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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추억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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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Sep 13. 2022

추석에는 해남으로
여행이나 가볼까?

벌써 40년째 다녀오는 남도여행

남도로 향하는 발걸음! 벌써 가을이 마음 속에 들어온다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처럼 세월은 잘도 9개월을 훌쩍 뛰어 넘어 남도로 향하고 있었다. 눈이 소복히 쌓이던 해남 대흥사의 할머니댁의 앞마당은 어느새 내 키보다 더 큰 깻잎나무들로 뒤덮였다. 이제 90을 맞이하신 할머니는 허리가 굽어지시고 이빨도 다 빠지셨지만 정정하셔서 날마다 마당을 돌아다니신다. 가끔 넘어지시기도 하시지만 그래도 90평생 흙에서 나서 흙에서 자라셔서 항상 흙과 지내신다. 바쁜 일상을 마치고 민족의 대명절이라는 추석을 맞이해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시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밤 10시에 출발했는데요, 우리와 같은 생각을 했었던지 도착시간은 계속 늘어나서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대흥사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이제 막 일어나셔서 어린아이처럼 눈을 부비시고 우리를 반겨주셨다.

내 키보다 더 큰 것 같은 깻잎나무?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를 시간대, 마치 고흐의 그림들이 생각나는 시간!


한숨자고 나서 친척동생들과 함께 가까이에 있는 카페에 들렀다. 땅끝마을에 있을 것 같지 않은 분위기로 편안하게 우리를 맞이해준 카페에서 나는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여전히 여운이 남는 김남주 시인의 글을 읽고 있었다. 사실 존경하는 진태원 선생님이 '을의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우리 운동사는 김남주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는 말에 궁금하기도 한 터였고, 근처에 있는 녹우당 바로 옆에 남도 문학관에서 김남주 시인과 고정희 시인을 비롯해서 여러명의 남도 문학가들을 만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느새 창밖에 보이는 너른 들판 사이로 구름이 시원하게 지나가고 있었고, 따스한 햇살은 머지 않은 곳에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라고 말하는 김영랑 시인의 강진에서 비추인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카페 창밖으로 보이는 산과 들판, 햇살이 이미 추석이라고 말하고 있다.


태어나면서 부터 지금까지 성장과정을 봐왔던 친척동생들이 이젠 군대도 다녀오고 취직도 해서 말이 제법 통했다. 컴퓨터공학 숙제를 해야한다면서 스쿠터에 안면인식센서를 부착하는 것을 과제로 삼은 막내동생을 두고 첫째동생과 근처 고산윤선도 선생님의 '녹우당'을 찾았다. 푸르른 잎사귀들 사이에 돌담이 정갈하게 자리잡았고 '어부사시사'를 지은 고산의 정서가 그대로 느껴지는 소나무들과 벗하며 거리를 걸었다. 이제 취업걱정을 하는 친척동생은 "형~무슨 생각하면서 살어?"라고 물어봐주어서 반가웠다. 왜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지, 왜 미래가 불안한 이들에게 친구가 되고 싶은지, 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이 벌써부터 우울하게 세상을 맞이해야하는지 등등 나의 삶과 고민, 사건과 문제들을 풀어 놓느라 녹우당 밑에서 한시간도 모자를 만큼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철모르는 친척동생이 심드렁하게 한마디를 해 주었다. "와~형 힘들었겠는데?"라는 말에 울컷 눈물이 날 뻔했다. 인생의 깊은 고뇌 속에서 하나씩 베일이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녹우당을 지키고 있는 소나무들~ 적어도 400년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할아버지는 훈장선생님이었던 증조할아버지의 과업을 잇지 못하고 밤낮 정신없이 팔도를 돌아다니셨다고 한다. 젊으셨을적에는 시장에서 소를 경매하는 일을 하셨다고 하는데, 내가 의식이 있고 할아버지가 기억이 나던 시기부터는 항상 무릎이 아파서 힘들어하시고 코가 주정뱅이처럼 빨갛던 것만 기억난다. 그리고 한마디 "공부 안하면 함포된다 함포!"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함포는 바보라는 뜻이다. 그 말을 잘 받들어 공부는 열심히 했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약간은 무책임한 할아버지 덕에 할머니가 등이 굽어질만큼 발전하는 한국사와 함께 매년 농사에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었다는 것에 살짝 화가 났다. 민씨 집안이 다 그런건지 아니면 그 시대의 남자들이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삶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가족의 미래에도 책임을 진다는 것인데, 오히려 할머니가 그 짐을 다 짊어지신것 같았다.


할머니가 평생 농사짓고 울고 웃으셨던 논
벼가 익어가고 열무는 그 어디서 보던 열무보다 생명력이 파릇파릇하다


어느덧 달이 뜨고 밤이 찾아왔다. 밤이 오히려 낮과 같이 밝았다. 태양만큼 밝은 달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그 옛날 정한수 떠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더 하던 할머니들의 손등이 보였다. 구름을 벗어난 해처럼, 구름을 담고 있는 달이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정취가 느껴지는 해남 할머니댁의 저녁은 그렇게 까맣게 타들어갔다. 어떻게 보면 시를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그림을 그리고 사람들을 조금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매년 2회이상은 벌어지는 내 삶의 리추얼, 남도 여행 때문인 것도 같았다. 매번 5시간을 넘는 시간동안 길게 생각하게 되고, 해남에서 일어나는 근대소설과 같은 이야기들은 내 안의 상상력의 공간을 매년 넓혀왔다. 자연과 벗하면서 사물의 생동감 넘치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같다.


시골밤의 정취! 태양같이 빛나는 달을 보면서 소원을 빈다



추석날 보통은 제주도에 계신 외삼촌이 오시는데 이번에는 저녁에 오시게 되었다.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오시면 3시간이 걸리시는데 그 동안 부모님을 보시고 짧은 여행을 떠난다. 완도에는 최근 완도타워가 생겨서 멀리 신지대교와 장영실이 누렸던 항구들이 보인다. 짚라인도 생겨서 낮에는 즐거운 액티비티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야경은 생각보다 화려했다. 오히려 해남읍보다 더 젊은이들도 많고 불빛도 화려했다. 허리가 아프셔서 올라오지 못하신 어머니는 주차장에서 야경을 구경하고, 아버지와 나는 단숨에 완도타워까지 올라가서 멀리 배가 들어오는지 아닌지 돌아보았다. 한숨만 돌려도 사람은 살 것 같다. 바쁘고 애매한 환경에서 대도시의 삶을 사는 우리의 죄는 항상 양가감정에 휩싸인다. 극단과 극단을 오가는 사이에 스트레스도 쌓이고 조바심나는 마음을 달래느라 식은땀을 빼기도 한다. 때론 사람들에게 이렇게 한숨을 돌려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내가 어디까지 걸어왔는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게 아닐까?




어머니와 함께 달밤에 체조를 하고 계신 아버지가 웬지 귀여워 보이는 밤이었다. 완도타워 반대쪽으로 가니 멀리 제주도와 섬들이 보이는 듯도 했다. 그 옛날 유배지에서 한적함을 넘어 지난함과 고독에 사무친 선비들의 시구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음악을 들으면서 바다를 음미하는 사이에 부모님은 이미 생활체육을 위해 설치된 모든 운동기구들을 섭렵하고 언제 가나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그러는 사이 파도가 좀 높아서 빙빙돌았던 블루펄호가 완도항구에 도착했다. 두 손 가득 들고오신 외삼촌을 맞이하면서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서 반가움을 표시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누군가 어디에 도착했을 때 마중을 나온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 반가운 일이고 감동적인 일이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외삼촌을 모시고 어머니의 고향인 해창으로 갔다. 그 유명한 해남고구마의 산지이자 해창막걸리의 탄생지인 해창에서 어머니는 비로소 고향의 향기를 누리고 계셨다.


이렇게 튼실한 대투와 총천연색을 동원한 생명력이란. 한 줄기에 몇 개씩 주렁주렁 열렸다. 남도의 힘이란!


해창에는 원래 바닷물이 들어왔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해창주조장은 그 바닷물을 잘 이용해서 술을 빚고 해창막걸리만의 독특한 감미료 없는 찹삽과 녹두의 맛이 첨가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새삼 유명한 막걸리의 본산지라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면서 5살때부터 홀짝홀짝 어른들이 가져다논 주전자에 막걸리를 마시던 나의 어린시절도 생각난다. 막걸리를 몇 병 사서 진도대교로 향했다. 울돌목! 바로 그 유명한 명량의 촬영지였던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울돌목의 물살은 거침없고 또한 지속적이었다. 오후 2시정도가 되면 밀물과 썰물이 바뀌어서 더 센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곳이다. 울돌목 앞에 '광주횟집'이라는 맛집이 있는데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지만 정갈한 스키다시에 횟감이 아주 싱싱하다. 할머니를 모시고 다녀온 진도대교는 이제는 케이블카까지 마련되어 있어 사람들이 붐볐다.  


할머니는 돌아오셔서 계속 마당을 청소하시고 또 멍하니 태양을 응시하고 계셨다. 해남의 저녁이 그렇게 다가왔다.



광주에서 이름난 기사식당을 하시는 외삼촌댁에 잠시 들렀다가 영광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어렸을적부터 생선을 많이 드셔서 그런지 항상 밥상에는 고등어와 조기, 가자미 종류가 많았고 김치에는 젓갈이 반드시 들어가야 했다. 이왕 올라가는 길이 늦은 김에 여행을 하자고 하셔서 영광으로 향했다. 영광에 설도항이라는 항구는 막 잡아 올린 해산물들을 파는 것으로 유명한데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자리에 못 앉고 영광 보리굴비를 파는 항구 입구에서 맛있게 한접시를 해치웠다. 원래 서울 여의도에서는 보리굴비를 녹차에 적셔서 먹었는데 약간 비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산지에 와보지 보리굴비를 녹차물에 적시는게 아니라 녹차물에 얼음을 띄우고 밥을 말아서 먹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적부터 밥에 물을 말아서 젓갈에 드리고 하셨는데, 사실 이게 전통적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모두가 그렇게 드시고 있어서 녹차물에 보리굴비를 찍어 먹는 내가 괜히 서울깍쟁이 처럼 보였다.




영광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백제의 유산을 가지고 있다. 또한 종교적으로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1916년 박중빈이 창시한 원불교는 영광이 그 시작이었고 원불교의 성지는 그 새 5곳으로 늘어났다. 물론 일제시대에 거국적인 항일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던터라 궁금하던 차였다. '처음읽는 한국현대철학'이라는 책 시리즈에서 다루고 있기도 해서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영광 원불교 성지를 찾았다. 말그대로 원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있었고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박중빈의 철학이 오롯이 느껴졌다. 자연은 계속해서 생성하고 만들어내고 또 혁신한다. 그러니 우리의 정신도 계속해서 그것을 닮아서 혹은 견주어서 개벽하고 혁신해야 한다. 날마다 새로운 생각으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 이미 물질은 그렇게 하고 있으니깐 말이다. 음미해 볼 수록 생각해볼 만한 구절이었다.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부탁드렸더니 두 분이 나란히 서서 응시하는 포즈를 취해주셨다.





영광 법성포는 원래 간다라 불교가 유행하던 시대에 전통을 한몸에 받은 마라난타라는 승려가 정착한 곳이다. 백제 384년 침류왕때 마라난타가 중국을 거쳐 법성포에 자리를 잡았고 이것이 백제의 불교가 처음 도래한 것이었다. 몇년전에는 공사중이였는데 공사를 마친 '백제불교 최초도래지'는 역시 간다라미술을 기반으로 입구부터 시작해서 향로와 석가모니 불상 등을 조화롭게 배치해 놓았다. 저 멀리 보이는 산위의 아미타불은 지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염불을 외우고 있고 해탈을 한 중생들은 극락으로 올라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인간은 종교적이다. 인간은 초월적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삶을 재해석하고 또 거리를 두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종교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어쩌면 그게 하나님 자리인지도 모르겠다.


마침 간다라미술 전시관이 있어서 간다리 미술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이제 드디어 이 해남 여행의 마지막 지역 '곰소'에 도착했다. 어마니가 '잡젓'을 김치에 넣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 없다고 하셔서 곰소에 친히 찾아갔다. 다양한 젓갈들과 시기별로 담가 놓은 새우젓이 풍성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람들이 한바탕 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유유자적하게 곰소시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3대째 운영하는 우정젓갈에서 사장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는 정은수산회타운으로 갔다. 아니!!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스키다시를 주는 곳은 처음 가보았다. 가격도 싸지만 전복이며 횟감이며 스키다시 천국이었다. 곰소시장 주차장 바로 옆에 있으니 뷰도 아주 좋았다. 마지막 식사를 즐겁게 마치고 우리는 드디어 2022년 추석 대여행을 마치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4시간은 말그대로 여행한 것들에 의미와 추억의 꼬리표를 붙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이러한 여행이 얼마나 될까? 부모님을 모시고 즐겁게 여행할 수 있는 지금이 가장 기쁜 시간인지도 몰랐다.


거리도 한적 했지만, 바다도 여유로웠다. 마치 엔딩크래딧이라도 올라가야할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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