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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Oct 06. 2022

언약 안에서 공존하기

미로슬라브볼프_배제와 포용 7장, 9장

미로슬라브볼프_배제와 포용

포용 7_언약, 계약, 포용


들어가기

모든 삶이 '계약'으로만 만들어지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의 진짜 삶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은 무엇인가?

사회계약에 의해서 만들어준 사회적 약속은 어떤 경향을 가지는가?

우리는 포용의 무모한 은총을 어떤 형태든 사호 구속적인 율법으로 보충해야 한다.

사회적 관계를 규제하는 율범에 포용의 은총을 끼워 넣어 율법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것을 안에서부터 계속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https://brunch.co.kr/@minnation/3139


계약, 포용

포옹에 관한 성찰이 사회적 언약에 대한 일반화된 이해를 어떻게 풍성하게 할 수 있는가?

정치적 자유주의는 삶을 본질적으로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활동이라고 이해하면, 계약이 사회적 삶의 중심은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계약은 각 사람이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혼자서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성취할 수 있게 해 준다.

계약은 과업지향적, 제한된 헌신, 상호적으로 동의에 의한 구속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계약은 결국 상호적일 때만 효력을 가진다. 제한적인 효력 말이다.


계약, 이해

계약의 세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인간의 삶을 잘못 이해하는 세가지 중요한 방식을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만 서로 관계를 맺는 자율적인 개인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의 기능적인 관계는 사실, 비합리적이며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없는 정서적 유대에 의해 지탱된다.

여러 차원에서 서로에 대해 관여하는 경우는 명확히 명시된 항목과 조건에 의해 제한될 수 없다.

사람들은 단순히 사호적 유용성만 아니라 공동의 운명과 같은 것에 의해서도 구속을 받는다.


언약, 포옹

언약에는 자율과 소속감, 개인적 참여와 사회 안에 자리잡고 있는 개인이 모두 공존한다.

언약은 자발성과 동의라는 핵심요소를 아우르며, 관계의 본질과 역사로부터 도출되며, 결코 미리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없는 의무를 만들어낸다.

제한적이며 상호적인 참여를 규정하는 계약과 달리 언약은 끝이 열려 있으며 도덕적으로 규정된 관계를 만들어 낸다.

언약이 공동체의 삶을 도덕적으로 구축할 수도 있지만, 그 언약을 억압이 아니라 정의의 언약으로 기만이 아니라 진실의 언약으로, 포결깅 아니라 평화의 언약으로 만들기 위해서 무엇이 그 언약 자체를 도덕적으로 구축해야 하는가?하는 결정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이 언약적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언약 그 자체는 아무런 도덕적 기반을 갖지 않으며, 다른 곳에서 오는 본질적 가치에 의존해야 한다.

언약의 도덕적 기반은 언약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해 제공된다.

언약은 먼저 그것이 도덕적 범주이기 때문에 유용한 정치적 범주가 될 수 있으며, 그 핵심에 있어서 신학적 범주이기 때문에 도덕적 범주가 될 수 있다.

몰트만이 주장했듯이,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언약을 맺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언약을 맺을 수 있는 인간의 부인할 수 없는 능력은, 그것을 깨뜨길 수 있는 명백한 능력과 짝을 이룬다.



새언약, 포용

새언약은 적대감이라는 배경에서 나타나며, 이 적대감은 어떤 추상적인 언약으로 바로 잡아야할 추상적 본성의 상태가 아니라, 언약에 의미 속해 있지만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펴져 있는 사회적 역학으로 이해해야 한다.

새언약은 돌판에 쓰여진 언약의 약속들을 어떻게 마음에 새겨 놓을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십자가 언약을 탐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아 안에 인류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심으로써 언약을 갱신하신다.

계약과 달리 언약은 상호적 유용성의 관계가 아니라 도덕적 허신의 관계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각 사람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

타자의 타자성이 각 사람의 정체성 안으로 침투한다.

언약을 갱신한다는 것은 한쪽의 관점을 초월해 다른 쪽의 보완적 경향을 고려하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언약을 갱신한다는 것은 타자의 정체성 변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변화하는 타자를 위해 자아 안에 공간을 마련하고 타자의 유동적 정체성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기끼어 재협상한다는 것을 뜻한다.

언약의 각 당사자는 자신의 태도와 정체성을 상대편의 태도와 정체성에 대해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상보성과 역동적 정체성의 지속적인 재조정이 없다면, 도덕적 구속력만으로 다원주의적 맥락에서 언약에 대한 압력을 충분히 다 막아 낼 수 없을 것이며, 결국 리바이어던이 되돌아올 수 있는 문이 열릴 것이다.

언약을 지탱하고 갱신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자아 안에 타자를 위한 공간을 만들고 타자를 존재에 비추 자아를 재조정해야 한다.

새언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첫 번째 언약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이 지나가신 그 동물이 죽었던 것처럼, 언약을 어길 바에는 차라리 하나님 자신이 죽겠다는 맹세를 뜻한다.

너누마도 인간적인 언약의 상대편이 언약을 깨뜨렷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으셨던 이야기이다.

한쪽이 언약을 불이행해도 그 언약은 폐기되지 않기 때문이다.

새 언약은 영원하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내어 주신 결과로 언약은 영원성을 얻는다.

언약은 어길 수는 있지만, 페기할 수는 없다.

상호 보완적인 정체성의 재조정, 언약을 깨뜨리지도 않은 사람에 의한 언약의 회복, 언약이 폐기되도록 내버려두기를 거부하는 태도 등은 새 언약에 관한 기독교 신학과 유비를 이루는 사회적 언약의 주요 특징들이다.

새언약이란 곧 계속해서 언약을 깨뜨리는 인류를 하나님이 끌어난으신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새언약은 적대감이라는 조건 아래서 우리가 서로를 끌어안는 방식이다.

포용은 언약의 내적 야상이며, 언약은 포용의 외적 양상이다.



나눔

하나님이 주시는 언약은 어떻게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는가?

계약과 다르게 언약은 희생이 전제가 되어 있다. 곧 생명이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것이다.

타자를 위한 공간을 마련해 놓는 다는 것은, 그 공간에 타자가 들어 올 때 나의 정체성도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삼위일체의 보편적 정체성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정체성의 방향성을 그리스로 말미암아 정체성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삼위일체'에서 부터 이미 '우리'라는 공동체성이 근본적인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차원을 실재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민네이션, 생각

그러니깐 언약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희생하는 행위를 통해서 타자에게 그들의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며, 타자들에게도 역시 우리의 희생이 언약의 상징을 선물해 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새 언약은 언제 성취되는가? 광야에서 놋뱀을 보는 것으로 상징이 현실이 되듯이, 그리스도의 포옹안에 그러니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우리가 처다봄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언약의 성취를 맛보게 된다.





포용 9 _두팔벌리신 하나님


들어가기

상호 보완적인 정체성의 재조명, 언약을 깨드리지도 않은 사람에 의한 언약의 회복, 언약이 폐기되도록 내버려두기를 거부하는 태도 등은 새 언약에 관한 기독교 신학과 유비를 이루는 사회적 언약의 주요 특징들이다.

화해라는 관념과 역동적이며 상호적으로 조건지워지는 정체성이라는 관념을 결합한 은유다.

새 언약이란 곧 계속해서 언약을 깨뜨리는 인류를 하나님이 끌어 안으신다는 것이다.

포용은 언약의 내적 양상이며, 언약은 포용의 외적 양상이다.


포옹, 포용의 신학

애초에 '포용의 신학'이라는 사상을 촉발시킨 것은 탕자에 관한 풍성한 이야기가 발단이 되었다.

이 책은 탕자에 대한 포용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발견하고자한 노력이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정체성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보통 둘째 아들에 대한 평가는 안정된 가족을 떠나는 이유가 욕망이라는 의미에서 탐욕과 어리석을 대표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탕자는 진정한 자아를 찾고 개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가부장적인 체제를 벗어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기존에 가지고 있는 탐욕이라는 관점에서 자유라는 관점으로 완전한 전환이 일어난다. 물론 볼프는 이것이 옳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둘째 아들의 귀환은 단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일자리를 찾으러 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카프카의 소설 '귀향'에 나오는 것처럼 탕자는 가족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떠남, 정체성

떠남은 개별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필요한 분리 행위가 아니라, 그것 없이는 자아가 자아일 수 없는 관계로부터 스스로를 끄집어 내고,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으로 부터 단절시키며, 스스로를 그들의 원수로 만드는 배제 행위이다.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을 밀쳐낸 결과 역설적이게도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자신에게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세계로부터 밀어내고자 했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속해 있는 타자를 기억해야 한다.

탕자의 귀환은 회개를 했다는 결과가 아니라 회개를 하기 위한 전제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기억해 내는 일이었다.


아버지, 정체성

관계가 도덕적 규칙보다 우선한다.

도덕적 공적은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관계는 도덕적 공적에 기초하지 않는다.

회개와 고백, 행동의 결과'가 모두 그 나람의 자리를 차지하기는 하지만, 포용하고자 하는 의지는 행동이 얼마나 훌륭한지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베푼 낭비'는 어떤 격한 감정에 의한 무모함이 아니라 관계의 우선성에 관한 심오한 지혜로 인한 것이다.

아버지에게 관계의 우선성은 도덕적 규칙이 '배제'와 '포용'을 통제하는 최종적 권위가 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에 대한 거부일 뿐 아니라, 아들들로부터 고립된 채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지 않겠다는 거부이기도 하다

아들들의 변하는 정체성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재조정하며, 그에 따라 그들의 깨어진 정체성과 관계글 재구축한다.

아버지는 질서를 파괴하기보다는 계속 재조정함으로써 그 질서가 배제의 질서가 아니라 포용의 질서가 되도록 지켜가신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자아 안에 타자의 타자성을 위한 공간ㅇ르 만들고 범죄한 타자에게 돌아오라고 초대하며 그들로 하여금 고백할 수 있도록 환대의 조건을 이루고 그들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는, 결코 파괴할 수 없는 사랑이 그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나눔, 생각

레비나스가 이야기한대로 타자의 이야기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타자의 이야기가 사회과학에서는 많이 다뤄졌지만 신학에서는 타자를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강영안 교수님에 의하면 이 책이 신학과 타자를 연결했던 최초의 책이라고 한다.

소속감에 대한 기억으로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우리가 처음 소속되었던 곳으로 말이다.

규칙'에 의거해서 존재의 정체성을 규정했던 첫째아들의 화는 결국은 자신을 지키고 있었던 '정의'가 깨어짐에 따라서 둘째 아들은 위험세력으로 여겼던 것이다.

규칙에 의거해서 타자를 정죄하면 악'으로 규정하게 된다. 획일화을 강화시키고, 상호작용을 단순화시키면 악은 완전히 규정화된다.


민네이션, 생각

우리는 살면서 많은 떠남과 배제와 단절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우리 인생에 많은 부분에 남아 있다.

사람과 만나서 나의 정체성이 새롭게 연결된다. 내가 어떤 그룹과 집단에 있는지에 따라서 정체성의 구성이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는 것을 잊어 버리는 순간, 수동적으로 자신이 속한 단체 혹은 그룹, 사람들의 정체성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수동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정체성에 목말라 자신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줄 사람들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 안에서 정체성을 찾기 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정체성을 건내줄 단체를 찾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하나님 없이 자신의 정체성이 구성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경계하셨던 바리새인의 정체성을 갖을 우려가 많다.


민네이션, 정체성, 하나님나라

이제 2차원적인 양방향성에서 삼차원적인 입체적 차원으로 들어가보자.

하나님 나라와 정체성을 생각해 본다. 나는 어떨 때 하나님 나라의 속했다고 생각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규칙이라고 하는 성경의 명령을 따를 때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 하나님나라의 정체성을 주는 것 같이 느껴지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규칙을 어겼을 때부터 발생한다. 마치 탕자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돈을 허랑방탕하게 사용했을 때부터 회개의 전제가 시작되는 것과 같이 말이다.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은 그럼 '민네이션'이 생각하기에는 언제 시작되는가? 그것은 '용서와 포용'이다. 내가 용서 받았고, 내가 포옹을 통해서 포용되었다는 것을 느낄 때, 경험할 때 나는 완전히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아들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체성이 주는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과 나라는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로 연결된다는 점이고, 이전에 명령을 내린 자와 지키는 자라는 비인격적 도식으로는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는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 나라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관계안에서 드러나는 것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https://youtu.be/UYJaKXQ53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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