되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을 초월해서' 고민해야 답을 찾을 수 있는 것들에 대답할 수 없게 되었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대답도 죽은 이후로 미루어졌다. 정말 극소소의 사람들만이 빛나지 않는 밤에도 뜨는 별들을 찾아다녔다. 이게 원래 평균이었는데 지금은 다른 방식의 삶에서 안정을 느끼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독특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정말 실존할까?라는 고민은 '하나님 존재증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의 세계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또 따져봐야 한다. 활동하시는데 어떻게 활동하시는가? 이런 고민들을 오늘 같이 해보자. 다소 위험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성격의 해석을 평생 남들에게 맡겨놓은 사람이라면 지금은 자신이 스스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또 적용해야하는 시기가 왔다는 것에서 말이다. 신앙이라는 것이 최대의 위기를 만난 지금 이 시점에서 마커스 보그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시작해보자. 


https://brunch.co.kr/@minnation/3063



3장_구원


주요내용

구원의 통상적 의미가 죄와 용서, 천국이라는 해석틀에서 형성된 것처럼 구원의 성서적 의미도 일정한 해석틀을 거쳐 형성된다. 성서적 해석틀 안에서 구원은 죄와 용서, 천국과 지옥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구원은 죽음 이편의 삶에서 맞이하는 변환을 뜻한다. 

즉 구원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환, 그리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삶에서 일어나는 변환을 모두 아우른다.

마커스 보그는 성경을 역사은유적으로 해석해야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구원과 관련된 것들도 결국 은유적으로 들리게 된다. 보그는 이렇게 말한다. 

"청소년기든 그 이후든 이러한 이해방식은 많은 사람에게 설득력을 잃었다. 사람들은 의문을 던졌다. 오직 그리스도교인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피 흘린 예수의 희생으로 우리가 죄에서 구원 받았다고?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이었다고?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게 하려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냈다고? 이것을 믿는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진짜? 정말 다 그런거라고?"

보그는 기독교가 '종교심'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바로 구원과 내세론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위협감이 구원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내세구원관이나 형별론적 구원론이 문제라서 그럼 보그가 자신이 이론을 펼치는 것인가? 아니면 성경자체가 이러한 구원관이 없어서 그러는 것인가? 다시 말하면 context의 문제인가 아니면 text의 문제인가?이다. 

심지어 미들튼도 '죽은 후에 들어가는 천국'은 구약에서도 나타나있지 않다고 말한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강도와 예수님이 말한 천국비유는 그 자체로 비유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구원은 훨씬 더 풍성한 의미를 지닌 구원이다. 구원의 통상적 의미가 죄와 용서, 천국이라는 해석틀을 거쳐 형성된다. 성서적 석틀 안에서 구원은 죄와 용서, 천국과 지옥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구원은 죽음 이편의 삶에서 맞이하는 변환을 뜻한다. 

구원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과 그리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삶에서 일어나는 변환을 모두 아우른다. 


마커스 보그

내 구원에 대한 대답은 이것이다. 우리가 맺을 수 있는 열매는 우리 자신과 세상 모두가 변환하는 이중적인 변환으로의 구원이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이를 갈망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삶이 바뀌기를, 우리를 속박하는 모든 것에서 해방되기를, 눈을 뜨기를, 건강해지기를, 살아가는 동안 받는 상처를 치유받기를 갈구한다. 그리고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갈망한다. 그러한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의 자손들, 그리고 미래의 세상에 살게 될 사람들을 위해 세상이 더 나아지를 갈망한다
_3장 구원 


생각해보기

당신이 생각하는 구원에서 천국 가는 것, 혹은 내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 

성서 속 인류의 조상 이야기, 출애굽 이야기, 예언자들의 가르침, 복음서 속 예수의 설교, 바울로의 편지에 나오는 구원이라는 말에 내세 개념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저자의 견해가 사실이라면, 당신은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4장_성서


주요내용

축자영감설을 성서의 기원으로 보기도 하지만, 성서는 선조들, 그리스인 공동체가 가진 신앙에 대한 태도의 책이다. 성서의 권위는 '관한' 것이기에 당연히 다시 고민해보아야 한다. 

성서가 그 기원 때문에 성스러운 경전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의 선조들이 그 문서들을 신성하다고, 권위있다고 선포했기 때문에 성스러운 경전이라는 점이다. 성서가 특별히 하나님에게 직접 영감을 받은 기록이어서가 아니다. 

성서는 법 문서 이상의 것이며 법을 해석하듯 성서를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럼에도 이 비유는 성서가 갖는 권위를 이해하는 데 일정 부분 도움을 준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의 수단이지만 예수님보다 중요하지 않다. 

예수를 통해 드러나고, 밝혀지고, 알려진, 육체를 입은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교인에게 결정적인 결정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는 성서의 기준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관한 책이며 성서는 그리스도를 담고 있는 구유이다. 

민네이션 : 나는 축자영감설을 믿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영감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 탄생한 인간의 산물'이기는 해도 충분히 그것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다고 믿는다. 성경을 쓴 사람들이 감동으로 만들었다면, 성경을 읽는 사람들도 감동으로읽어야 한다. 


공통나눔

마커스 보그는 메시아로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메시아를 아직도 기다리는 건가? 아니면 구약에서의 메시아는 그 자체로 은유인가?

성경이 스스로 순환논증을 가질 수 밖에 없는가? 아니면 성경과 함께 역사적 맥락과도 연결이 되어야 하는가? 

성경의 권위는 어디서 왔는가? 공동체가 인정한 권위인가? 아니면 교회가 인정한 권위인가? 아니면 성령님께서 알려주신 것인가?


생각해보기

성서에 대한 역사적-신학적 연구에 의하면, 성서는 하나님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인에게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고백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한국 기독교에서 '성서'를 대하는 태도 때문에 '해석의 갈등'이 생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오히려 예수님을 덜 다루는 보수교단은 여전히 구약적 관점에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이 기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많은 헤프닝이 있는데 '정의전쟁론'이 그 중에 하나이다. 정의전쟁론도 오늘 본문으로 해석하면 부당한 것이 아닌가?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3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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