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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ug 16. 2022

위기와 상상력

느헤미야 신학캠프 1_김근주_새로운 상상력_위기와 그에 대한 평화적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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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신학캠프를 개최한다. 이번 9월부터 다시 입문과정을 한학기 동안 듣게 되는데, 모처럼 동교동에 있는 느헤미야에 방문했다. 1일차 캠프는 '구약과 위기'로 김근주 교수님이 강의를 하시고 두번째 강의는 '공공에 계시지 않는 하나님: 공공신학의 사회전략을 묻는다'라는 주제로 김동춘 교수님이 강의를 하신다. 코로나가 한 차례 지나간 한국사회, 한국교회 그리고 나서 드는 의문들은 '여전히 교회는 유효한가? 교회의 영향력은 유효한가? 왜 이렇게 영향력을 잃었는가?'에서 부터 시작해서 그럼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방법으로 코로나를 대응해야 하는가?'이런 고민들이 든다. 오늘 캠프에서 한번 그 실마리를 찾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신학캠프 1일 차 _ 8월 16일(화) 저녁 7:00】

- 구약과 위기|김근주 교수

- 공공에 계시지 않는 하나님: 공공신학의 사회전략을 묻는다|김동춘 교수




새로운 상상력 : 위기와 그에 대한 평화적 대응_김근주


성경에서는 '위기'를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그 위기를 '경험'에 의해서 규정하고 있을까 아니면 문헌으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로 '위기'를 기술하고 있을까? 우리가 읽는 고전이라는 것은 보통 100년 이상된 문서들 중에서 위기에 대한 힘을 주고 정신적인 기둥이 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오래된 고전임과 동시에 '위기에 대한 힘'을 제공해 주는 것임에는 2000년 넘는 문명의 역사가 증명한다. 개인의 위기이든, 사회의 위기이든 성경에 나오는 '위기 내러티브'를 통해서 자신에게 적용해보고, 또 우리 사회에 적용해보기도 한다.


19세기 이후에 성경을 연구하던 사람들은 우리가 상상력으로 생각하면서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하는 구약성경이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도중이나, 바로 다음에 쓴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모세가 쓴 모세 오경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편집되고 정리된 시기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완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고증을 거쳐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게 아니라, 포로기 이후에 완성되었다는 것은 '위기'의 시기를 이미 겪고 난 후의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성경은 근본적으로 쫓겨남이나 나그네, 일상에서 발생하는 위기, 약속의 희미해짐과 같은 위태로움을 다루는데 이것은 위기를 경험하고 나서 '해석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일신 신앙과 위기


그럼 유일신 신앙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보통 위기를 살아남을려면 자신이 누군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나는 이 위기 속에서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위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매번 따라 다니고, 그 결과로 살아 남은 것은 진정한 나의 정체성이 되기 마련이다. 포로사건으로 참혹한 현실을 겪은 이스라엘 민족은 구약성경에서 보여지는대로 슬퍼하고 아쉬워하고, 원망하고, 매달린다. 하나님께 매달리고 제국에 매달리고, 서로에게 매달린다. 그러다가 결국 해석의 결과는 우리가 붙잡을 것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자신들이 잡았던 줄은 모두 썪은 동아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이스라엘은 '상상력을 가진 예언자'들의 말을 듣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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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브루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에서 선지자는 미래를 하나님으로부터 보고 희망을 선포하기도 하지만, 현재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비판하는 부분도 감당한다. 현실이 암울한데도, 그 암울한 이유가 바로 자신들이라는 까탈스러운 비판은 당연히 선지자들을 몰아내기에도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에스겔에서 보여지는 메마른 뼈들에 생기를, 이사야서에서 보여지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 호세아서와 같이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이야기는 미래를 엿보게 하면서도 자신들의 현실을 바꾸어야 하는 미션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훈련같지 않지만 훈련인 과정을 겪으면서 이스라엘은 '현실을 비판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보기 시작한다. 존재론적으로 '나는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지만, 하나님은 나를 아시고 미래를 새롭게 열어내신다'라고 하는 고백이 나오게 된다.


위기를 경험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의 조상들에게 주었던 '약속'과 '출애굽' 사건을 붙잡는다. 특정한 영토나 국가같은 확실하게 있지만 계속 침범당하면서 빼앗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과,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언약이 중요했다. 이러한 언약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이동은 출애굽기였기 때문에 '약속과 출애굽'은 포로기를 겪은 이들에게 희망이면서도 자신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나침반이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라고 말한다. 이 내용은 포로기 이래 이스라엘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구절이 되었다.



민네이션, 생각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은 언제 완성되었을까? 완성까지는 아니라도, 언제 주로 형성되었을까? 이스라엘과 같이 포로기였다면 나의 인생에서 포로기는 운명에게 붙잡혀 있었던 중고등학교였던 것 같다. 내 모든 것이 사라질 위기에 있을 때 붙잡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었고, 하나님과 이야기하면서 날밤을 새운적인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나를 무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는 시기에, 하나님을 붙잡고 비로소 정체성을 완성했다. 어려움과 애매함 속에 여전히 버티고 계신 하나님, 하나님의 존재는 위기 시기에 완전함으로 다가온 선물이었다. 그다음 부터는 내 맘대로 살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이 위기에 발견한 진리는 내 삶의 원칙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이러한 원칙은 나를 살리기도 하지만 이웃도 살리고, 앞으로의 미래도 열어 놓기 시작했다.



박해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첫 교회의 확산_사도행전 15장


교회의 시작은 신약성경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선교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안디옥 교회나, 고린도 교회, 안디옥 교회와 같은 곳은 개척된 교회에서 성도에게 선교적인 존재 이유를 더욱 강조했다. 박해와 관련해서 생각해보면 '선교적'인 교회가 된 것은 자신들의 전략이나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었다. 오히려 스데반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박해때문이었다. 박해로 인해서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지 못하게된 베드로와 제자들은 모두 모여있지 못하고 여러곳으로 파송된 것처럼 흩어지게 되었다. 사도행전 15장은 안디옥까지 선교적 교회가 퍼져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방인들에게 전한 복음은 쟁점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이스라엘만 지켰던 '율법'을 어디까지, 누구까지, 어느정도까지 지켜야 하냐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체성'의 위기와 '멤버쉽'의 위기에서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면서 현실에 대응했다. 위기의 순간에 율법에 근거한 이해에 새로운 낯선 이를 맞추는게 아니라 낯선이들을 그대로 받으면서 율법에 대한 기존 이해를 바꾸어 버린 것이다. 위기에 대한 대응은 다양하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 속에서 '결정'한 것들은 결국 첨예한 대립이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화의 논리의 근거하여 결정할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포로시기'에 이스라엘의 대응은 평화적이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평화적'이 아니었다면 위기가 오지 않고 풍요가 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평화적으로 대응했고 국가의 회복으로 결론짓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주전 2세기의 위기에 대앙했던 마카비 혁명이 폭력으로 이룩한 새로운 나라의 예를 보여주지만 이것을 기록한 마카베오서가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생각해볼 부분이다. 사도행전 15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주님 오시고 난 후의 초대교회는 낯선이나 이방인에게 관대했다는 것, 긍휼함을 잊지 않았다는 것은 위기를 지난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사회를 바라보는 원칙


브루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에서는 현실 비판을 강력하게 하는 예언자들의 기본 근거는 '고아와 과부'의 존재였다. 억압하고 꺽고, 빼앗고, 무시하는 것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정의와 공의'와 멀어지는 사회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했다. 따라서 예언자들이 바라보는 미래는 공동체성과 존엄이 살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 미래는 '가난한 자가 내일을 희망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였다. 다니엘서에서도 물론 다니엘의 신분이 '궁중 관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귱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공의를 실행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민주주의'라는 현실지배의 원칙은 그 자체로 판단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민주주의는 과정인 것이지, 그 자체로 공의를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공정하다'라는 것과 성경에서 말하는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않으며 소외되고 배제된 자를 위한 대치'라는 것에서 민주주의는 오히려 침묵할 수도 있다. 현재 정치권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과연 민주당은 옳고 국민의 힘은 악한가? 아니면 그 반대로 민주당은 민주적이고 국민의 힘은 비민주적인가? 우리의 상상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현실의 불의와 압제에 대해서 '상식화'로 인정하면서 현실에서 눈돌리는 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성경에서는 사회를 바라본느 원칙을 가난한 자에 대한 환대와 사랑이라고 이야기 한다.


낯선 현실, 새로운 상상력


예레미야서 27-28장에서 나오는 거짓선지자인 하나냐는 바벨론 포로의 귀환과 해방에 대해서 '다 잘 될 것이다'라고 하는 거짓 희망을 불어 넣는다. 그러나 반대로 성경이 인정하는 참선지자인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항복한 것을 선포한다. 독립과 자주 혹은 해방과 불의에 대한 응답이 언제나 선하고 옳은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성경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구약성경은 말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유다 왕국 말기의 독립이란 시드기야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방법일 뿐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이 유다가 망하고 나자 그 당시의 기득권이었던 귀족들은 죽거나 포로로 끌려 갔다. 반대로 바벨론은 예루살렘과 유대 인근의 지역을 땅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이후에 공동체는 오히려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현실을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이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하나님이 서 계신가를 생각하는 권력지향적인 관점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지, 하나님이 옳게 여기는 것에 서 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것은 기도나 묵상으로 알게 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이 더 확실한 현실인식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칼을 쳐서 보습이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되돌아보면서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뛰도는 세상을 상상해볼 수 있을까? 현실에서 새로운 상상력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평화가 이 땅에 도래할 수 있을지를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상상력은 오히려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 있는 그리스도를 볼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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