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_인간불평등기원론 공부 시작하기
프랑스 계몽기의 천재적 사장가 루소는 171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계수리공인 아버지와 목사의 딸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구속이 싫어서 방랑을 떠난 그는 바랑부인'을 만나 그녀에게 모든 삶을 바친다.
그리고 바랑부인으로 부터 삶과 철학, 예술과 문학을 배우면서 거대한 철학자가 되어가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루소 자신이 생각하는 기초적인 세상의 프레임을 고민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인간은 그렇게 살도록 고안된 것인가?
인간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되는가?
왜 불평등은 시작되고 또 사라지지 않는가?
이책은 1755년에 쓰여졌다.
discourse of human inequality'가 이 책의 영어제목이다.
인간의 불평등은 2가지가 있다.
자연적, 신체적 불평등이 첫번째이고, 정치적 불평등(누군가가 제도로 정한 것)이 두번째이다.
정치적 불평등은 자연스럽게 특정계급의 특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루소가 계속해서 고민하는 것은 정치적 불평등의 문제이다.
이책은 1부에서는 행복하게 살았던 자연상태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다채롭게 진행된다.
2부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떠나고 인위적인 힘이 개입되면서 행복을 잃어가는 모습을 논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해서 자연 상태로 두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나타난다는 홉스의 성악설을 루소는 인정하지 않는다.
자연의 인간은 선악의 개념을 초월한 존재였다고 말한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선악의 개념을 초월한 존재였다고 말한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선과 악의 상식적인 구별 이전에 존재하기 때문에 악할 필요도 없었고 악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수가 늘어나고 생산수단의 사유화가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간을 소유에 종속시켰다.
루소가 볼 때 사유재산제도야말로 인간 불평등의 뿌리이며 불행의 근원이다.
이러한 루소의 생각은 매우 혁명적이었고, 평등이라는 이념의 형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루소가 볼 때, 인간의 불평등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인간들이 꼭 그렇게 불평등한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살아야할 당위성도 없다.
사회 질서는 새롭게 바꾸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에 차이가 소외를 만들어내고 소외는 경쟁을 만들어 내어 서로를 속이게 된다.
이러한 거짓이 제도화의 옷을 입으면, 구조는 항상 힘있는 자들의 논리대로 돌아간다.
그러한 구조는 대부분 결과적으로 국가로 나타나는데, 국가라는 제도가 생기면 불평등은 매우 견고해져서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국가는 루소가 보기에 국민들의 일반의사에 의하여 존립하는 것이다.
국민의사에 맞지 않는 제도들은 언제나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국가를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보았다. 루소는 그러한 국가권력을 시민들이 다시 가지고 와야 하며 기존질서는 언제든지 무너 뜨릴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매우 혁명적인 부분도 가능해지는 사상이라서 사람들로 부터 위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간사회를 침착하고 냉정한 눈으로 고찰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강자의 폭력과 약자의 억압 상태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지혜보다는 종종 우연에 의해 조성되고 강약이나 빈부로 천해지는 저 외면적인 관계처럼 불안정한 것은 없으므로, 인간이 만든 제도는 언뜻 보기에 모랫더미 위에 지어놓은 건물처럼 보인다.
인간과 인간의 타고난 능력, 그 능력의 계속적인 발전에 대해 깊이 연구하지 않고서는, 결코 현재 사물의 구조 속에서 신의 의지가 만들어낸 것과 인간의 의지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을 구별하거나 가려내지 못할 것이다.
'신이 그대에게 무엇이 되라고 명하였는지, 그리고 그대가 인간 세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배워야 한다.'
제네바시민들에게 쓰는 글에서 루소는 자신의 생각을 빗대어서 표현하고 있다.
이신론자인 루소에게서 '일반의지'라는 것은 이제야 이해가 간다.
일반의지는 원래 인간이 가지고 있었던 자연상태, 자연법을 가지게 된 상태를 이야기한다.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은 선하다라고 했는데, 그 자연적인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
루소가 고민하는 문제들을 나누는 방식은 사실 칼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분류한 것과 같다.
포퍼는 그 책에서 인간과 자연은 다르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세상을 분석하는 방법(자연과학을 사회과학으로 치환시키는 방법)에서 인간과 자연은 같다라고 하는 (자연과학을 동일시하여 적용하는 방법) 방법으로 사회를 분석한다.
그리고 그러한 분석 위에서 대안을 제시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보통의 사회변화를 일으키는 방식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루소가 자신의생각을 퍼트려 가면서 결과적으로 프랑스혁명의 이념적 원천을 제공하게 된다.
루소는 근본적으로 국가의 체제와 법률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정해놓은 법칙이 불평등을 만들어내는데, 그 법칙을 정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 없었을까? 당연히 있었을 것 같다.
이국운 교수님의 말처럼, 누구 그들에게 권한을 주었는가?
사실은 아무도 권한을 준 적이 없다. 권한은 제도로 부터 주어지는데, 그 제도는 사실 우리가 결정해서 만들지 않았고 새로운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 쓰여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계약이 시작된다.
루소와 홉스의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홉스는 그래서 국민들 통제한 국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반면, 루소는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자연법을 실현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년 6월 28일 ~ 1778년 7월 2일)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사회계약론자이자 직접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계몽주의 철학자이다.
루소는 1712년 당시 시공화국인 제네바의 그랑 뤼 40번지(Grand'rue 40)에서 시계공인 아버지 아이작 루소(Issac Rousseau)와 쉬얀 베르나르(Suyanne Bernard)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출산 후유증으로 열흘 뒤에 사망했다.
아버지가 제네바 시와 불화로 말미암아 1722년 베른 시 공화국의 니옹(Nyon)으로 주거지를 옮겼으며, 제네바 근교의 기숙사 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10세 때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 여러 직업에 종사하며 각지를 돌아다녀야만 했다. 1724년부터 루소는 법원 서기가 되기 위한 직업 교육을 받았다.
1728년 제네바가 우연히 들른 루소를 거부하자, 그는 이탈리아의 토리노로 발길을 돌려 그 곳에서 로마 가톨릭 세례를 받았으며, 장 조세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여기서 루소는 드 베르셀리(de Vercellis) 부인의 시종과 구봉 백작의 서기를 겸직했다. 바랑 부인의 후원으로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사제가 될 의향이 없어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르 메트르의 지도하에 음악을 공부한다. 1730년 로잔으로 이주하여 가명으로 음악사 생활을 했다. 다음 해 루소는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한 후 리옹을 거쳐 샹베리 등지에서 생활했다.
1732년부터 1740년까지 샹베리와 샤르메트에서 바랑 부인 곁에 살면서 음악에 몰두하고, 많은 독서를 하며 다방면에 걸쳐 교양을 쌓는다. 1742년 새로운 악보 표기법을 정리하고, 파리로 가서 그것을 아카데미에서 발표하지만 기대했던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1743년 (Dissertation sur la musique moderne)이 출판된 후 베네치아로 이주하여, 몽테귀 백작의 서기직을 맡지만 1년도 채 못 되어 백작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퇴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1745년 루소는 여러 귀족부인과 사귀었지만, 결국 23살 세탁부 하녀, 테레즈 르 바쇠르와 오랜 동거를 거친 후 결혼했다, 1년 뒤 그녀가 낳은 첫 아이와 1748년에 태어난 둘째 아이를 고아원에 맡겼다.
1749년부터 루소는 디드로와 친교를 맺은 후, 그의 권유로 프랑스 아카데미의 학술 공모전에 <학문 및 예술론>이 1등으로 당선되어 이름을 떨쳤으며, 작사·작곡한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가 공연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전서> 편찬에 참여해서 음악과 정치경제 항목에 할당된 글을 쓰고 다음해에 계몽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학문예술론》을 출판한다. 1752년에는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를 작곡하였다.
1754년 디종의 학술원에서 "무엇이 인간 불평등의 근원인가?"라는 주제로 학술연구 공모전에 제출하기 위해 정치,사회제도에 관해 골몰, 소유권 제도와 사회 조직의 발전으로 생긴 불평등과 비참함을 자연 상태의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와 대립시켜 설명했다.
이는 이후 《사회 계약론》의 바탕을 이루었다. 1762년에 저술한 《사회 계약론》에서 자유와 평등의 자연권을 국가 상태에 있어서 확정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로서 사회 계약론을 전개하고 인민주권의 이론을 완성하였다. 권력 행사가 정당화되는 유일한 조건으로서‘항상 정당한’ 일반 의지를 설정하고, 실제에서는 그것이 직접적인 다수결(多數決)에 의하여 확인될 수 있다고 하였다.
1756년 에르미타주에 정착해서, 《사회계약론》, 《신 엘로이즈》, 《에밀》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1757년 연극의 사회적 기능의 문제 때문에, 디드로와 의견 충돌이 있은 후 1년 뒤 절교했다.
저술로 인한 탄압
1761년에 《신 엘로이즈》가 파리에서 간행되어 큰 성공을 거둔다. 1762년 《에밀》과 《사회계약론》등 18세기 사상계를 자극한 대작을 계속 발표하였다. 《에밀》에 서술된 자연 종교의 이론과 그의 피해 망상적 행위로 각 방면에서 박해를 받았다. 특히 성직자를 공격한다는 이유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분노를 사, 그에 대한 체포장이 발부되어 1762년 스위스로 피했다. 1762년부터 8년간 유럽 각지를 여행하는데, 1764년 《시민들의 감정》이라는 익명의 작품(나중에 볼테르였음이 밝혀진다)이 제네바에 나타나 루소를 공격한다. 이것에 응수하기로 결심하고서 《고백》을 집필하기 시작해서 1769년에 완성하고, 1770년 파리로 돌아와 1772년부터 1776년에 걸쳐 《루소가 장자크를 판단한다》를 쓴다. 1777년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쓰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명상하지만 집필을 끝내지 못하고 1778년 7월 2일 죽는다.
루소의 사상을 대표한다고 할 수있는 일반의지는 마치 공자의 사상이 간단히 인(仁)으로 상징되어 논란이 끊이지 않듯이 논쟁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루소는 비교적 일관된 자기철학을 전개하고 있어 이를 이해하기가 어렵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루소는 사상 최초로 인간평등문제를 실천적으로 파고든 철저한 평등주의자다. 계몽철학자들도 평등을 주창했지만 당위적 차원에서이고, 사실상 엘리트주의였다.
천재 철학자 칸트조차도 철저한 엘리트주의를 자처했다. 칸트는 루소의《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고는 번개를 맞은듯 깨달음을 얻었다면서 "나는 천성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로 지식만이 인류의 영광을 이룬다고 믿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대중을 경멸했다. 루소를 읽고는 이런 맹목적 편견이 사라졌다. 나는 인간성에 대한 존경심으로 도덕적 평등주의자가 됐다"라 했다.
이렇듯 루소는 삶 자체도 그렇거니와 철학자체도 평등이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평등에 골몰했다. 루소는 모든 사회악과 사회갈등의 근원이'경제불평등'에 있다고 단언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사회문제가 만연해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이를 '일반의지론'으로 풀어나갔다.
마키아벨리가 분열된 조국을 통합시키기 위해서는 위정자가 어떠한 절대적 권한도 행사할 수있어야 한다고 했듯, 루소도 수천년에 걸쳐 고착화된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근본적인 사회구조의 변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철학이념으로 일반의지의 필연성을 역설한 것이다.
원래 일반의지는 신의 의지을 원용한 말이고 이는 또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에 연원하며 칸트의 선의지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까 일반의지는 상식과 달리 단순히 보편적 생각이 아니고 진리와 선을 전제하는 의지인 것이다. 그래서 루소는 일반의지가 만인의 생각이 아닐 수도 있고 일인의 견해라도 일반의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루소가 철저한 평등주의자라는 것에 비추어 일반의지는 진리이되 신비적, 초월적 진리가 아니라 현실속에서 구현되는 정의고 공공선이 된다. 정의와 선은 당연히 평등이고 평등은 경제적 평등으로 공동체 모두의 이익을 보장해서 공존, 공영하는 공화주의의 근본이념이다.
루소는 사회의 변혁을 도모한 사상가로, 일반의지는 관념에 그치지않고 반드시 실천을 전제하고 동시에 일반의지는 방향성을 갖는다. 선한 목적이 정해지지 않은 일반의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루소의 일반의지는 보통사람, 평범한 사람의 의지로 읽힐 수는 있으되 반드시 평등(경제) 공화주의라는 좌표를 향한, 평등실현을 위한 합일된 의지 바로 그것이어야 하는 이유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세상에 널리 알려진 루소의 이 명언[3]은 일반적으로 문명이 아닌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이해되고 있지만 그 정확한 진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사회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함으로써 그 철학의 본질을 유추할 수 있게 해주는데, 루소는 문명을 거부한 것이 아니고 자유롭고 평등하지 못한 문명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자연철학자도 아니고 사회계약론을 쓴 민주주의자이자 사회철학자인 루소가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을때는 자연의 중층적 의미도 새기지 않을 수 없다. 자연(natura)은 서구어로 본성이라는 의미도 있는 만큼 인간의 천부적 자연권인 자유와 평등의 보장을 무엇보다 강조한 것으로 볼 수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 말을 통해 자연의 낭만성과 야성이 아니라 평화롭고 자유로운 평등한 사회의 원형을 복원할 것을 세상에 강력히 주장했다고 할 수 있다.
루소에 대한 평가는 다채로운데, 평생 루소의 초상화를 서재에 걸어놓고 그를 흠모했다는 대철인인 칸트에 의하면 "나는 인식에 대한 무한한 갈증을 느낀다. 그것만이 인류에게 명예를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나를 루소가 옳은 길로 인도했다... 나는 그로부터 인민을 존경하는 법을 배웠다"라고 함으로써 왜 그가 《에밀》을 읽는 데 몰입해 한번도 빠지지 않은 산책을 걸러야 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의 특색은 18세기적인 사회 윤리를 가장 독창적으로 탐구한 점에 있으며, 근본 사상은 "자연은 인간을 선량·자유·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사회가 인간을 사악·노예·불행으로 몰아넣었다"라는 명제로 요약된다. 그가 쓴 모든 저작도 이 원리에 기초하여 개인과 사회를 회복하는 방법을 나타낸 것이다. 그의 영향은 철학·정치·교육·문학 전반에 걸쳐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그의 문학적 지위는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자 볼테르와 함께 19세기의 대표적 작가로서, 계몽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다.
Dissertation sur la musique moderne, 1736
학문예술론 Discourse on the Arts and Sciences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 1750
Narcissus, or The Self-Admirer: A Comedy, 1752
마을의 점쟁이 Le Devin du Village: an opera, 1752, scorePDF (21.7 MB)
인간 불평등 기원론 Discourse on the Origin and Basis of Inequality Among Men (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 1754
Discourse on Political Economy, 1755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지 Letter to M. D'Alembert on Spectacles, 1758 (Lettre à d'Alembert sur les spectacles)
신 엘로이즈 Julie, or the New Heloise (Julie, ou la nouvelle Héloïse), 1761
에밀 Émile: or, on Education (Émile ou de l'éducation), 1762
The Creed of a Savoyard Priest, 1762 (in Émile)
사회계약론 The Social Contract, or Principles of Political Right (Du contrat social), 1762
말제르브에게 보내는 편지 Four Letters to M. de Malesherbes, 1762
피그말리온 Pygmalion: a Lyric Scene, 1762
Letters Written from the Mountain, 1764 (Lettres de la montagne)
고백 Confessions of Jean-Jacques Rousseau (Les Confessions), 1770, published 1782
Constitutional Project for Corsica, 1772
폴란드 정부론 Considerations on the Government of Poland, 1772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Essay on the Origin of Languages, published 1781 (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Reveries of a Solitary Walker, incomplete, published 1782 (Rêveries du promeneur solitaire)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 대화[5] Dialogues: Rousseau Judge of Jean-Jacques, published 1782`
루소는 권력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정당하지 않은 모든 권력은 강자에게나 약자에게 모두 예속과 의존성을 야기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예속과 의존은 루소가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자유와는 대립된 개념이다. 자기편애에서 비롯된 우월성에 대한 욕망, 다시 말해 권력에 대한욕망은 남의 인정과 복종을 필요로 한다. 강자의 권력은 약자의 복종을 전제로 성림되며, 이 경우 강자는 권력의 실현을 위하여 약자에게 의존하게 되며, 약자는 자기생존을 위하여 강자의 명령에 의존하게 된다. 권력의 불평등은 자유의 파괴를 가져오며, 강자나 약자 모두를 노예로 만든다고 루소는 판단했기 때문에, 그는 모든 인간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만드는 정당한 권력을 창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루소는 일반의지에서 정당한 권력의 원천을 찾았다. 일반의지는 항상 올바르지만, 강력한 사적 의지에 억눌리게 되면, 일반의지는 침묵하게 되고, 결국은 정당한 권력은 사라지게 된다. 일반의지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종교나 교육의 도움이 끊임없이 필요하며, “습속, 관습, 여론”과 같이 시민의 마음속에 새겨진 법이 정치사회를 떠받치는 힘이 되어야한다고 루소는 주장한다. 자기입법을 실현하는 일반의지를 통해 루소는 근대정치철학의 핵심문제인 개인과 공동체와의 조화, 권력의 균형을 꾀하려 하였는데, 이것은 루소의 커다란 철학적 공헌이라 할 수 있다.
루소의 국가 이론의 기초를 이루는 개념이다. 그는 이것을 전체 으지(프 volonté de tous)와 구별하였다. 후자는 사적인 이해를 갖고 있는 개개의 특수의지의 총화에 지나지 않지만, 전자는 개개의 이기심을 버린 일체로서의 공민의 의지이며 공공의 이익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주권의 작용의 유일하고도 정당한 기초로 간주했다. 다만 그의 경우에는 본질적인 이해의 대립이 없는 동질적인 국가가 전제되고 있다. 디드로도 이 개념을 사용하였으나 루소의 경우와는 의미가 다르다.