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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ug 14. 2022

하나의 길인가 더 빠른 길인가?

마커스보그_그리스도교신앙을 말하다_15장에서 24장까지

들어가기


마커스보그를 읽고 있다. 한국교회의 입장에서는 매우 위험한 신학이면서도 많은 이들이 좋아할 신학이기도 하다. 상징과 은유로서 성경의 사건들을 보게 되면 '두려움이나 경고'라고 보는 것보다는 그 자체로 풍성함과 문학적인 상상력을 높이는 작용을 하는 것도 같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신앙을 흔드는 부분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할 때, 그것 자체는 상징과 은유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전해지는 사건들도 진실로 그런가? 사건과 해석 사이에서 보그에게 질문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 부분들을 염두해두면서 이야기를 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마커스 보그를 다 읽고 나니 '문자주의도 아니고 상징-은유도 아니라면 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https://brunch.co.kr/@minnation/3083




15장_요한복음 3장 16절


요한복음 3장 16절은 미래의 천국을 위해 지금 예수에 관한 일련의 진술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이 구절은 예수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예수를 통해, 성육신을 통해 알려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다아올 시대의 삶'에 지금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기존의 요한복음 3장 16절은 천국과 지옥, 그리스도교 해석틀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라는 구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를 믿는 것'에 국한된 조건적이라는 오해를 일으킨다.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세상은 긍정적 의미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과 부정적인 의미에서 인간이 만든 문화와 지배체제를 말한다. 부정적 의미의 세상에 긍정적인 의미의 세상이 도래하면서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드러나신다. 

요한복음에서는 희생제물의 개념도 아니고 내세천국의 개념도 아닌 현재에서 누리는 성육신의 사건을 통해서 명말하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미래의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미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마커스보그에게는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서 만들어내는 미래의 일들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생각해보기

저자에 따르면 영생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를 아는 것이자, 다가올 시대의 삶에 지금 참여하는 것이다. 당신에게 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16장_거듭남


'거듭남'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으로, 그리스도교의 삶의 목적과 전망을 보여주는 주요한 이미지이다. 이 말은 우리의 변환, 그리고 궁극적으로 세상의 변환을 그린다. 하나님의 영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더욱 정의롭고 평화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에 함께 참여한다.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다고 하는 사람들은 대속신앙을 비롯해서 창조과학과 낙태반대, 동생에 대한 배타적 태도, 군국주의적인 외교를 옹호한다. 물론 이것은 미국기독교인들을 지칭하기는 한다. 

거듭남은 보수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종교적, 정치적 우파로 연결된다. 윤리적 관점에서도 거듭남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계속해서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 '거듭남'은 풍요로운 의미 뿐만 아니라 강력한 변환을 뜻한다. 다시 태어남이라는 것은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은유로 철저한 변환을 뜻한다. 옛삶은 가고 새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마커스보그는 '거듭남'을 조금 더 실제적으로 풀이한다. 변환transformation은 생각의 변화에서부터 시작해서 영적인 변화가 실제 우리 삶의 변화까지를 이야기한다. 


생각해보기

저자는 이른바 미국 보수 그리스도교에서 '거듭남'이라는 말이 의미를 잃고 그리스도교인이 되는 과정, 혹은 천국에 가기 위한 통과의례 정도로 전락했다고 진단한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거듭남'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또한 저자가 제안하는 거듭남의 의미는 당신의 삶에 어떠한 통찰을 주는가? 

다른 조직신학자들은 '거듭남'을 어떻게 풀이하고 해석하는가? 




17장_유일한 길


예수는 길이고 진리와 생명리라는 말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길과 진리와 생명을 본다'는 말이다. 이 말은 예수라는 말을 아는 것도 길인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믿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해 그 길을 본다. 우리는 그가 보여준 삶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세상을 억압하는 권력에 도전하는 삶, 철저하게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삶을 발견한다.  

마커스보그는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지는 않더라도 기독교가 유일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거나, 그리스도가 진리의 주체라고 보지 않는다. 다만,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가 '길, 진리, 생명'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배타주의는 '오직 그리스도만 길이다'라는 것이고, 다원주의는 '어디에서나 길이 있다'라는 것이다. 포괄주의는 타종교에서 일반적인 '진리'가 있고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모든 진리는 그리스도로 모두 포용된다. 마커스 보그는 예수님에게서 가장 뚜렷하게 그 진리가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포괄주의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인정한다. 

다원주의에도 서술적 다원주의가 있고, 규범적 다원주의가 있다. 

서술적 다원주의는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고, 규범적 다원주의는 존재자체를 기반으로 한다. 


생각해보기

당신은 예수가 길과 진리, 생명이란느 말을 어떻게 이해해왔는가? 이 말은 문자주의적으로, 베타적으로 이해했을 때 느꼈던 곤란함은 무엇인가?

이 말을 배타주의에 빠지지 않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저자의 제안은 당신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가?




18장_승천, 19장_성령강림, 20장_휴거와 재림 , 21장_천국


은유적인 내러티브로서 승천 이야기의 기본 의미는 분명하다. 예수는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다. 이말은 다양한 뉘양스를 띈다. 

성령강림절의 핵심은 예수가 약속한 영이 그의 제자들 사이에 세상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영은 하나님의 영,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다. 이는 신약성서와 초기 그리스도교의 근간을 이룬다. 

휴거는 성서에 바탕을 둔 개념도 아니고 그리스도교 전통과 가르침을 따르지도 않는다. 수 많은 그리스도교인이 휴거를 믿으며 휴거와 재림이 빠른 시간 내 일어날 거라 믿지만,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인의 삶을 왜곡할 뿐이다. 

육체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이후 또 다른 삶에 대한 희망이 담긴 천국은 오랜시간 그리스도교의 한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이 말이 그리스도교 초기 몇 세기 동안에는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으며 1천년 경이 되어서야 주목받기 시작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민네이션, 생각

마커스 보그에게 보여지는 특징은 '문자주의'를 버리게 되면 '상징-은유'로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건이 진짜냐 가냐가 아니라 사건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종교다원주의든지 아니면 포괄주의든지 혹은 천주교의 신앙이든지 아닌지든 간에 '상징'은 그 자체로 다양한 해석을 낳기는 한다. 

가야할 길이 너무 멀다. 해석학의 관점에서 '사실인가?'에서 '상징이 내포한 의미는 무엇인가'에서 '의도했는가 아닌가'에서 '진리인가 아닌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질문들이 등장한다. 누구라도 3번정도는 질문을 할 수 있지만, 5번정도 질문하게 되면 그것에 진절머리를 치게 된다. 그러니 기독교에 대한 해석은 '신학자'의 일이 되어 버렸고, 특히 한국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반지성주의'로 가면서 신비와 체험이 더욱 강조되어 버린다. 

보그의 논리는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물론 그 자체로 신선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종교다원주의에서도, 유일성에 대한 비판도 많지만 성경을 정말 '상징-은유'적으로만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논리는 역사적 예수논쟁이 3차까지 마무리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계속되어야 한다. 



22장_신경과 삼위일체, 23장_주의 만찬, 24장_주기도문


니케아 신경을 고백하는 것은 전복적인 행위이다. 우리는 이 신경을 고백함으로써 우리를 지배하려는 다른 주인들의 요구를 무효화한다.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이 우리의 님, 단 하나뿐인 주님이다. 이 세상, 문화의 지배자들은 우리의 주인이 아니다. 

빵과 포도주는 예수의 살과 피를 의미했기에 대속은 성찬식과 죄와 죄의식,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자로서의 예수에 관한 이미지들로 가득했다. 지금도 곳곳에서 거행되는 여러 성찬에는 이러한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 

주의 기도를 1세기라는 역사적 맥락 아래 살필 때 우리는 먼저 예수가 가르침을 전한 주요 청자가 시골 농민이었음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이 기도가 빼앗기고 박탈당한 이들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갔을지 상상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 성부에게서만 나오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어 성자에게서만 나오는가에 따라서 예수가 유일하게 되거나 혹은 다중이 되거나 한다. (이것은 마커스보그의 논리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KFvYQQPrxUs

비아출판사에서 만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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