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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ug 16. 2022

시민과 제자 사이, 공공신학의 과제

느헤미야 신학캠프 2_ 공공신학의 사회전략_김동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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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신학캠프 2번째 강의를 시작한다. 첫번째 강의는 어떻게 보면 '위기'에 대처하는 이스라엘의 대응을 보았다면 이번 2번째 시간에는 '공공신학'에 대한 정의와 개념 그리고 비판점을 알아본다. 위기를 맞은 한국 사회에서 공공신학은 과연 어떤 깨달음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해보자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사회참여와 사회변혁에 대한 대안은 매우 축소되어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공공신학'은 하나의 대안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공공신학의 문제의식에 있다. 기존의 교회론이 잃어 버린 '공공성'을 부활시키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문제의식에는 문제가 있다. 복음 자체로 안되는가?이다. 다시 시작해보자.




【신학캠프 1일 차 _ 8월 16일(화) 저녁 7:00】

- 구약과 위기|김근주 교수

- 공공에 계시지 않는 하나님: 공공신학의 사회전략을 묻는다|김동춘 교수


https://brunch.co.kr/@minnation/3093




공공에 계시지 않는 하나님_공공성 담론과 공공신학의 사회전략을 묻는다_김동춘


공공신학은 무엇인가?


사회참여를 중심으로 하는 에큐메니컬의 해방신학과 사회변혁, 로잔언약으로부터 시작된 총체적 복음과 하나님나라, 기독교 세계관의 복음주의 진영은 1974년 로잔언약 이후에 서로 대치하다가 통합하는 과정을 거쳐왔다. 한국적 상황에서 로잔언약이 적용되기까지는 15년이나 더 걸리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하나의 방향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아가는데 과연 무엇을 위해서 나아가냐는 것이다.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이 최근에는 '공공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한 것 같은 느낌이다.


공공신학의 구분
1. 시민적 공공성을 지향하는 신학으로서 공공신학
2. 공통성, 일반성, 일치성의 신학으로서 공공신학
3. 공동선 신학으로서 공공신학


시민적 공공성을 지향하는 신학으로서 공공신학


공공신학은 크게 시민적 공공성, 공통성과 일반성, 그리고 공동선으로 구분된다. 공공성publicness란 사적인 것이 아닌 공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 '공적 삶'이나 '공적영역' '공적 광장'이라는 단어가 함께 따라 온다.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는 '사적인 종교화'를 극복하기 위한 공적인 영역의 확장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공고인학은 오히려 시민적인 가치와 덕성이 복음의 가치와 모순되거나 대립되지 않으며 서로 조화되고 일치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한다. 공공의 영역을 기독교가 점령해야하는다는 전략보다는 시민적 덕성과 가치를 지향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나는 것이다. 이데 애해서 김승환 교수는 다음과 같은 주제를 던진다.  


시민사회에서 교회는 어떻게 선교할 것인가?_김승환

1. 시민사회의 연결고리로서 교회
2. 공통의 언어를 구사해라
3. 공동의 선을 추구해라
4.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비전
5. 시민됨의 성품을 함양하라
6. 좋은 그리스도인에서 좋은 시민으로


이렇게 볼 때 공공신학은 '시민됨의 신학' theology of citizenship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시민사회 속에서 종교적 역할을 찾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민사회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가 공공신학의 첫번째 포인트이다.



공통성, 일반성, 일치성의 신학으로서 공공신학


공공신학의 두 번째 문제의식은 기존의 교회들이 잃어 버린 '공통성'이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공중도덕에서보 멀어지고 공공질서에 반하는 별종 종교집단이 되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복음 자체는 좋은 소식이지만 기독교인들이 자신들만의 신앙언어와 규범의 특수성만 고집했기 때문에 독선적이고 배타적이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공공신학은 교회와 국가 그리고 복음과 문화라는 이분법의 도식을 넘어서 조화와 소통을 추구한다. 공공신학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보편성을 추구하며 기독교적 독특성보다는 세속이성과 상식과 일치하는 것을 추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라인홀트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일치유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공공신학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에서 분리주의는 아니고 변혁주의나 역설유형도 아니다. 오히려 종합하려는 관점보다도 훨씬 덜한 일치유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공공신학은 오히려 '상식적 실재론'common sense realism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민주적 교회입니다'라고 하거나 '우리 교회는 상식적입니다'라고 하는 것이 이것을 증명해 분다.



공공신학과 상황신학


공공신학은 현장신학이자 상황신학이다. 공공신학은 현장과 긴밀함을 가지면서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들과 소식들에 대해서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서로 소통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신학은 '문화적 기독교인'으로서 상식과 품위가 넘치는 삶이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도전이나 혁신을 추구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회구조를 인식하고 이해하기는 하지만 구조악에 존재하는 문제에 대해서 저항과 투쟁을 통해서 대항신학적counter-theological으로 대응하지는 않는다. 공공과 기독교가 소통하면서 사회문제를 개량적으로 풀어가려고 한다. 정리해 보면, 공공신학은 정치이념상으로 혁명적인 신학도 아니고 전복적인 신학도 아니고 지속적으로 사회를 해결해 가려는 개혁적 신학reformative thology이다.




기독교 사회형성론과 사회전략


기독교 사회전략이란 무엇일까? 성경적이면서 기독교적인 사회원리가 공적 사회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실현가능성과 대안을 찾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당위론과 현실론 사이에서 딜레마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당연히 세계형성적인 기독교는 사회를 형성해가고 있지만 반대로 기독교만 그렇게 형성되는게 아니라 인간의 삶이, 문명이, 어떤 사회라고 형성적인 특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현실과 당위 사이에서 3가지의 방법론이 등장하게 된다. 그것은 이원론, 변혁론,대항론이다. 이원론은 사회로부터 분리해서 도피하는 형식이며, 변혁론은 사회행동적이고 실천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변혁하는 사회전략이다. 대항론은 한편의 문화론으로 재세례파의 사회전략이라고 할 수있다.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것, 세상은 세상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자크 엘룰과 디트리히 본회퍼가 이렇게 표방한 바가 있다.


공공신학에 대한 비판

1. 공공신학은 성서적 사회원리에 근거한 대항적이며 전복적인 사회형성의 파토스가 없다.
2. 공공신학의 사회전략은 순응주의에 빠질 수 있다.
3. 공공신학은 지나치게 공공낙관주의에 빠져 있다.
4. 공공신학은 근대 세계 이후 기독교가 공공에서 타당성 구조를 상실하고 있으며, 이를 복구하는 신학적 방안이 충분한 대안을 주지 못하고 있다.
5. 공공신학은 '리버럴 기독교'의 사회전략이다.
6. 역설적이게도 공공신학은 신앙의 사사화가 촉진된다.   


공공신학은 어떻게 해야할까?


공공신학은 기독교의 공적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공공의 영역에서 기독교는 행정당국의 공적역할에 후원자그룹이 되려고 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예언자적인 비판과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마치 정치에서 캐스팅보트처럼 국가의 공적 역할이 공평하게 수행되고 있는지, 특정 계층이 희생양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배제되고 소외되는 이웃이 없는지를 살펴야 한다. 후원자가 아니라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공공의 광장에서 사회에 만연된 부동산, 블로소득, 전관예우, 특혜구조와 같은 공적인 죄를 파헤치고, 이를 바로잡은 역할을 해야 한다. 공공신학의 원래 목표인 일치와 조화뿐만 아니라 긴장과 갈등을 배태한체로 '부정의와 문제'에 대해서 고발해야 한다.


예언자적 상상력에서 보여준 것처럼 대항문화적인 공적제자도의 관점에서 '사회를 전복시킬 비전'도 역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한번에 사회구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말하는 내재적인 구조들의 미래와 기존의 해결되지 않은 구조적 악을 넘어서는 비전이 필요한 것이다. 한마디로 너무 일치를 추구한 나머지 진보적인 대안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결국 제자와 시민 사이에서 당위와 현실을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이면서도 시민성을 충분히 가지고 '균형잡힌' 걸음을 걸을 수 있을까? 이런 도던이 공공신학 앞에 놓여 있다.



민네이션, 생각


공공신학을 '일치유형'으로 정의한다면 일치유형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그대로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화에 적응하는 순응적인 기독교전략은 결국 중요한 시기에 '옳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과,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구조가 만들어져가는 가운데 결과가 좋으면 좋다는 승리주의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공공신학에서는 인간에 대한 '긍정성과 낙관론'이 그 자체로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역설적이고 아리러니하게도' 남겨 놓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사회가 악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이 없는 것도 아니다. 살인사건에서 무력한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사랑'만 외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공공신학에 대한 문제의식과 접근도, 그에 대한 비판도 합리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이것은 기독교가 사회를 한번 훑고 지나간 이후 해석에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현대사회에 기독교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를 볼 때 '눈높이'를 맞추지 못해서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눈높이를 맞춘 것처럼 공공신학은 그 자체로 자세를 낮추고 세상의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원성과 민주성, 시민성과 덕성을 중심으로한 공공신학은 자칫하면 복음의 핵심을 놓칠 수도 있다. 배제와 포용에서 나오는 유일성과 다원성 사이에서 포용의 방식이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면서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참고_새물결플러스 '공공신학과 선교적 교회' 커리큘럼


1주_ 세계선교운동과 선교적 교회론
(근대교회사의 첫 번째 아이러니, 서구 크리스텐덤의 몰락과 세계선교 운동의 확장)

2주_ 세계교회협의회 중심의 에큐메니칼 운동과 선교적 교회론
(근대교회사의 두 번째 아이러니, 선교를 위한 교회 연합, 그러나 “선교”와 “교회 연합”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다 잃고 방황하는 세계교회협의회)

3주_ 세속화 신학과 선교적 교회론
(근대교회사의 세 번째 아이러니, Missio Dei에 대한 제멋대로의 해석으로 인한 교회와 세상의 관계성에 대한 신학적 혼돈 상태)

4주_ 교회성장이론과 선교적 교회론
(근대교회사의 네 번째 아이러니, 교회성장이론을 중심으로 전도와 선교를 해석하는 북미 복음주의운동과 그로 인한 교회의 선교적 정체성 혼란)

5주_ 종교다원주의와 선교적 교회론
(근대교회사의 다섯 번째 아이러니, 다양한 종교다원주의 주장들이 과연 타종교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하는 타당한 접근 방법인가?)

6주_ 콘스탄틴 이후 크리스텐덤화 된 교회가 보여주는 특징들
(크리스텐덤 하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가? 한국교회가 크리스텐덤 식의 기독교 사회를 추구할 때 벌어질 수 있는 일들, 그리고 지금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7주_ 콘스탄틴 이전의 초대교회가 보여주는 선교적 교회의 모습
(선교적 교회가 공적으로 신앙을 세상 사회 속에서 선포하며 증인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들)

8주_ 한국교회는 선교적 교회로서 어떻게 공적 신앙을 증거해야 하는가?
(전통적인 교회의 네 가지 표지들,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인, 사도적인” 교회를 통해 살펴보는 선교적 교회의 모습)


https://www.theosnlogos.com/entry/%ED%95%98%EC%9D%B8%EB%A6%AC%ED%9E%88-%EB%B2%A0%EB%93%9C%ED%8F%AC%EB%93%9C-%EC%8A%88%ED%8A%B8%EB%A1%AC%EC%9D%B4-%EC%A0%9C%EC%8B%9C%ED%95%9C-%EA%B3%B5%EA%B3%B5%EC%8B%A0%ED%95%99%EC%9D%98-%ED%8A%B9%EC%A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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