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커스보그_그리스도교를 말하다 9장~13장
부활사건에서 '빈무덤'은 정말 중요한가?
마커스 보그의 '비유적-상징적'관점에서는 부활사건도 빈무덤도 비유일 수 있다. 나는 이 부분도 받아들인다. 빈부덤인지 아닌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살아있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성경의 내용들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단순히 칸트의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수이성 자체가 보지 못하는 다양한 역사적 사건 안에 동시대적인 다른 소재와 사건들이 있다. 더군다나 인간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플랫폼인데, 그 성경을 기술한 사람들도 역시 플랫폼이였기 때문에 놓치는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또한 인상적인 것들을 기술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쓴 성경에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신 부분에서 읽는 사람이 성령의 감동으로 읽어야 한다.
1. 역사적 읽기 : 성경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성경은 비유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고 역사적 사건에 기반하고 있다.
2. 문화적 읽기 : 문학적 읽기는 성경을 이야기로 보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메타포로 사건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비유적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톰라이트가 보기에는 이것은 개인적 의미정도는 부여할 수 있지만, 공적인 차원에서 성경을 이야기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3. 신학적 읽기 : 하나님의 관점에서,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성경을 보아야 한다. 성경은 이야기 자체로 보여지는 그대로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셔야만 보는 것과 신학적인 의미와 상징이 또 역사적이면서도 문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믿음belief, 그리고 신앙faith은 그리스도교에서 널리 쓰이는 말이다. 대다수 그리스도교인이 고백하는 신경은 나는 믿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특히 개신교는 '신앙'을 중시한다. 종교개혁은 믿음에 관해서 행함과는 다르게 구원과 믿음을 서로 연결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에 관한 일련의 진술을 진실이라고 믿는게 아니라, 예수를 사랑한다는 뜻이다.이는 고대 그리스도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경의 라틴어 어원인 credo는 '내 마음을 준다'는 뜻이다.
당신은 누구에게 당신의 마음을 내어주는가라는 말은 곧 누구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가라는 뜻이다.
'나는 믿어요?라는 말은 '나를 사랑하나요?'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당신은 누구에게 당신을 맡기는가? 당신은 누구를 사랑하는가?
보그는 '믿음을 사랑으로 바꾼다'사랑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이다.
마음을 준다는 것이 믿음인데, 믿음과 사랑을 하나로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다른 관점이 아닐까?
보그는 자비가 오늘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염두에 둔다면 하나님의 성품을 이야기하는, 우리가 어떠한 인간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여러 성서 본문에는 '긍휼'이라는 말이 훨씬 적절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보그의 자비개념은 사실 '속죄론'을 대비해서 쓴 것이다. 인간의 원죄론, 십자가에서 그것을 속죄해서 용서받음으로서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어려움과 힘듦을 긍휼이라는 단어로 바꾼다. 이렇게 되면 속죄론은 하나의 교리로 전락하고 전락한 속죄론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월터스토프의 '사랑과 정의'에서는 고전적 아가페 주의를 비판하면서 어떤 용서나 자비가 가능하려면 먼저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고 정의의 기준에서 용서를 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에 따라서 사랑이 완성된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를 보그가 말하는 자비개념과 연관해보면 자비가 나오는 그 근원은 하나님의 정의이기 때문에 자비나 긍휼도 결국 반쪽짜리 자비가 된다.
의로움rightouseness라는 말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무수히 등장하는데 의로움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며 이 세상이 의로워지길 바라신다. 한편 의로움은 인간의 덕을 가리킬 때 쓰이기도 한다. 의로운 사람은 번성할 것이고 악인은 멸망할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의로움을 뜻하는 영어가 rightouseness가 대개 부정적인 함의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의로움이 개인이나 집단의 옳은 일을 행한다와 연결된다.
보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서에서 말하는 정의는 징벌적 저으이가 아니라 '분배정의' 즉,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다. 분배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갈망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으며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학에 기초를 둔다. 따라서 보그는 의로움을 정의justice로 쓰는 것이 더 옳다고 말한다.
보그가 보기에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는 징버적 정의가 아니라 분배정의distributive justice라고 말한다.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분배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갈망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으며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학에 기초를둔다.
이 세상과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성거에서 말하는 분배정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공정하게 누리는 것으로 경제 정의라고 할 수 있다고 보그는 말한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은 '죄'를 단수로 사용할 때도 있고 복수로 사용할 때도 있다. 복수 형태로 쓰일 때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불순종이나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과 같은 특정 잘못을 뜻한 때가 많다. '과녁에서 빗나감'이라고 이해하는 그리스도교인들도 있는데, 여기서'과녁'이란 하나님의 명령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듭 어김으로써 '과녁을 빗맞힌다', 죄가 이것만을 듯한다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용서이다.
이러한 이해방식에서 '죄들'은 개인이 저지른 잘못된 행위란느 '죄의 개별화'와 한 쌍을 이룬다. 물론 우리는 모두 개인적인 차원에서 죄를 저지르고 '과녁을 빗맞힌다'. 하지만 이렇게 개인적인 차원에서 죄를 저지르고 '과녁을 빗맞힌다'. 하지만 이렇게 개인의 잘못된 행위를 뜻하는 죄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성서가 전하는 '죄'에 담긴 보다 풍부한 의미를 놓치게 된다.
성경은 개인의 죄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제도화된 죄, 구조적인 죄, 사회구조에 자리잡은 죄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오히려 제도적인 죄는 '나태'와 '교만'일 것이고 이것은 공동체적으로 확대된다. 민족적인 부분에서 나태와 교만이 나올 수도 있고 신자유주의 안에서 교만과 나태도 마찬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
보그가 이야기하는 대로 '용서'로만 치부되어 버리는 개인의 죄의 범주를 넘어서면 새로운 지경에 이르기는 한다. 그것은 개인이 느끼는 죄의식을 만들어내는 실제적인 사회구조와 사건들에 대해서도 죄라고 말하는 것이다.
폴 리쾨르는 '악의 상징'에서 인간이 처음에는 자신의 양심이나 영혼, 개인의 역사에서 '흠'이라는 한 두번의 범죄를 지르다가 그것이 여러번 쌓이면 '죄'가 되고, 그 죄가 역사적으로 축적되면 '허물'이 되어서 제도화가 되어 버린다.
우리 사회에서 죄라고 여겨지지 않은 '경쟁, 야만, 수치심, 교만, 미움, 투기, 시기, 질투, 사기, 폭력'은 신자유주의에서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기도 한다. 보그의 이야기처럼 이것을 만들어내는 제도를 혁신함으로써 우리는 개인의 죄의 가능성을 더 줄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