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슬라브볼프_배제와포용_포용2_포용과 배제, 포함과 분리
니체는 복음서를 심층적으로 읽어내면서 예수님의 적들이 스스로를 선하다고 생각하는 태도와 그 분을 죽이고자 하는 태도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은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사악한 짓이 아니라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 짓이었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영혼이 자신의 선한 양심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 분이 선에 대한 자신들의 관념을 거부하신 것을 악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니체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이미 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안적인 덕목을 제안하는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한다.
배제는 악한 마음의 의한 죄일 수도 있지만, 또한 선한 양심에 의한 죄일 수도 있다.
미셀푸코, 근대성
합리적인 사람들과 문명화된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은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가?
미셀푸코의 작업은 포함이라는 근대성의 역사를 끈질기게 뒤따라온 배제의 그림자를 분석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광기와역사'는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 비이성을 가진 사람들을 배제하는 이야기이다.
감시와 처벌'에서는 배제의 기제에 대해서 '이분법적 구분'(광인, 비정상과 비정상과 정상)과 강제적 배치'라는 이중적 억압 전략을 통해 기능한다.
그리고 '감옥의 탄생'에서는 일반적이고 사회적인 '정상화의 권력'을 주제로 삼아서 이야기르 전개한다.
그는 배제가 단지 억압적인 추방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적인 형성의 문제이기도 함을 강조한다.
푸코는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인간과 달리 근대의 개인은 죄속에서 태어난 형벌의 운명에 처한 것이 아니라 형벌과 감독과 제약이 수단으로 부터 태어났다고 말한다.
정상화의 권력을 통해 배제는 우리가 포함의 문명과 연관 짓는 모든 제도-국가 장치, 교육기관, 언론, 학문-을 지배한다.
포함, 배제
포함의 역사 이면에는 배제의 역사가 존재한다.
포함이 승리를 축하하는 공간에서 배제의 의기양양한 조소가 울려 퍼진다.
배제라는 그림자 내러티브에 대한 그의 비판에 담긴 파토스는 포함에 대한 깊은 갈망의 이면이기도 하다.
이분법적 구분, 강제적 배치, 정상화의 권력에 대한 폭로는 모두 내부를 보호하는 벽을 공격함으로써 내부 공간을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경계, 배제
얼핏 보기에 차이로 보이는 것을 재해석해 보면 그것이 권력에 근거한 차이이거나 수사학적 게임 전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차이는 결코 그 자체로 하나의 고정된 상태를 갖지 못한다.
이것 혹은 저것의 양자택일은 존재하지 않으며, 둘 중 어느것도 아닐 가능성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_앨런 울프
부정적인 자유의 급진적인 비규정성은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포함을 향한 일관된 충동과 짝을 이루는 안정된 대응물이다.
볼프, 경계
하지만 이런 급진적인 비규정성은 포함이라는 관념을 내부로 부터 약화시키지 않는가?
경계가 없다면 우리는 무엇에 맞서 싸우는지만 알 수 있을 뿐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는 알 수 없다.
한바디로 경계가 없다면 우리의 방향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된다.
배제에 맞서 현명하게 투쟁하기 위해서는, 전복해야 할 억압적 정체성이나 관행과, 긍정해야 할 억압적이지 않은 정체성이나 관행을 구별하게 해주는 범주와 규범적 기준이 필요하다.
경계 없음이란 지능을 갖춘 행위자가 없음을 뜻한 뿐 아니라 결국에는 생명 없음을 의미한다.
모든 질서에 맞서 싸우며 순수하고 추상적인 비질서를 옹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질서는 아무런 속성을 갖지 않는 피조물, 아무것도 구별해 낼 수 없으며 아무런 행복도 기쁨도 아무런 자유와 정의도 찾을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경계의 부재는 비질서를 만들어내며, 비질서는 배제의 종식이 아니라 생명의 종식이다.
배제의 관행에 대한 반대가 새로운 형태의 배제를 만들어 낸다.
모든 경계가 사라진 후 무엇이 배제되었는지 혹은 무엇이 배제되어서는 안되는지를 분명히 말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배제에 대한 투쟁이 스스로 붕괴되어 비질서의 심연으로 빠지고 마는 것이다.
배제, 성찰
확신을 가지고 배제를 악으로 명명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를 통해 배타적이지 않은 정체성을 규정하는 배타적이지 않은 경계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판단과 관행 속에 있는 배타적 경향을 찾아내는 능력을 무디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배제의 감각을 성찰하고 배제를 악으로 명명할 때 우리는 배제에서 멀어져서 포용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정체성을 규정하는 자체로 배제의 관점에서보면 '정체성 정치'의 시작이며 이것은 또한 포용에서 멀어지는 결과이기도 하다.
나누기, 편짓기, 나와 친한 사람에게 칭찬하기, 나를 어딘가에 소속된 상태로 자랑스럽게 여기기 등은 배제의 다른 양식이다.
성찰한다는 것은 이렇듯 자신에게 그어진 마음의 경계를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나눔, 고민
포용과 배제는 대립각이 아니다.
배제의 반대는 포함이다. 포함 안에서는 배제가 다시 존재해서 결국 포함이 존재하는 바운더리는 계속해서 줄어들게 된다.
포용의 방식이라면 지금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특별성을 버리고 보편성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 관계 속에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세상 가운데 사랑의 모습을 넓혀간다.
민네이션, 생각
우리가 배제를 시행할 때는 사실 악한 의도가 아니라 선한의도에서 기인한 것들이 더 많다.
결과적으로는 선을 추구했다고 하지만, 과정에서는 악의 방식으로 배제의 방식으로 규정해서 짤라 버리는 것들이 너무 많은 듯하다.
선에 대해서, 무엇인가 결정되어 있을 때 우리는 신념'이라는 것을 갖게된다. 그런데 이러한 신념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그 신념은 처음에는 선함에서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볼프의 의견대로 한다면 선한 의도와 선한 방법이 맞아야 한다는 것인가? 즉, 목적과 수단이 선해야 한다는 것인가? 의문이다.
확실히 배제가 일어나는 지역은 지배'라는 목적이 뒤따를 때이다. 무엇인가 목적하고 지켜야만 하는 것이 생기면, 우리는 자연스러운 배제의 역사를 창출한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은 지배를 목적으로 두는 사람들에게 항상 눈앳가시가 된다. 무엇인가를 엉망으로 만들 것 같고, 무엇인가를 파괴할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배제를 당한다.
포함과 포용은 다르다. 또한 배제와 분리는 다르다. 배제는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분리는 인정하고 난 후에 그것과 동거하는 방식이다.
부작위가 내제화되면서 자기부정성이 강호되고, 내면적인 작위가 외제화되면서 사랑하는 방식이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